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245화 (200/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45화

45. 뱅크스(4)

-자세한 이야기는 파리 가서 하자.

방태호가 기쁜 소식을 전해주었다.

아직 이름을 정하지 못한 화가 공동체의 법인 운영을 맡아준단다.

“그럼 이한나 작가님이랑 예은이도 파리로 오는 거예요?”

-응. 우선 내가 자리 좀 잡고. 두 사람도 준비할 게 있으니까. 급하게 생각하진 않고 있어.

하기야 그럴 수밖에 없을 거다.

비자 같은 행정절차도 있고 어학원에 다닌다고 해도 기본적인 소통은 해야 할 테니 말이다.

방태호의 말대로 먼저 파리에서 자리를 잡고 차분히 준비해서 넘어오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그나저나 대단하더라.

“뭐가요?”

-달리다 광장에 그리고 있는 거. 난리 났던데?

“어제 사람들이 많이 모이긴 했어요. 기자들도 좀 다녀갔고.”

-좋은 방향으로 이슈가 됐으니까. 아이들하고 같이 그린 것도 좋았고.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어?

“할아버지랑 둘이서 하기엔 너무 넓으니까요. 기왕이면 다 같이 했으면 싶었죠.”

할아버지의 대화로.

차별과 혐오 그리고 두려움이 무지에서 피어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양극단에 있는 사람들은 제쳐두고.

프랑스인도 무슬림도 서로를 모르기에 무서워하고 꺼리지 않을까 싶다.

모든 프랑스인이 인종을 차별하는 것도 아니며, 증오범죄를 저지르는 건 더더욱 아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무슬림이 테러를 벌이는 것도 아니다.

할아버지와 같이 찾아봤는데.

2020년을 전후로 유럽의 많은 도시가 유럽 반(反)인종차별 도시 연맹에 가입하여 인종차별에 대한 방지대책을 마련, 시행 중이다.

무슬림도 마찬가지.

세계이슬람협력기구(OIC)는 알 카에다와 IS 같은 테러단체를 ‘궤멸해야 할 테러 조직’으로 규정했다.

많은 사람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형성하고 그것을 넘어서 실질적인 피해를 주는 극단주의자들을 배제하고 있다.

국가와 단체가 법으로 그들을 막아서고 있으니 참으로 다행이나, 법과 규정만으로는 분명 한계가 있다.

아무리 규제하고 서로 존중하며 지내야 한다고 말해도, 그것이 설령 옳은 말이라도 와닿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옳고 그른 것보다 친하냐, 싫어하냐를 우선해서 판단하기 때문에.

나 같은 예술가들이 나서서 양극단 사이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위로하고, 또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다리가 되어줘야 한다.

같은 것을 보고 느끼고.

같은 일을 함께 즐긴다면.

그래서 아주 조금이라도 친밀감이 생긴다면 거기서부터 시작이 아닐까.

-난 좋다고 봐. 그렇게 다가가면 대중도 미술을 언젠가는 좋아해 주겠지.

방태호가 희망찬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

어느새 대중에게서 멀어져 고립된 미술도 차근차근 접하는 시간이 많아지면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러게. 그럼 다음 주에 보자.

“네.”

통화를 마치고 1층으로 내려갔다.

“할아버지, 태호 아저씨가 회사 맡아준대요.”

할아버지가 차에 물감을 싣고 계셨다.

어제 사람이 갑자기 몰려들어 부족했으니 오늘은 넉넉하게 챙겨주신 듯하다.

“그거 잘됐구나.”

“다음 주에 만나서 얘기하기로 했어요.”

할아버지를 도와 물감을 옮기고는 차에 올랐다.

“가는 길에 마트 들려도 돼요?”

“과자 사게?”

“네.”

물감과 붓이 부족했던 만큼 나눠줄 과자도 부족해서 근처 마트에서 과자를 잔뜩 샀다.

그림 도구와 과자로 할아버지의 2028년식 포드 F-150가 가득 차버렸다.

“왔다!”

“형!”

장을 보느라 평소보다 조금 늦은 10시쯤 도착했는데 어제 만났던 아이들이 달려들어 깜짝 놀랐다.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오늘은 뭐 그려?”

“나, 나 오늘은 더 잘 그릴 수 있어.”

“오늘도 과자 줄 거야?”

과자를 기다렸든 그림을 그리고 싶었든 무관하게 이렇게 많은 아이가 아침부터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가슴이 벅차다.

“간식은 청소하고 먹자. 쓰레기부터 주울까?”

“응!”

* * *

쓰레기와 돌을 치우고 어른들이 물로 벽과 길을 닦아내는 동안 과자를 나눠 먹고 있는데 10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눈에 띄었다.

왠지 과자를 먹고 싶어 하는 눈치라 손짓해 불러도 오지 않는다.

수줍음을 많이 타는 아인가 싶다.

몇 개 챙겨줄 생각으로 다가가니 슬금슬금 뒷걸음질 친다.

“괜찮아.”

과자를 내밀고 웃어 보여도 주변 눈치를 보면서 선뜻 다가오지 못한다.

“가지고 가도 괜찮아.”

한 번 더 권하니 그제야 조심스레 다가온다.

“혼자 왔어?”

과자를 쥐여주며 묻자 고개를 끄덕인다.

“괜찮으면 나 좀 도와줄래? 꽃 그리는 건데.”

아이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겨우 챙긴 과자를 돌려주려고 했다.

“저는 그림 못 그려서…….”

부담 갖지 않길 바라서 도와달라고 말했던 건데, 과자를 주는 대신 일을 해달라고 받아들인 모양이다.

과자를 뜯어서 다시 넘겨주었다.

“못 그려도 괜찮아. 처음 그리는 친구도 많아.”

한번 보라는 뜻으로 아이들이 모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가 눈을 마주했다.

몇 번 더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일 뿐 다른 말이 없다. 환경 탓인지 원래 성격이 그런지 잔뜩 위축된 모습이 안쓰럽다.

그래도 싫진 않은 듯해 웃으니 과자를 입에 넣고는 눈을 크게 뜬다.

“맛있지?”

이렇게 웃을 수 있는 아인데.

“이름이 뭐야?”

“아들리…….”

“난 고훈. 가자.”

아들리를 그림 도구를 모아둔 곳으로 데리고 가자 다른 아이들이 다가왔다.

“이제 그림 그려?”

“응. 붓 하나씩 챙기자.”

“난 이거!”

“아, 그거 내가 하고 싶었는데.”

“넌 이름이 뭐야?”

붓을 챙기는 아이.

새로 찾아온 아들리에게 관심을 보이는 아이.

여전히 과자에 몰두한 아이 제각각이지만 다들 즐거워 보인다.

“따라 그려도 되고. 그리고 싶은 대로 그려도 돼.”

“난 비행기 그리고 싶은데!”

“좋아. 멋있게 그려봐.”

머릿수가 늘어나니 정신이 하나도 없다. 아이들에게 인기가 좋은 할아버지도 아이고 아이고 하시면서 고생 중이시다.

“해바라기 그리는 건 이제 안 가르쳐 줘?”

“이제 할 거야. 자, 다들 붓에 물감 묻히고. 동그랗게 칠하면 돼. 아들리도 해봐.”

“나 이거 안다? 동그라미 그리고 작은 붓으로 이렇게 하면 돼.”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아니야. 이렇게 하는 거야. 저 형이 그랬어.”

“훈이 형 해바라기는 그거보다 훨씬 예쁜데?”

“그건 그래.”

티격태격하면서도 옹기종기 모여 앉아 해바라기를 그리는 아이들을 보니 마음이 따뜻해진다.

개성을 찾아 비행기를 그리려던 아이는 도중에 망쳤는지 금방 흥미를 잃고 친구들과 함께 해바라기를 그린다.

아들리도 금방 친구를 사귄 모양이다.

“아들리? 난 올리비에.”

“올리비에.”

“응. 이거 써. 이 붓이 더 좋아.”

“……왜?”

“더 크잖아.”

“올리비에!”

갑자기 큰 소리가 나서 깜짝 놀랐다.

다른 아이들도 놀라서 미어캣처럼 고개를 들었는데, 올리비에의 모친으로 보이는 여성이 부리나케 다가왔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빨리 와.”

공부한다고 하고 도망쳐 나오기라도 한 듯 아들을 잡아가려 한다.

“나 그림 그릴래.”

여성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아들을 한 번 더 이끌고는 속삭였다.

“저런 애랑 같이 놀면 안 돼.”

가까이 있던 터라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들어버렸는데, 아들리도 들었는지 겨우 밝아졌던 얼굴이 어두워졌다.

“왜?”

“무슬림이잖니.”

“그게 뭔데?”

“얘가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빨리 와.”

엄마에게 끌려간 올리비에가 붓을 떨어뜨렸다.

씁쓸한 마음으로 붓을 줍자 아이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쟤 무슬림이야?”

“몰라.”

“무슬림이 뭐야?”

“아, 물감 더 줘.”

“잘 그렸지!”

아이들은 금세 아들리가 무슬림인 건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자기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어른보다 아이가 훨씬 낫다.

잘못하지도 않았는데 도망치려는 듯 붓을 내려둔 아들리에게 다가갔다.

“가고 싶으면 가도 괜찮아.”

“…….”

“근데 네 잘못이 아니라는 건 알아줬으면 좋겠어. 과자 먹고 싶거나 그림 그리고 싶으면 내일도 와 줘.”

“…….”

“언제든지 환영할게.”

아들리는 대답하지 않고 길을 따라 내려갔다.

* * *

뉴튜버 알렉스 우드가 새로운 방송 콘텐츠를 찾아 파리를 찾았다.

고수열과 고훈이 시민들과 함께 예술가의 거리를 단장해 나간다는 소식에 가만있을 수 없었다.

“자, 여러분. 오늘은 파리에 왔습니다. 지금 달리다 광장으로 가는 길인데 왜 왔냐! 고수열과 고훈이 길거리 그림을 그린다고 합니다. 그것도 아이들하고 같이요. 어제 르 몽드에서 낸 기사를 보면 수십 명이나 같이한대요.”

알렉스가 채팅창을 읽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돈도 안 되는 일을 왜 굳이 사비까지 들여서 하는지 다들 궁금해하시는 거 같은데. 솔직히 여러분이 고수열과 고훈 재산을 걱정하실 정도는 아니고요. 악!”

알렉스가 말실수한 척하며 입을 가리자 채팅창에 물음표가 마구 올라왔다.

└?

└선 넘네.

└ㅋㅋㅋㅋㅋ 맞는 말이지. 고수열 못 해도 억만장자일 텐데 누가 누구 걱정을 해ㅋㅋㅋㅋ

└고훈도 이번에 장난 아니던데. 기암성 아트북 80만 부 넘길 기세임.

“나는 돈을 떠나서 이런 거 되게 좋게 보거든요. 미술이 일상에 녹아드는 거니까. 이런 식으로 친근하게 되면 나중에 미술관 찾아줄지 누가 알아?”

알렉스 우드는 데미안 카터 사건으로 인해 미술계가 크게 휘청였던 일을 떠올리며 고훈과 고수열의 행동을 높이 평가했다.

탈세와 불법 자금세탁 등으로 먹칠 된 미술 시장이 회복하기 위해서는 고훈, 고수열처럼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 저긴가 보네. 어제보다 사람이 많으면 좋겠는데 한번 가볼게요.”

알렉스 우드가 발을 재촉해 달리다 광장에 들어섰다.

“와.”

벽돌로 만든 오르막길을 따라 피어난 수백 송이의 해바라기가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아주 정교하게 그려진 해바라기도 있었고, 아이 손바닥만 한 해바라기도 있었고 어른 키만큼이나 큰 대형 해바라기도 있었다.

제각각 다른 해바라기가 길과 벽을 가득 채웠고 각자 자기 위치에서 붓을 놀리는 아이들까지.

장관이 따로 없었다.

알렉스 우드와 그 시청자들을 다른 세상에 들어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미쳤닼ㅋㅋㅋㅋㅋ

└졸귀다 진짜. 애기들 꽃밭에 달라붙은 것 같지 않아?

└오르막길이라서 한눈에 다 보이니까 더 그런 듯ㅋㅋㅋ

└꿀벌 옷 입혀주고 싶네.

└근데 생각보다 사람이 많진 않네?

└그러게? 언론에 보도된 것보단 적어 보이는데.

“보셨어요? 진짜 말이 안 나온다. 난 뭐 동화책에 들어온 줄 알았어.”

잔뜩 과장하여 현장을 전달하던 알렉스 우드가 고훈과 고수열을 발견했다.

“아, 저기 계시네요. 인터뷰를 응해주실지 모르겠는데. 일단 한번 가볼게요. 안녕하세요! 작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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