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44화
45. 뱅크스(3)
다음 날.
“할아버지, 아침이에요.”
햇살을 느끼자마자 곧장 일어나 할아버지를 깨웠다. 피곤하신지 일어나지 못하셔서 몸을 흔드니 날 잡아다가 끌어안으셨다.
숨 막힌다.
아무리 밀어내도 벤치프레스로 120㎏이나 드는 할아버지를 힘으로 이겨낼 순 없었다.
다행히 아래로 빠져나오려고 하니 힘을 풀어주셨다.
“몇 시니…….”
“6시요.”
“허어으음. ……조금만 더 자자.”
할아버지가 다시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피곤하신 듯하니 아침을 준비할 때까지는 주무시도록 해드려야겠다.
아래층으로 내려와 프라이팬을 꺼내 기름을 두르고 달걀 세 알을 까 넣었다.
맛소금을 치고 불을 올렸다.
한국 집에서는 가스 밸브가 너무 높이 있어 불편했지만 여기는 인덕션을 놓아 편하다.
“음.”
할아버지는 국물이 없으면 밥을 못 드시니 국도 하나 끓여야겠다.
작은 냄비에 미소된장을 덜어내 넣고 쪽파랑 두부를 잘라서 넣었다.
토스트기에 빵을 넣고 누텔라 잼과 딸기 잼도 꺼내고 채소를 씻어 어제 할아버지가 만들어두신 드레싱을 얹으니 할아버지가 내려오셨다.
“으잉?”
“일어나셨어요?”
눈을 깜빡이신다.
“네가 했어? 프라이도?”
“네.”
“드세요.”
할아버지가 얼떨떨해하며 미소된장국을 확인하시더니 웃으셨다.
“살다 살다 손자가 차려준 밥도 먹는구나.”
“자주 해드릴게요.”
“흐흫. 녀석.”
할아버지와 아침을 간단히 먹고 나머지 짐을 챙겼다.
붓을 있는 대로 챙기니 할아버지가 의아해하신다.
“그렇게나 많이 가져가려고?”
“네.”
“아크릴 물감이라도 잘만 다루면 괜찮아. 오늘 안에 다 그릴 것도 아니잖느냐.”
“어쩌면 그럴 수도 있죠.”
“껄껄. 벽화 그리는 게 보통 일이 아니야. 할아버지가 도와줘도 오늘 안에는 무리지. 며칠은 걸릴 거다.”
“도와주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서요.”
“누가 더 와?”
“아니요.”
약속하진 않았지만 혹시 모르는 법.
붓과 과자를 넉넉히 챙겼다.
할아버지 차에 그림 도구를 잔뜩 실어 달리다 광장으로 향했다. 관광지라 그런지 사람들이 제법 다닌다.
분홍집으로 향하는 오르막길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이거 보통 일이 아니겠구나.”
할아버지가 오르막길을 올려다보시고는 허탈하게 웃으셨다.
아무래도 할아버지와 둘이서 하기엔 힘에 부칠 것 같다.
“하나씩 그리다 보면 언젠가는 다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
할아버지가 어깨를 풀며 믿음직스럽게 말씀하셨다. 벽화 준비도 그렇고 할아버지 덕을 참 많이 본다.
우선 물감이 잘 올려지도록 벽면과 거리에 달라붙은 이물질을 제거해야 한다.
챙겨온 걸레와 물티슈로 길을 닦아냈다. 어찌나 더러운지 가져온 걸레를 다시 못 쓸 것 같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내일은 아예 물을 가져올 방법을 찾아야겠구나.”
“그럴 수도 있어요?”
“따로 허가를 받아야겠지만 수도만 연결하면 되니까. 이렇게 허리 숙이고 닦아서는 그리기도 전에 지치겠어.”
할아버지 말씀이 맞다.
고압의 물로 벽과 길을 씻어낼 수 있다면 걸레로 닦는 것보다 훨씬 수월할 거다.
다만 지금처럼 아래서부터 그려서는 물감도 고압수에 씻길 거다.
“그럼 위에서부터 그릴까요?”
“그래야지.”
처음 하는 일이다 보니 시행착오가 많다.
풀어놓은 짐을 부랴부랴 다시 싸서 오르막길을 올랐다.
“고수열 아닌가?”
“고훈이네.”
길을 닦고 있다 보니 지나가던 사람들이 알아본다.
“안녕하세요.”
“뭐 하시는 거예요? 봉사활동?”
“그림 그리려고요.”
“여기예요?”
“네.”
예술가의 거리답게 예술품이 많이 전시되어 있는 탓에 이상하게 보이진 않는 모양이다.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드는데 다행히 작업에 방해가 되지 않게 거리를 지켜준다.
“훈아, 여기서부터 그리면 돼?”
“시안대로 안 하셔도 돼요. 어차피 그대로 안 될 것 같거든요.”
“흠. 그래.”
길에서 하는 작품은 변수가 많으니 본래 정해둔 시안대로 그릴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마음 가는 대로 쭉쭉 그려볼 생각이다.
* * *
고훈이 달리다 광장에 그림을 그리는 장면이 SNS에서 화제가 되었다.
관광지로 유명한 장소였던 만큼 유동 인구가 상당했고, 그들 중 고훈과 고수열을 알아본 사람들이 찍어 올린 사진 덕분이었다.
└귀여웤ㅋㅋㅋ
└할아버지랑 그림 그려서 신났나 봐 ㅋㅋㅋㅋ 어쩜 저렇게 해맑게 웃냐ㅋㅋㅋ
└하 심장에 안 좋다
└사진이 계속 올라오니까 해바라기가 자꾸 늘어나네 ㅋㅋㅋㅋ
└시간대가 달라서 그런가 봄
└도시 외관에 신경 써서 재개발도 못 하게 하는 파리 시청이 웬일로 저걸 허가해 줬대?
└고훈이라서 그런 거 아닐까?
└몽마르트르가 원래 예술가 거리라고 이것저것 많아서 그런 거 아닌가 싶음.
└고훈하고 고수열이 그림 그려준다면 저기 집주인들하고 상인들이 좋아하면 좋아하지, 싫어하진 않을 듯ㅋㅋㅋ
└이거지 ㅋㅋ 저걸로 화제 생기면 가서 뭐라도 먹을 거 아니야.
└맞아 ㅋㅋ 지금도 이 난린데.
└장사하는 사람들이야 그렇다 쳐도 집주인들 시끄러울 것 같은데.
└어차피 관광지였음.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네. 고수열이랑 훈이가 벽에 그림 그렸는데, 그 집 가격이 어떻게 되겠어?
└└ㅇ0ㅇ┐
할아버지와 손자가 벽돌 위에 피워낸 해바라기는 큰 호응을 얻었다.
오래된 건물로 다소 삭막해 보였던 거리가 밝은 분위기로 단장해 나가니 거주민들도 두 화가의 행동을 반겼다.
작업 3일 차에 접어들었을 때는 몇몇이 나서서 고훈과 고수열이 작업하기 수월하도록 벽면과 길을 닦아주기도 했다.
“감사합니다.”
고훈이 도와주는 이들에게 인사했다.
“하하. 이 정도는 얼마든지 괜찮다고. 저기도 닦을까?”
“오늘 거기까지는 못 그릴 것 같아요.”
주민이 가져다 준 시원한 차를 마신 고수열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청소에 애먹고 있던 차.
고압수를 활용하고, 주민들도 나서서 도와주니 예상보다 작업 진척이 빨랐다.
“이대로 하면 일주일 안에 어떻게 되겠구나.”
“그럴 것 같아요.”
고훈이 할아버지에게서 시원한 차를 받아들고 고개를 젖혔다.
차를 마시던 중에 두 아이가 그림 도구에 다가가는 모습을 발견했다. 아이들은 여러 종류의 붓에 관심이 있는지 저들끼리 속닥이며 신기해했다.
“얘, 안 돼.”
부모가 나서서 아이들을 말리자 고훈이 차를 내려놓고 다가갔다.
“괜찮아요.”
“형, 이 붓은 왜 이렇게 커?”
한 아이가 고훈에게 물었다.
“그릴 면적이 넓으니까. 작은 걸로 그리면 힘들잖아.”
“면적?”
면적이란 단어를 모르는 아이가 단어 뜻을 되묻자 고훈이 두 팔을 벌려 오르막길을 가리켰다.
“그럼 이건 왜 작아?”
또 다른 아이가 물었다.
“섬세한 작업도 해야 하니까.”
“섬세?”
“큰 붓으로 작은 거 그리기 힘들잖아.”
“아.”
궁금함을 해결한 아이들이 붓을 만지며 구경하자 부모가 당황했다.
“미안해요. 얘들이 호기심이 많아서.”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미술 학원 다닌 지 얼마 안 됐는데 그래서 더 그런 것 같아요.”
부모의 말에 고훈이 반가워했다.
아이들과 같이 쪼그려 앉아 눈높이를 맞추고 물었다.
“그림 좋아해?”
“응. 나 자동차 잘 그려.”
“나도.”
“해바라기는?”
아이들이 고개를 저었다.
“해바라기 그리는 법 가르쳐줄까?”
아이들이 고훈과 고수열이 길에 그린 해바라기를 올려다보았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노란색으로 싱그럽게 피어난 꽃들이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응.”
“그럼 붓 하나씩 들어 봐. 마음에 드는 걸로.”
고훈이 아이들에게 노란색 아크릴 물감을 가져다주고는 길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이렇게 동그라미 그려봐.”
“여기에?”
고훈이 어깨를 으쓱였다.
“하고 싶은 곳에.”
“어머. 잠깐만. 얘들아, 여기에 그리면 안 돼.”
부모가 깜짝 놀라 말렸다.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쳐 준다고 해서 기뻐했지만, 세계적인 화가의 작품을 망칠까 두려웠다.
“정말 괜찮아요. 아주머니도 그려보실래요?”
“제가요?”
“네. 같이 그려요.”
고훈이 부모에게도 붓을 들려주었다.
그녀는 주변의 눈치를 보다가 아이들이 재촉하자 그제야 어쩔 수 없이 원을 그렸다.
“잎은 작은 붓으로. 붓을 옆으로 해서 처음에는 꾹 눌렀다가 조금씩 힘을 빼면 돼.”
고훈이 원 테두리에 붓을 대고 힘을 주었다가 바깥으로 빼내며 붓을 들어 올렸다.
자연스레 잎이 굵었다가 가늘어졌다.
“우와.”
“쉽지?”
“응.”
“이렇게 둘러서 그리면 돼.”
“나는 더 큰 붓으로 그리고 싶은데.”
“그래도 돼.”
“이, 이렇게 하는 건가?”
“잘하고 계세요.”
주민에게 그림 그리는 법을 가르쳐 주는 손자를 바라보던 고수열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첫날, 붓이 그리 많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확인했음에도 왜 매번 쓰지도 않을 붓을 많이 챙겼는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저럴 생각이었구나.’
수십 미터에 달하는 거리를 해바라기로 가득 채우는데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 하여 의아했거늘.
저런 식으로 함께 그린다면 금방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화가 고훈의 작품을 만드는 게 아니라.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작은 행복을 주기 위한 행위이니, 작가만이 작업할 이유는 없었다.
도리어 함께 그리며 더욱 행복할 수 있었다.
“나 다 그렸어!”
“나도!”
“잘했네. 이제 이걸로 콕콕 찍으면 돼.”
고훈이 아이들에게 고동색 물감을 주며 해바라기 가운데를 가리켰다.
“해바라기씨?”
“맞아.”
고훈과 함께 해바라기를 피워내는 아이들의 모습에, 구경하던 다른 아이들이 부모의 옷자락을 당겼다.
* * *
늦은 시간, 앙리 마르소는 셰바송 씨몽 SNBA 협회장과 긴 통화를 나누고 있었다.
-잘 알겠네. 다행히 요리스 의원이 관심이 있더군.
“국회에 앉아 있으면서 이런 것 하나 안 만들어 놓고 뭐 했어.”
-표에 움직이는 사람들이잖나. 얼마 되지도 않는 사람들을 신경이나 쓰겠나.
“흥.”
-아무튼 이건 시일이 좀 걸릴 거야. 새 법안이니 확인할 것도 많고.
“알고 있어.”
앙리 마르소가 통화를 마쳤다.
성인을 대상으로 한 앵테르미탕 제도는 큰 관점에서 고용보험이나 마찬가지였다.
예술가로 인정받지 못한 사람이나 가난한 가정의 아이는 수혜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미셸 플라티니와 고훈을 통해 프랑스 국적을 가졌음에도 가난과 인종차별 때문에 공부를 할 수 없는 경우가 있음을 확인한 앙리 마르소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새로운 사회적 울타리가 필요하다고 판단.
국회의원들에게 관련 법안을 조속히 마련해 줄 것을 피력하고 있었다.
‘벌써 이렇게 되었나.’
자정이 다 되었음을 확인한 앙리 마르소가 콧잔등을 매만지며 피로를 호소했다.
당장 씻고 침대에 눕고 싶었지만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렇게 몇 분이 흐르고 마침내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그의 비서 아르센이 방으로 들어섰다.
“오늘도 특별히 문제 될 일은 없었습니다. 주민들이 많이 몰려들어 도리어 다가가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다만.”
눈을 감은 채 아르센의 보고를 듣던 앙리 마르소가 슬며시 눈을 떴다.
“다만?”
“구경하던 아이들하고 같이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스무 명이나 함께했습니다.”
치안이 좋지 않은 몽마르트르구에서 아시아 사람들은 항상 범죄의 대상이 되었다.
고수열이 함께하곤 있지만 걱정을 떨쳐낼 수 없어 경호를 붙여 놓았더니 다행히 큰 문제는 없는 듯했다.
앙리 마르소가 코웃음 쳤다.
“아무 일 없었으면 됐어.”
“네.”
“내일부터는 다른 사람 보내. 며칠 쉬고.”
아르센이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