다시 태어난 반 고흐 247화
45. 뱅크스(6)
별수 없는 듯.
남자가 신경질을 내며 돌아섰다.
어쩔 수 없이 아빠를 따라가는 올리비에에게 아무 일 없길 바랄 뿐이다.
할아버지도 같은 생각이신 듯 혀를 찼다.
“놀랐지.”
“네.”
“그러니까 막 나서면 안 돼. 다칠 수 있잖니.”
정신 나간 남자 때문이 아니라 할아버지가 그자를 해칠까 봐 놀랐다고 말씀드리자 눈을 깜빡이셨다.
“엄마, 놀면 안 돼?”
“으아아아아앙.”
가까이 있던 부모에게 아들리, 비다 라바니와 놀면 안 되냐고 묻는 아이들, 무서워서 우는 아이들, 덩달아 우는 아이까지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지미, 집에 가자.”
“난 더 놀고 싶은데.”
“다음에. 다음에 와도 되잖아.”
“다음에 언제?”
“엄마, 나도 가야 해?”
“아니야. 친구하고 노는 게 어때서. 노엘은 잘못한 거 아무것도 없어.”
“정말?”
“그럼. 엄마는 노엘이 친구들하고 잘 지내는 게 좋아.”
놀란 탓인지, 아니면 표현하지 않을 뿐 동양인, 무슬림과 함께 어울리는 걸 꺼리는지 아이를 챙기는 부모도 있지만.
다행히 극단적인 상황까지 몰리지는 않았다.
많은 부모가 아이들이 어울려 노는 걸 허락해 주고 있다.
생각해 보면 이곳은 범죄율이 높기도 하지만 오랜 시간 무슬림과 프랑스인이 공존한 지역이기도 하다.
만약 서로를 미워하는 사람들만 있었더라면 어느 한쪽이 떠나갔을 터.
서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기에 이곳이 유지되고 있으리라.
“라바니, 아들리.”
풀이 죽은 라바니와 아들리를 불렀다.
“어?”
“…….”
“내일도 꼭 와줘.”
라바니가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되는지 모르겠어. 괜히.”
“너희를 미워한 애는 없었잖아.”
“그렇긴 하지만.”
“어른들 때문에 친구를 잃을 순 없다고 생각해. 내일은 동네 친구들도 같이 데려와 줘.”
“훈아…….”
“더 맛있는 과자 가져올게. 물감도, 붓도 더 많이.”
동의를 구하려고 올려다보니 할아버지가 빙그레 웃으셨다.
“얘들아,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왜애?”
“나 더 놀래.”
다른 아이들에게 내일 만나자고 하니 간절한 눈빛을 보내온다.
* * *
교대로 고훈과 고수열의 안위를 지키던 아르센은 내심 당황했다.
고훈과 고수열에게 폭력을 가하려던 남자를 제압하려던 차, 고수열이 일을 손쉽게 처리해 버리고 말았다.
라바니를 구타했던 불량배들은 아동학대 및 금품 갈취 혐의로 구치소에 들어가 있으니, 딱히 시비를 걸어올 사람은 없어 보였다.
‘경고 정도는 해둬야겠지.’
아르센은 고훈과 고수열에게 시비를 건 남자의 뒤를 쫓았다.
한편 달리다 광장에서 일어난 작은 소란은 알렉스 우드의 생방송과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목격담을 통해 빠르게 전파되었다.
알렉스 우드가 게시한 영상으로 한 프랑스인이 고수열을 모욕하고 고훈에게 주먹을 휘두르려 한 사실이 알려지며 사람들은 분노했다.
└아직도 저런 놈이 있네.
└애들끼리는 좀 놀게 내버려 둬라.
└지가 누군지 아넄ㅋㅋㅋㅋㅋㅋ 미친 거 아니야?
└대체 무슨 자신감일까?
└그래서 누구임?
└몰라
└틀린 말 하나도 안 했구만 이게 뭐라고 난리냐? 자기 아들이 무슬림이랑 노니까 데려가려는데 저 늙은이가 먼저 시비 걸었잖아.
└너 혹시 프랑스 사람이야?
└당연한 걸 왜 물어?
└아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너랑 알게 될까 봐. 혹시 코린이라는 사람 만나면 꼭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소개해 주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발 말만이라도 프랑스인 아니라고 해줘 ㅠㅠ 영국인이라고 소개하면 안 될까 ㅠㅠ
└지랄들 하네. 너희 같은 놈들 때문에 비코랑 칭총이 난리 치는 거야.
└고수열하고 고훈은 한국 사람이고 훌륭한 예술가야. 그리고 그들이 훌륭한 예술가가 아니라도 너한테 욕먹을 이유는 없어.
└욕하고 싶으면 좀 알고 하자. 알아보지도 않고 무조건 욕만 하면 되게 무식해 보여.
└아닠ㅋㅋ 고수열이 뭐 나쁜 말 했나? 애들 재밌게 놀고 있으니까 걱정되면 같이 있는 게 어떻겠냐는 말이 뭐가 어때서?
└진짜 놀랍다. 애 때리려던 사람을 옹호하네.
└근데 고수열 몇 살이야?
└64년생이니까 65살?
└대단하네. 이렇게 보니 체격도 좋아 보이고.
└젊었을 적 사진 보면 말랐던데. 운동 열심히 한 듯.
└훈이 애들한테 내일도 와달라고 할 때 표정 조금 슬퍼 보인다.
└재밌게 놀고 있는데 갑자기 저런 일 생기니까 놀랐겠지.
└내일 응원 가볼까. 멀지도 않은데.
└나 저기 사는 사람인데 고훈, 고수열 덕분에 거리가 진짜 활기차졌어. 저기 사는 사람 대부분 두 사람한테 정말 고마워한다는 거 알아줬으면 좋겠다.
많은 이가 고수열, 고훈 조손과 아이들이 겪은 일에 함께 분노했다.
그것이 작게나마 위안이 되었지만, 고훈은 혹시나 내일 아이들이 달리다 광장에 오지 않을까 봐 걱정되었다.
프랑스 아이도, 무슬림 아이도 또 다른 국가 출신의 아이도 모두 함께할 수 있기를 바라며 시작한 일이었다.
아이들에게 줄 초콜릿과 과자를 신중하게 고르던 고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고수열이 손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아무 일 없을 거야.”
“그런 사람은 걱정 안 해요. 올리비에나 다른 아이들이 놀랐을까 봐 그래요.”
“요 며칠간 재밌게 놀았잖니. 꼭 올 게다. 부모들도 괜찮다고 했고.”
“네.”
걱정은 할수록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을 키워냈기에, 고훈은 억지로라도 화제를 돌렸다.
“사람들이 할아버지 보고 놀랐더라고요.”
“왜?”
“젊은 사람도 제압하니까.”
평소 개량 한복처럼 체형이 드러나지 않는 옷을 입던 터라, 사람들은 젊은 남성을 제압한 고수열에게 깜짝 놀랐다.
“흐흐. 할아버지 멋있지?”
“멋있어요. 운동은 언제부터 하신 거예요?”
“흠. 영국 유학 시절부터 했지.”
고수열이 옛 기억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풀어냈다.
“처음에는 말도 잘 안 통하고. 당시만 해도 한국은 잘 안 알려졌거든. 이래저래 고생 좀 했단다.”
돌려 말하긴 했지만 고훈은 할아버지가 인종차별을 겪었다고 이해했다.
“그때 같이 있던 선배가 몸이라도 키우면 덜 건든다고 하더구나. 어차피 친구도 없고 학교랑 헬스클럽에서만 지냈지.”
지금은 미술계의 대부로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 두루 존경받는 조부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 일로 아시아, 아프리카, 무슬림을 향한 차별적 시선이 남아 있음을 체감할 수 있었다.
“건강해지기도 하고. 재미도 붙이니까 나중에는 취미가 된 게지. 좀 뛰면 기분이 좋지 않아?”
고훈이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인지는 이해했으나 마르소 저택에서의 운동 루틴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겨우 좋은 버릇이 들었는데 이사 오고 나서는 운동을 잘 안 했구나.”
“…….”
“내일은 가기 전에 할아버지랑 조금만 뛸까?”
고훈은 할아버지의 요청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네…….”
* * *
“어이쿠야.”
다음 날.
어제 일 때문에 간식과 그림 도구를 잔뜩 챙겼는데 할아버지의 SUT 차에도 다 넣을 수 없었다.
내심 불안해서 어떻게든 더 좋은 환경을 마련해 주고 싶은 마음이 과했던 모양이다.
“이거 좀 덜어내야겠구나.”
“어쩔 수 없죠.”
차고 한쪽에 짐을 내려놓고 달리다 광장으로 향했다.
“형이다!”
“훈이다!”
도착해 보니 어제보다 사람이 줄었다. 그제부터 조금씩 줄었는데, 어쩌면 처음부터 너무 많은 걸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잘 잤어?”
“응! 할아버지도 안녕!”
“껄껄. 그래. 그래. 이 녀석아, 간식부터 가져가면 어떡해.”
“배고파요!”
“으잉? 아침 안 먹었어?”
“아침 원래 안 먹어요!”
내일은 빵과 우유라도 준비해야 할 듯싶다.
“선생님! 오늘은 여기부터 치우면 되지요?”
“아, 예! 오늘도 와주셨네요!”
“하핫! 요 앞에 카페 하거든요. 하시다가 목마르면 말씀만 하세요!”
“아이고. 참. 고맙습니다.”
어른들이 고압수로 거리를 청소해 주는 걸 기다리며, 아이들에게 초콜릿과 과자, 파이 같은 간식을 나눠주었다.
“오늘은 지미 안 오나? 합.”
“합. 올리비에랑 노는 거 재밌었는데.”
아이들이 어제까지만 해도 함께했던 친구들을 언급했다.
올리비에의 부모야 말할 것도 없지만 지미의 부모도 무슬림, 동양인에 대해서 그리 긍정적이진 않았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라바니와 아들리도 안 보인다.
어제 일 때문인가 싶어서 가슴이 무겁다.
“안녕.”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블랑쉬 파브르가 서 있었다.
“어?”
놀라서 일어섰다.
“어떻게 왔어?”
“재밌어 보여서.”
그러고 보니 블라우스나 주름치마 같은 걸 입던 평소와 달리 점프슈트를 입고 밝은 금발은 올려서 묶었다. 들고 있는 양동이에는 붓도 여럿 챙겨두었다.
철저하다.
“힣. 옷 되게 웃기다.”
“이상해. 바지랑 티가 붙어 있어.”
“여기 물감 묻었다!”
아이들이 낯선 옷에 반응하자 블랑쉬 파브르가 정색했다.
“웃기지 않아. 멋진 거야.”
아이들이 파브르와 눈을 마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멋있다.”
박력에 밀린 것 같다.
파브르는 만족했는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얘들하고 그린 거야? 여길 다?”
놀란 눈치인데 나도 믿기지 않는다. 수십 미터의 길과 그 벽을 일주일 만에 이렇게 채웠으니 말이다.
“원래는 더 많았어.”
“나도 할래.”
고개를 끄덕이기가 무섭게 아이들이 달려들었다.
“언니도 그려?”
“과자 먹을래? 초콜릿 먹을래?”
“나, 나! 저기 해바라기 내가 그렸다?”
“나도 그려. 초콜릿 먹을래. 못 그렸네.”
“못 그렸어? 아닌데? 훈이 형은 잘 그렸다고 했는데?”
“거짓말이야.”
아망이 파브르의 말에 입을 크게 벌렸다.
“형, 거짓말했어? 나 못 그려?”
“아니야. 잘 그려.”
아망이 그것 보라며 허리에 손을 얹고 의기양양해하자 파브르가 붓에 물감을 묻혔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쓱쓱 해바라기를 그려내자 아망과 아이들이 깜짝 놀랐다.
“이게 잘 그리는 거야.”
가만 보면 마르소도 그렇고 파브르도 그렇고 묘하게 닮았다.
“나, 나 가르쳐 줘.”
“나도 할래.”
“훈이 형이랑 왜 달라?”
얼핏 보면 쌀쌀맞아 보이면서도 결국 아이들과 금세 친해진다.
다소 우울했던 기분이 파브르 덕분에 한결 나아졌다.
“나! 나도 초콜릿!”
“올리비에?”
설마 하며 고개를 돌리자 정말 올리비에였다.
어제 부모에게 크게 혼나지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뛰어오는 걸 보니 다행히 어디 맞진 않은 모양이다.
“안녕! 어, 이상한 옷 입은 누나다.”
“이상하지 않아. 멋진 거야.”
“멋진 거야.”
“……멋져?”
파브르와 아이들의 말에 올리비에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떻게 된 거야. 와도 된대?”
다가가서 물으니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응!”
“어떻게?”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 모르는 법. 어제 일로 마음을 달리 먹었나 싶어 물었다.
“몰라? 어떤 아저씨가 와서 얘기하더니 놀러 가도 된다고 했어. 아! 나도.”
어떻게 된 일인지에는 크게 관심 없는 것 같다.
그보다 친구들과 함께 놀고 간식도 먹을 수 있다는 게 중요하겠지.
나 역시 올리비에가 다치지 않고, 밝은 얼굴로 찾아주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다른 아이들도 와주면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붓을 들자 비다 라바니가 몇몇 아이와 함께 골목을 돌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