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43화
45. 뱅크스(2)
“그래. 잘하고. 다시 연락할게.”
-네.
통화를 마친 방태호가 생각을 정리했다.
고훈이 말한 대로 파리에서의 생활도 이점이 분명했다.
매번 서울과 파리를 오가느라 소모되는 비용을 고려하면 파리에서 지내는 게 나아 보였다.
만만치 않은 항공료와 체류비도 문제였고 편도 11시간 이상 소요되다 보니 묶인 시간도 아까웠다.
무엇보다 잦은 이동에 밤낮이 매번 바뀌니 체력적으로도 버거웠다.
“여보.”
방태호가 마감 후 탈진한 아내를 찾아 거실로 향했다.
소파에 누운 채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자 노력하던 이한나 작가가 눈을 감은 채 답했다.
“응.”
“주스 좀 가져다줄까?”
“응.”
방태호가 오렌지 주스를 따라 아내에게 건넸다.
상큼한 귤 냄새와 함께 당분을 섭취한 이한나가 무릎을 쭉 펴고 소파에 등을 파묻었다.
“단것부터 먹이는 거 보니까 심각한 얘긴가 보네.”
이한나가 고개를 틀어 남편을 노려보다가 웃었다. 그의 표정이 사뭇 진지한 탓이었다.
“뭔데.”
“훈이가 화가 단체 만든다고 하더라고.”
“소모임 같은 게 아닌가 보네?”
“응. 작가 기반의 법인회사를 생각하는 것 같아. 같이 일하고 수익 나누는. 지금 선플러워 같은 느낌으로.”
“실직자 되겠네?”
“그런가?”
이한나가 피식 웃고는 주스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그나저나 훈이 대단하네. 계속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앙리 마르소랑 한대?”
“지금 당장은.”
이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새 작가 찾아봐야겠네?”
고훈이 법인을 따로 세운다면 남편과 한 계약이 연장될 리 없었다.
최근 고훈이 큰돈을 벌면서 덩달아 많은 수익을 올렸던 방태호의 선플라워에 위기가 찾아온 것이었다.
“그건 아닌데.”
“음?”
“그 회사를 맡아줄 수 있냐고 묻더라고.”
“…….”
“여보?”
아내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바라만 보자 방태호가 걱정스레 불렀다.
“아, 미안.”
“놀랐지.”
“주스를 뿜어야 하나, 흘려야 하나. 왜 사레가 안 들렸을까 생각하는 중이었어. 클리셰 같은 장면인데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방태호가 피식 웃었다.
“흠.”
이한나는 주스를 입에 머금고는 생각을 정리했다.
회사의 규모나 확장성, 미래를 따지면 고훈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쪽이 나았다.
고훈과의 3년 계약에서 남은 시간은 1년.
고훈이 스스로 법인회사를 차리고 싶다면 계약을 연장할 수 없었다.
그럴 바에는 기회가 왔을 때 고훈과 앙리 마르소를 동시에 사로잡아야 했다.
이한나는 남편이 무엇을 고민하는지 금방 파악했다.
“회사가 문제가 아니라 파리로 가는 게 고민이네.”
“맞아.”
“얘기해 봐. 나한테 말하기 전에 생각 많이 했을 거 아니야.”
이한나가 잔을 내려놓았다.
“작가가 모이면 회사 규모도 커질 테고 할 수 있는 일도 많아질 거야. 다른 업체에서도 관심을 가질 테니 접하는 정보도 다양해질 테고.”
“그렇겠네.”
“또 항공료나 체류 비용도 아낄 수 있고. 오가는 시간에 쉬거나 다른 일을 할 수도 있을 거야.”
“응.”
이한나는 호응만 해줄 뿐 방태호의 말을 끊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개선되는 일이고. 뉴욕이랑 파리에서 일하면서 느꼈어. 시장이 정말 크고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다르다는 걸.”
“다르겠지.”
“응. 개벽도 마찬가지고. 조만간 큰 변화가 생길 것 같거든. 훈이랑 마르소를 중심으로.”
“흠.”
“그걸 보고만 있고 싶진 않아. 단순히 좋은 전시회만 여는 게 아니라 하나의 흐름을 만들고 싶어. 언젠가는 미술사에 기록될 만한 일을.”
“어떻게?”
“두 사람의 작품이 어떤 경향을 보이는지 동인지를 내서 발표한다거나 또 그에 감응한 작가들을 섭외한다든가. 언론에도 적극적으로 알리고 훈이랑 마르소만의 전시회를 여는 것도 생각하고 있어.”
이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훈이가 갤러리를 짓게 되면 선택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앞당겨 졌네.”
방태호는 꿈을 꾸고 있었다.
고훈을 더 큰 무대에 올리고 싶고, 본인도 주류 미술 시장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지고 싶었다.
어려움은 있겠지만 지금도 부단히 공부하고 있기에, 더 나은 전시회를 기획해 보고 싶었고 <기암성>과 같이 다른 업무에도 도전하고 싶었다.
고훈과 함께라면 충분히 가능할 듯싶었다.
“좋잖아. 왜 망설여?”
이한나가 물었다.
방태호는 사랑하는 아내와 눈을 마주하고 말했다.
“당신도 예은이도 내 꿈이니까.”
아내와 딸과 함께 화목하게 살고 싶었기에 두 사람의 생각을 듣고 싶었다.
질문만 던질 뿐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한나가 남편의 뺨을 가볍게 잡았다.
“일단 합격.”
자신과 딸을 걱정한답시고 망설였다면 크게 실망했을 터였다.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과 아이 때문에 꿈을 좇지 못한다고 생각했다면, 장애물처럼 느꼈다면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다행히 남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난 불어 못 해. 예은이도 마찬가지고.”
“응.”
“예은이한테도 물어보겠지만 싫어할 수도 있어. 이제 막 친해진 친구도 있으니까. 다른 나라 가는 게 무서울 수도 있고.”
“그렇겠지.”
“당신도 나랑 예은이가 힘들어하는 거 싫지?”
“그럼. 나 때문이라면 더.”
답은 하나뿐이었다.
“가.”
“어?”
“혼자 가라고.”
이한나가 내린 결론에 방태호가 당황했다.
“아니야. 그건 아니야. 어떻게 그래. 어디든 같이 살아야지.”
“뭐 어때. 서울에도 집 있고 파리에도 집 있고. 집 하나 더 늘면 좋은 거지.”
“어?”
“집은 어떻게 하게?”
“……이번에 번 돈으로 아파트 정도는 구할 것 같은데.”
“그렇게 많이 벌었어?”
“9억?”
“히.”
이한나가 눈을 크게 떴다.
“우리 남편 능력 있었네.”
“훈이 덕이지.”
“당신은 뭐 놀고만 있었어? 그럼 그 돈 훈이한테 돌려줘야지.”
“하하.”
부부가 가볍게 농담을 나누었다.
“아무튼 잘됐네. 이번 작품 끝내면 휴가 갈 곳 생겨서 좋다. 난.”
“여보…….”
이한나가 기지개를 켰다.
“나는 내 일이 있고 예은이는 예은이대로 자기 커뮤니티가 있어. 당신도 당신 세계가 있고.”
“…….”
“우리가 이혼하는 것도 아니고 예은이 입양 보내는 것도 아니잖아. 각자 위치에서 하고 싶은 일 하는 게 뭐 어때서. 가족이면 구속할 게 아니라 응원해 줘야지.”
방태호가 눈을 감았다.
파리로 가자고 차마 말할 수 없었던 이유였다.
본인의 욕심으로 아내와 딸에게 지금까지의 세계를 버리고, 새롭고 낯선 환경을 강요할 수 없었다.
“예은이가 어렸으면 나도 반대했을 거야.”
이한나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지금은 학교 친구들하고 노느라 나랑도 잘 안 놀아. 또 나랑 당신이 무슨 일 하는지도 잘 알고.”
방태호는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그저 아내를 바라볼 뿐이었다.
“대책 없이 간다는 것도 아니고. 꿈도 목표도 계획도 그럴만한 능력도 있는데 내가 당신을 어떻게 말려. 당신도 유명한 작가들 상대로 좋은 자리 권유받은 건데 뭘 더 걱정하고.”
“여보.”
“만약.”
“다녀왔습니다!”
이한나가 조건을 달려던 차, 때마침 딸 방예은이 학교에서 돌아왔다.
“딸~ 손 씻고 이리 좀 와볼래?”
“응.”
방예은이 손을 씻고 나와 엄마 아빠를 보았다.
분위기가 평소와 다른 것을 눈치채고는 엄마에게 달라붙었다.
“왜?”
방태호가 나섰다.
“아빠가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예은이는 어떻게 생각하나 궁금해서.”
“무슨 일?”
“아빠가 무슨 일 하는지 알지?”
“응.”
“그걸 좀 더 넓은 곳에서 하려는 거야. 파리 알지? 프랑스.”
“또 가?”
또라는 말이 가슴 아팠다.
“당장 가는 건 아닌데 좀 오래 걸릴 것 같아. 거기서 사는 거야.”
방예은의 입꼬리가 잔뜩 내려갔다.
“아빠는 예은이랑 같이 살고 싶은데. 예은이는 어때?”
“나도.”
방예은이 엄마 손을 꼭 잡고 대답했다.
“아빠랑 같이 파리 가서 살면 친구들하고도 헤어져야 하고. 프랑스말도 배워야 해.”
방태호는 초등학교 2학년에 다니는 딸이 타국에서의 생활을 어찌 받아들일지 몰랐다.
다른 언어와 문화를 배워야 하는 막막함과 인종차별 문제로 딸이 상처받진 않을까 걱정되었다.
그런 생각이 계속될수록 자신이 욕심을 부리고 있단 생각에 사로잡혔다.
큐레이터와 매니저로서는 경력이 찬 베테랑이었으나 부모로서는 처음이기에 이 문제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딸에게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여기서 살면 안 돼?”
“그래도 돼.”
“그럼 왜 가?”
“아빠 전시회 봤지?”
방예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크고 더 멋있게 해보고 싶어서. 작품도 찾아오는 사람도 많아.”
아빠가 최대한 쉽게 풀어 설명해 준 덕에 어떤 상황인지 대강 이해했지만 어찌 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냥 예은이 생각이 궁금한 거야. 답 같은 건 없어.”
이한나가 딸을 끌어안았다.
엄마의 손길에 용기를 얻은 방예은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빠가 하고 싶은 거 했으면 좋겠어. 근데.”
“근데?”
“……엄마는 게임 못 하는데.”
아빠가 떠나면 같이 레이싱게임을 못 했다. 방태호가 집을 비울 때마다 방예은은 홀로 게임을 하며 외로움을 느꼈다.
“그럼 아빠랑 같이 있을래?”
이한나가 물었다.
“아빠는 산책하는 법 모르잖아.”
이한나가 피식 웃었다.
딸이 말한 대로 방태호는 여유롭게 산책하는 법을 몰랐다.
어디에 어떤 꽃이 피었고 햇볕은 얼마나 따뜻한지, 바람의 기분은 어떤지, 거리의 사람들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개미는 어디로 향하는지 살필 줄 몰랐다.
“그럼 엄마랑 아빠 둘 다 있어야겠네?”
“응.”
방예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래?”
“어쩔래?”
이한나가 묻자 방예은이 덩달아 물었다.
사랑하는 두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예은아, 아빠랑 같이 가줄래? 아빠랑 주말에 같이 게임도 하고 엄마랑 산책도 하고. 예은이 가지고 싶은 건 뭐든 사 줄게.”
“자동차도?”
“자동차?”
방예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게임기가 아니라 진짜 자동차?”
“꿈이래. 루이스 해밀턴 같은 드라이버.”
이한나의 말에 방태호가 놀랐다.
어렸을 적부터 레이싱게임을 좋아하고 얼마 전부터 어린이 카트에 취미를 붙이긴 했지만 설마 포뮬러 1을 꿈꾸고 있는 줄은 몰랐다.
방태호는 레이싱 휠을 능숙하게 다루던 모습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면허 따면 사 줄게.”
“정말?”
“포뮬러 1 자동차는 무리지만.”
이한나가 씩 하고 웃었다.
“공부 엄청 많이 해야 하는데 괜찮겠어? 프랑스어로 공부해야 해. 드라이버 되고 싶으면 레이싱 스쿨도 다녀야 하고.”
“할 거야.”
꿈이 정말로 포뮬러 1 드라이버라면 해외가 교육 환경이 나았다.
딸이 그 가혹한 훈련과 경쟁 시스템을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 지원해 주고 싶었다.
부녀 사이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한나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네. 다음 작품은 파리 배경으로 써볼까.”
* * *
달리다 광장에 해바라기를 피우려고 이것저것 준비하는데, 벽화는 그려본 적 없어서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았다.
“유화 물감은 안 돼요?”
할아버지가 써본 적 없는 아크릴 물감을 챙기셔서 물었다.
“아크릴로 그리는 게 더 오래 가지.”
“변색이 안 돼요?”
“다른 것보단 나아. 그러고 보니 바니시도 챙겨야겠구나.”
영구적일 순 없으니 그나마 가장 보존이 잘 되는 물감을 챙겨주시는 듯하다.
“어디 보자……. 제소는 챙겼고.”
물티슈와 걸레도 함께 챙기셨는데 아마 더러운 벽면과 길을 닦아내기 위함일 거다.
“기름은 안 가져가도 돼요?”
“아크릴은 물로 그려. 농도 조절만 잘하면 유화처럼 다룰 수 있을 거야.”
“물로 하면 빨리 마르겠네요.”
“그렇지. 잘 생각해야 해. 유화 그릴 때처럼 물감을 짜놓고 쓰면 못 쓰게 돼. 붓도 망가지고.”
한 번에 쭉쭉 그려야겠다.
큰 붓을 챙기는데 페인트통이 눈에 들어왔다.
“페인트로 그리는 건 어때요?”
아크릴 물감보다 저렴하고 건물 외벽에 많이 사용하니까 이쪽이 더 좋을 것 같은 느낌이다.
“유성 페인트를 많이 쓰지. 근데 처음 다루면 좀 어려울 거다. 힘도 많이 들고.”
내 경험과 조건에 맞춰 안성맞춤으로 준비해 주시니 든든하다.
“그나저나 라바니는 좀 어떻다더냐.”
“다음 주에 퇴원한대요.”
“네 그림 보면 좋아하겠구나.”
“그랬으면 좋겠어요.”
거리에 그림을 그리는 일은 과거에는 상상도 못 했는데 모쪼록 좋아해 주었으면 한다.
“반응이 괜찮으면 15구에도 그려보고 싶어요.”
“거기는 왜?”
“우리나라 사람이 많이 산대요.”
“껄껄. 파리를 해바라기로 채울 셈이구나.”
할아버지 말씀에 가슴이 뛰었다.
해바라기로 가득한 파리라니, 상상만으로도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