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41화
44. 없었는데요 생겼어요(9)
“가야죠. 다쳤다면서요.”
친구가 아프다면 당연히 찾아가야 할 텐데 올 필요 없다니 말이 이상하다.
-그래 주면 고마운데. 지금 당장은 라바니도 쉬어야 할 테니까.
마치 뭔가를 숨기려는 듯 앞뒤 말이 잘 연결되지 않는다.
평소에 합리적이고 유창하게 말하던 사람이 그러니 더 불안해진다.
“심각해요?”
재차 묻자 미셸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할아버지랑 통화할 수 있을까?
떨떠름하지만 아마 어린 내게 말하기 힘든 이야기라고 판단한 듯해 더 묻지 않았다.
할아버지께 전화를 넘겨드렸다.
“그래요. 나예요.”
할아버지가 스피커를 끄고 스마트폰을 귀에 가져가셨다.
말없이 이야기를 들으시더니 표정이 급격히 안 좋아진다. 미간을 잔뜩 모으고 허탈하게 한숨을 내뱉으신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래요.”
통화를 마친 할아버지가 눈을 감고 감정을 추슬렀다.
“어떻대요?”
“생각보다 많이 다친 모양이구나. 못된 놈들…….”
“얼마나요? 어디를 어떻게 다쳤는데 그래요.”
아무리 물어도 망설이기만 하실 뿐 대답을 안 해주신다.
“친구잖아요. 저도 알아야 해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말씀드리니 어쩔 수 없이 입을 여셨다.
“네가 충격받지 않을까 해서 그래.”
어린 내가 충격받을 것을 걱정할 정도면 대체 얼마나 다쳤을지 짐작할 수 없다.
“플라티니 대표도 와줬으면 하면서도 망설이더라.”
“갈래요.”
할아버지가 숨을 길게 내쉬더니 마음을 먹으신 듯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래. 가보자꾸나.”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차에 올랐다. 내비게이션에 대고 마르셀 마르소 종합병원이라고 말하니 곧장 경로를 안내해 주었다.
“머네요.”
“다른 데 가기 힘들었을 거야.”
“……안 받아줘서요?”
할아버지는 부정하지 않았다.
마르소 재단이 운영하는 종합병원이니 비다 라바니를 데려갈 수 있었을 거라는 말씀이신데, 그나마 미셸이 곁에 있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부디 큰일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초조함을 애써 누르고 30분 정도 걸려 마르셀 마르소 종합병원에 도착했다.
5층 복도 끝에 있는 병실 앞에서 비다 라바니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비다 라바니와 히나 라바니.
한쪽은 아마도 모친일 거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미셸의 목소리다.
문을 열자 그녀가 애달픈 표정으로 반겨주었다.
“라바니는.”
안으로 들어서 병상을 본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대로 몸이 굳어버려서 미셸이 왜 망설였는지, 할아버지가 그녀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세상에.”
할아버지가 어깨를 감싸주었다.
비다 라바니의 얼굴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부어올라 있었다.
파랗다 못해 검게 멍든 자국이 얼굴뿐 아니라 몸 곳곳에 번져 있었다.
입술은 터지고 이마는 깨져 안 다친 곳을 찾기 힘들었다.
두 다리와 양팔은 깁스를 대고 있다.
제발 아니길 바라는데, 미셸이 아랫입술을 깨물고 내 손을 주물렀다.
“많이 놀랐지.”
나이가 적고 많고를 떠나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맞은편 병상에 옆으로 누운 여성도 말이 아니다. 비다 라바니의 모친은 등에 거즈를 잔뜩 붙여 두었다.
폭행당하는 아들을 감싸다가 생긴 상처이지 않을까 싶다.
“사람을 어찌 이 지경으로…….”
할아버지가 한탄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미셸이 고개를 저었다.
“자세히는 못 들었어. 전화로 도와달라고, 많이 다쳤다고만.”
“그림 때문에요?”
미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는 뭐라고 해요?”
“경과를 지켜봐야 한대. ……나을 거야. 꼭.”
미셸은 반드시 치료할 거라고 다짐하듯 말했다.
그만큼 상태가 안 좋다는 뜻이다.
* * *
비다 라바니가 입원하고 이틀이 흘러 깨어났단 소식을 들었다.
바로 찾아가고 싶었지만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하여 다음 날 오후 할아버지와 함께 병실을 찾았다.
“네.”
노크하자 한 여성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안녕하세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 비다 라바니의 모친 히나 라바니가 몸을 움찔했다.
“어떻게…….”
경계하는 기색이다.
“고수열이라고 합니다.”
“고훈이에요. 라바니 친구.”
“훈이?”
라바니 목소리다.
“엄마, 저랑 같이 그림 그리기로 한 친구예요.”
“아. ……들어오세요.”
히나 라바니가 길을 내주었다.
할아버지가 드린 과일 바구니를 떨떠름하게 받았는데.
친절에 익숙지 않은 건지, 타인이 찾아온 것 자체를 꺼리는 건지 아니면 나와 할아버지를 못마땅해하는 건지 알 수 없다.
안쪽으로 들어서자 그다지 나아지지 않은 라바니를 볼 수 있었다.
얼굴에 든 멍과 붓기는 여전해서 눈이 거의 안 보일 지경이다.
그런 주제에 웃는다.
“아프지.”
“응. 흐흐.”
마음이 강한 걸까. 상처를 숨기고 싶은 걸까.
그런 일을 당하고도 웃는 녀석이 안타까우면서, 한편으로는 웃음을 잃지 않아 안도했다.
“비다, 엄마 잠깐 나갔다 와도 돼?”
“어디 가세요?”
“조금 답답해서. 좀 걸으려고.”
“무리하시면 안 돼요.”
“응. 저, 혹시…….”
“네. 걱정하지 마시고 다녀오세요.”
히나 라바니가 밖으로 나섰다.
“……어떻게 된 거야.”
“아무 일도 아니야.”
“아무 일도 아니긴.”
“흐.”
녀석이 버릇처럼 웃고는 시선을 피했다. 다그치고 싶지 않아서 차분히 기다리니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
“나쁜 일 하는 형들이 있거든.”
“응.”
“엄마가 어울리지 말라고 하셨고. 나도 좀 싫어서 피해 다녔는데 못마땅했나 봐.”
다행히 나쁜 짓을 하고 다니진 않았던 모양이다.
“갤러리에서 일하게 된 걸 어떻게 알았는지 그때부터 막 괴롭히기 시작했어. 처음에는 몇 유로 주면 됐는데 자꾸 더 달라고 하니까.”
남이 땀 흘려 번 돈을 갈취하는 건 도적이나 하는 짓이다.
“그날도 도망치다가 집 근처에서 잡혔어.”
“…….”
“뒤져도 돈이 없으니까. 그림을 보곤 우상을 그렸다면서 뭐라 하길래 나도 화냈더니 때렸어. 엄마가 말렸는데 엄마도…….”
비다 라바니가 이를 악다물었다.
아무리 순한 애라도 부모가 얻어맞은 사실에 분노하지 않을 리 없다.
할아버지도 한숨을 내쉬었다.
“괜히 트집을 잡은 거야. 걔들은 기도도 안 하거든.”
돈을 뺏어가는 것으로도 부족해서 모자를 죽기 직전까지 폭행하다니.
패악질도 이런 패악질이 없다.
“그래도 대표님이 잡아주신다고 하셨으니까. 경찰이 혼내준대.”
“그래야지.”
“난 괜찮은데 엄마가 걱정이야. 원래 몸이 안 좋으셨거든. 괜찮다고만 하시는데 주무실 때 아직 끙끙대셔.”
“같이 나아야지.”
“응. 빨리 나아서 일해야 하는데.”
“이러고 있는데 일 생각이 나?”
“병원비 갚아야 하니까.”
미셸 플라티니가 수술, 치료, 입원 비용을 전부 내주었을 텐데 아마 상당한 금액일 거다.
몸도 성하지 않은 아이가 벌써 그 돈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딱하다.
“낫는 것부터 생각해.”
“응.”
비다 라바니가 대답하고는 작게 웃었다.
슬픔을 감추기 위한 웃음이 아니라, 정말 기뻐 보여서 눈을 깜빡이니 또 한 번 수줍게 웃는다.
“와줘서 고마워.”
“친구잖아.”
또 웃는다.
“아무것도 못 해서 엄청 심심했거든.”
“그러게.”
팔도 다리도 못 가눈 채 며칠을 지냈으니 답답해할 만도 하다.
“그림 볼래?”
“응.”
“마르소 거?”
“작가님 작품은 많이 봐서. 다른 것도 보고 싶어.”
뭘 보여줘야 할지 고민된다.
“누구 좋아하는데?”
“마르소 작가님.”
“마르소랑 비슷한 느낌은 많이 없는데.”
“그럼 너.”
아는 작가가 많지 않은 듯하다.
나중에 작업실에 오면 한 사람씩 소개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스마트폰도 하나 선물해 줘서 이것저것 찾아볼 수 있게 하고 싶다.
“와.”
<해바라기>를 보여주자 아이처럼 좋아한다.
“이건 뭐야? 유화 맞아?”
“좀 다르지?”
“응.”
“수묵화라고 붓을 되게 멋지게 쓰는 그림이 있어. 그거 보고 그린 거야.”
“색도 너무 예쁘다.”
억울할 텐데. 화날 텐데. 속상할 텐데. 분할 텐데. 아플 텐데 그림을 앞에 두고 그림 이야기를 하니 눈을 빛낸다.
“좋아하나 봐.”
“응?”
“그림.”
“응. 멋있으니까.”
<해바라기>를 보던 비다 라바니가 입을 열었다.
“엄마도 어제 물으시더라.”
“뭐라고?”
“그림이 그렇게 좋냐고.”
“그렇게 보여.”
비다 라바니가 잠시 망설이더니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아빠 돌아가시고. 엄마는 아파서 일 못 하시고. 나는 너무 어려서 일도 못 하니까 빨리 돈 벌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어.”
“응.”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다 그래.”
“어디 사는데?”
“몽마르트르구.”
과거 내가 잠시 머물렀던 곳이다.
지금은 예술가들의 고향이라 불리는 몽마르트르 언덕이 있는 지역.
“근데 어느 날 누가 티올 아저씨네 집 벽에 그림을 그리고 간 거야. 빨간 풍선을 든 여자애 그림.”
“풍선?”
“바깥쪽 벽에 구멍이 뚫려서 빨간 벽돌이 동그랗게 보이는데 그걸 풍선처럼 활용했어.”
재밌는 시도다.
“그 그림이 되게 유명한 사람 그림이었대. 티올 아저씨가 이사 가면서 살던 집을 엄청 비싸게 팔았다고 말해줬어.”
“너도 그러고 싶었어?”
“그러면 좋겠지만 그땐 그런 생각보단 그냥 신기했어.”
“뭐가?”
“희망이라는 게 있는지 몰랐거든. 이대로 살다가 죽지 않을까 하고.”
“…….”
“근데 그런 일이 벌어지니까 하루 종일 그림 생각만 나서 빨간 풍선 든 여자애만 보러 갔었어. 딱히 할 것도 없고.”
“응.”
“계속 보다 보니까 나도 그려보고 싶어져서. 그렇게 좋아하게 된 것 같아.”
좋아하게 된 이유가 거창할 리 없다.
아주 우연한 만남에서 피어난 마음을 설명할 수 있을 리 없으니까.
“나도 보고 싶다.”
“아마 뱅크스일 거다.”1)1)모티프는 영국 출신의 화가, 그래피티 아티스트, 영화감독 뱅크시.
“맞아요. 그런 이름이었어요.”
할아버지의 말씀에 비다 라바니가 맞장구쳤다.
“정체를 감추고 활동하는 예술가인데 본인은 예술 테러리스트라고 해.”
신기한 사람이다.
“뱅크스와 마르소가 희망을 주었구나.”
“대표님도요.”
“플라티니 대표도.”
할아버지가 비다 라바니의 말을 확인했다는 듯 따라 말씀하셨다.
“매일 시간이 흐르는 것만 기다리다 보니까 뭔가를 해본다는 건 생각할 수도 없었는데요.”
“음.”
“작가님이랑 대표님 덕분에 믿음이 생겼어요. 아무리 힘들어도 자기를 믿고 사랑하다 보면 기적이 일어난다고.”
“꼭 그럴 거다.”
할아버지가 인자하게 웃으시며 비다 라바니를 응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