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46화
45. 뱅크스(5)
알렉스 우드가 다가가자 고훈이 그를 알아보곤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두 사람이 악수했다.
“알렉스 우드예요. 뉴튜브에서 미술 채널 운영하는데 혹시.”
“알아요. 영상 잘 보고 있어요.”
고훈이 영상을 시청한다고 말하자 알렉스가 눈을 크게 떴다.
“정말요? 그냥 예의상 하는 말 아니고요?”
“정말로요. 휘트니 비엔날레 때 저 소개해 주셨잖아요.”
“대박!”
알렉스가 카메라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여러분, 들었죠! 고훈 작가가 제 영상을 본대요. 나 이런 사람이야!”
└출세했네ㅋㅋㅋㅋ
└그지 꼴 하고 핫도그 먹방이나 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ㅠㅠ
└알렉스 언제 월드 클래스 됐냐
└자기 소개하는 영상이니 그냥 스쳐 봤겠짘ㅋㅋㅋ 구독한 것도 아니고 오버하지 좀 마ㅋㅋㅋ
└가슴이 웅장해진다.
└얼굴에 물감 묻은 거 봐 ㅋㅋㅋ 진짜 귀엽다ㅋㅋㅋ
“아, 혹시 구독도 해주셨나요?”
“아니요.”
고훈이 고개를 젓자 시청자들이 채팅창을 ‘hahaha’와 ‘lololol’로 도배했다.
시청자에게 조롱받는 데 익숙한 알렉스는 개의치 않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가능하시면 잠깐 인터뷰 괜찮을까요? 정말 잠깐이면 되는데.”
“죄송해요. 아이들이 기다려서요.”
고훈이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개미다!”
“어디?”
“개미 빨갛게 칠해주자.”
“안 돼!”
“왜?”
“어…… 갑자기 빨간색 되면 엄마가 못 알아볼 수도 있잖아.”
“그럼 안 되네.”
“응. 안 되네.”
고훈이 어깨를 으쓱이자, 아이들이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며 노는 모습을 함께 지켜본 알렉스 우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화제가 되었음에도 취재를 나온 사람이 많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언론 한 번 더 타는 것보다 아이들하고 함께하는 게 더 중요하단 거네.’
얼마나 유명한지.
얼마나 큰 화제를 모으는지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미술 경매 시장을 고려하면 고훈의 행동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미술을 즐기는 관점에서는 너무나도 바람직한 행동이었다.
‘이게 진짜 플렉스지.’
유명세와 다음 작품 가격을 우선해 생각할 수도 있을 텐데.
아이들과의 시간을 더 소중히 하는 고훈이 달리 보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방송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냥 돌아갈 거야?’
뉴욕에서 날아온 알렉스 우드는 어떻게든 현장을 중계할 방법을 찾다가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그럼 같이 그려도 돼요?”
고훈이 싱긋 웃었다.
“그럼요.”
알렉스가 기뻐하며 붓을 챙겼다.
“여러분, 들으셨죠? 제가 고훈 작가, 고수열 경과 함께 공동작업을 합니다. 어쩌면 내년 정도에 전시회를 열지도 몰라요.”
└갖다 붙이지 맠ㅋㅋㅋ
└진짜 허풍은ㅋㅋㅋ
└네가 전시회를 열면 저기 있는 애들은 다 거장될 듯
* * *
“얘들아, 봐봐. 형도 잘 그리지?”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여기 안 칠했는데?”
“못 그린다.”
“……못 그렸다고?”
“아저씨 우리나라 사람 아니에요?”
“응. 미국에서 왔어.”
“그래서 말을 못 하는구나.”
알렉스 우드가 아이들과 금방 친해졌다.
아이들만 있어서 그런지 어른들은 지켜볼 뿐이었는데, 그가 참여해 줘서 다행이다.
“어! 이상한 아저씨다!”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어제 어머니께 끌려갔던 올리비에가 서 있었다.
눈을 마주하자 해바라기가 없는 곳을 조심조심 디디며 다가왔다.
“형! 나 과자 먹어도 돼?”
“저기 있어. 엄마가 와도 된대?”
“아니.”
“그럼?”
의아해서 묻자 당당히 말한다.
“그냥 왔어.”
올리비에가 길 아래 있는 할아버지의 차를 향해 후다닥 내려갔다.
씩씩한 녀석이다.
“오빠, 나 이거 말고 다른 녹색.”
“어떤 녹색?”
“더 예쁜 거.”
더 예쁜 초록색이라.
어려운 부탁이다.
물감을 넣어둔 바구니를 뒤져서 몇 개를 꺼내놓자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살핀다.
충분히 고민할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해 해바라기를 그리려는데 반가운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훈아.”
비다 라바니가 한결 건강해진 모습으로 웃으며 다가왔다.
입원해 있으면서 충분히 쉬고 밥도 충분히 먹은 덕인지 피부도 좋아졌다.
누군가 라바니의 등에 찰싹 달라붙어 함께 오고 있다.
동생인가?
“벌써 퇴원했어?”
“응. 어제. 이제 하나도 안 아파.”
슬픔을 감추려는 미소처럼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다.
“왔구나.”
함께 온 아이가 누군가 싶었는데, 가까이 오니 알아볼 수 있었다.
그제 제대로 놀지도 못하고 가버렸던 아들리였다.
“너 만났다고 해서 데려왔어. 또 오고 싶은 것 같아서.”
아는 사이였던 모양.
“와줘서 고마워.”
아는 척을 하니 얼굴을 내민다. 반가운 마음에 씩 웃으니 다시 얼굴을 감춘다.
“어!”
과자를 가져온 올리비에가 아들리를 알아보곤 다가왔다.
“자.”
자기 과자를 나눠주는 모습이 기특하다.
“저기 가서 그림 그리자.”
“어…….”
“빨리이.”
올리비에가 아들리의 손을 잡고 아이들이 모인 곳으로 향했다. 당황한 것처럼 보이긴 해도 싫지는 않은지 저항하진 않는다.
비다 라바니는 조금 놀란 얼굴이다.
“자.”
“어?”
“왔으면 그림 그려야지.”
붓을 건네자 아들리와 같은 표정을 짓던 라바니가 밝게 웃었다.
“응.”
찾아온 사람 중에 한 기자가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고쳐서 완성하는 게 어떠냐고 물었는데, 굳이 그러고 싶진 않다.
이 거리화는 내 작품으로 삼고 싶지 않다.
나와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함께한 증거로 남으면 족하다. 아이들이 그린 해바라기를 내가 고쳐서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 덕분에 아주 개성적인 해바라기를 찾아볼 수 있다.
안쪽이 파란 해바라기도 있고 잎과 줄기 모두 노란색인 해바라기도 있다.
꽃이 있는데 나비나 벌이 없는 게 이상했던 모양인지 나비와 벌을 그려 넣은 아이도 있다.
‘생각보다 금방 할 것 같은데.’
주변을 둘러보니 이제 하루 이틀이면 대강 오르막길을 채울 것 같다.
젯소를 먼저 바른다고 했는데, 물감과 벽의 접착력을 높여야 한다는 걸 이해하지 못한 아이도 몇몇 있어서 얼마나 갈지 모르겠다.
“…….”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비다 라바니가 시야에 들어왔다.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뭐 해?”
“어? 아. ……좀 신기해서.”
기다리니 듣고 싶은 말을 풀어내기 시작한다.
“우리 동네 근처에 어른들이 이렇게 많은데 아무 일도 없어서.”
“…….”
“나도. 아들리도.”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조차 무서워한다면, 이상하게 느낀다면 대체 어떤 삶을 살았던 걸까.
“모든 사람이 나쁜 건 아니야.”
라바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나쁜 사람을 많이 만났으니까 앞으로는 좋은 사람을 더 많이 만날 거야.”
“……그럴까?”
“그럴 거야. 미셸도, 마르소 갤러리 직원들도 좋은 사람들이잖아.”
“맞아.”
비로소 웃는다.
“너도.”
라바니의 말에 괜히 쑥스러워져서 시선을 피하던 차.
한 남자가 고함쳤다.
“올리비에! 여기서 뭐 해!”
아이들이 깜짝 놀라서 움찔했고 주변을 구경하던 어른들도 시선을 옮겼다.
올리비에의 부친인 듯하다.
“아빠…….”
“엄마한테 여기 오지 말라고 분명히 들었을 텐데!”
“심심하단 말이야.”
“쓰읍.”
올리비에가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힘없이 붓을 내려놓고는 아들리에게 인사했다.
“가야 돼.”
“…….”
“내일.”
“올리비에!”
남자가 한 번 더 소리쳐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몹시 마음에 안 드는데, 거리에 함께 있던 사람들도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고 있다.
할아버지가 남자에게 다가갔다.
“껄껄. 안녕하십니까.”
“……뭐야.”
“여기에서 그림 그리는 사람인데, 아이가 좀 더 놀고 싶은 것 같더군요. 걱정되시면 같이 있어 주시는 게 어떨까요.”
남자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콧방귀를 뀌었다.
“비코에 마늘 냄새 풍기는 늙은이까지. 난리구만.”1)
“너 뭐라 했어.”
순간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인간 같지도 않은 머저리가 할아버지를 모욕했단 생각으로 가득 차서 다가가자 할아버지가 다가와 나를 말리셨다.
“훈아, 괜찮아.”
“저놈이 방금 할아버지한테.”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어 입을 닫자 할아버지가 등을 쓸었다.
“말이 안 통하는 사람하고 싸워봤자 얻는 건 없단다. 괜찮아.”
저놈이 평생 정신을 못 차릴 거라는 건 잘 안다.
“그래도 그냥 넘어갈 수 없어요. 사과받아야겠어요.”
“훈아.”
할아버지가 한 번 더 달래시는데, 남자가 다가와 위협한다.
“방금 뭐라고 했냐?”
“너라고 했는데 버러지라고 할 걸 그랬네?”
“이 새끼가.”
내가 어떻게 하기도 전에 할아버지가 남자의 손목을 붙잡았다.
“젊은 친구가 입이 험하군.”
“이, 이거 안 놔?”
“사과하게.”
“아아아악!”
“당장 사과해!”
“…….”
조금 전만 해도 말이 안 통하는 사람하고는 싸워봤자 얻을 게 없다고 하시던 분이 맞나 싶다.
당장에라도 남자의 손목을 으스러뜨릴 기세다.
“하, 할아버지.”
말리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 같아서 할아버지를 부르니 다른 손으로 다가가지 못하게 막아설 뿐이다.
“아으이익! 뭣들 하고 있어! 경찰에 신고해! 중국 놈이 사람을 치잖아!”
헛소리하는 거 보니 아직 덜 혼난 듯하다.
“아빠! 할아버지, 아빠 놔주세요! 놔주세요!”
올리비에가 달라붙어 애원하자 할아버지가 어쩔 수 없이 남자를 내팽개쳤다.
“아빠! 괜찮아?”
“아으으윽. 너! 이러고도 괜찮을 줄 알아? 어? 내가 누군지 알아!”
“제 새끼보다 못한 놈이고. 내 손자한테 손찌검하려던 놈인 건 알겠네만.”
“고소할 거야. 여기 있던 사람들이 다 봤어! 어!”
저 새끼가 아직도.
“여러분 보셨나요? 고수열 경께서 빌어먹을 인종차별주의자에게 한 방 먹이셨습니다! 고훈 작가나 아들에게 하는 짓을 봐선 아동학대범일지도 모르겠네요.”
카메라를 향해 말하던 알렉스 우드가 고개를 돌렸다.
“누가 먼저 폭력을 휘두르려고 한지 12,087명이 보고 있었는데. 거짓말하면 안 되죠.”
* * *
1)bicot.
일부 프랑스인이 북아프리카 옛 식민지나 아랍인들에게 쓰는 멸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