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40화
44. 없었는데요 생겼어요(8)
“그렇지. 왜 안 될까?”
테러와 차별 행위가 왜 정당화될 수 없는지에 대한 답은 명확하다.
“다른 사람의 자유를 빼앗는 일이니까요.”
“할아버지 생각도 그렇단다. 누구나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지만 그것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만 허용된 일이야.”
타인의 자유를 지켜주는 사람만이 비로소 개인의 자유를 존중받을 수 있다.
“모든 갈등은 거기서 시작돼. 서로가 이해하고 존중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침범하길 바란다면 피할 수 없게 된단다.”
누군가 내 자유를 침범했을 때 가만있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훈이는 어떻게 생각하니.”
할아버지가 왜 프랑스 입장을 설명해 주셨는지 알 것 같다.
그들로서는 본인들의 자유를 침해받았으니 적대적일 수밖에 없을 거다.
민간인을 살해하는 극단적 행위에 온건한 방법으로 대응하는 것이 과연 옳을까.
상대가 그럴 생각이 없으면 당할 뿐이다.
고민이 길어진다.
할아버지는 묵묵히 기다려주셨다.
“무슬림이 어떤 사람들인지 정확히 모르겠어요.”
“할아버지도 그래.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뉘고 그 안에서도 또 여러 갈래로 나뉘니까.”
“테러를 저지르는 사람들은요?”
“교파로 나뉘기보다는 이슬람 극단주의라고 부르지.”
나눈다는 말은 그러지 않는 무슬림도 있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문제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게 있다.
그들의 행동이 반감을 부추기는 건 아닐까.
“이해가 안 돼요.”
“어떤 점이?”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이슬람 국가가 아닌 곳을 테러하는 행각은 단순한 전범이니까 고민할 필요가 없는데.”
“음.”
“프랑스에 사는 무슬림은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예요? 프랑스 사회가 마음에 안 들면 그들끼리 따로 모여 살면 되잖아요.”
“이슬람 국가 사이의 전쟁이나 내전 때문에 많은 사람이 유럽으로 도망쳤어. 일자리를 찾으러 과거 자신들을 식민지배했던 나라를 찾은 거야.”
어처구니가 없다.
프랑스에도 제국주의의 망령이 깃들었었나.
“훈아.”
“네.”
“객관적으로 말하려고 노력했지만, 무슬림을 안 좋게 이야기했어. 적어도 할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하니까. 정말 못된 놈들이라고.”
“네.”
“그런데 그것과 차별문제가 완전히 대응하는 문제일까?”
“다른 문제라는 말씀이세요?”
“그래. 할아버지는 테러에 강경히 대응해야 한다고 봐. 무엇보다 나와 네 목숨이 걸린 문제니까.”
할아버지는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신다.
테러 위협으로부터 안전하다는 점 때문에 마르소네 집에서 머물까도 진지하게 고민하셨으니까.
“그러나 증오범죄가 정당화되진 않는단다. 무슬림의 테러로 혐오 정서가 생겨난 건 사실이지만,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야.”
“그럼요?”
“글쎄. 하지만 아시아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인 걸 보면 테러만이 이유는 아닌 것 같구나.”
“이해가 잘 안 돼요.”
과거 프랑스에서 살았을 적에는 동양 국가는 신비로운 곳이었다.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세계.
내 전 세대에서는 동유럽을 선망의 대상으로 두었고, 내가 살던 시기에는 많은 예술가가 우키요에 같은 동아시아 문화에 자극받았었다.
차별과 혐오라니.
이해할 수 없다.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무슬림만 증오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야. 할아버지도 알게 모르게 무시당할 때가 있으니 오죽할까.”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세요?”
할아버지는 세계 어느 나라에 가든 존경받으셨다.
공항에 도착하면 항상 누군가 마중을 나와 있었고, 몇몇 나라에서는 숙소를 잡아주기도 했다.
그런 할아버지도 차별을 받았다고 하니 믿기 힘들다.
“할아버지가 네게 거짓말하는 거 봤느냐.”
고개를 젓자 할아버지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름이 알려지니 지금은 대놓고 그러는 사람은 없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어. 그들은 여전히 존재한단다. 그래서 훈이 네가 너무 일찍 유학 오는 걸 망설였던 거고.”
내가 너무 어린 나이에 당해선 안 될 일을 겪을 것을 우려하셨단 말씀이다.
“할아버지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행각을 용납할 수 없어. 본인들의 교리에 반하는 사람은 죽여야 한다는 이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니.”
“네.”
“그렇다고 인종차별주의자들을 옹호하고 싶진 않구나. 이건 할아버지가 당했던 경험 때문이고.”
“…….”
“그래서 두 문제를 서로의 원인과 결과로 받아들이진 않았으면 좋겠구나.”
영향이 없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혹시나 두 유형의 범죄가 상대방의 행위 때문에 정당화되는 걸 경계하신다.
“똑똑한 사람들이 많이 고민했는데 달라지지 않았어.”
해결할 길이 없는 갈등.
“다만, 할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해.”
“어떻게요?”
“서로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아도 인류 전체가 공유하는 감정은 분명 있단다. 그것만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이지 않을까 싶어.”
타인이 자신과 다르지 않음을 알면 그렇게 미워하지 않을 텐데.
과연 이슬람 극단주의자와 인종차별주의자들이 타인을 이해하려고 노력할까?
그랬다면 상황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을까.
하지만 만약 아주 작은 희망이 있다면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대로 보편적인 감정에 기대야 할 것이다.
유럽 사람도 무슬림도 한국 사람도 멋진 자연경관을 목도하면 가슴이 벅차오를 테니까.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다든가, 친구 사이의 우정이라든가, 꿈을 향한 갈증처럼 분명 다른 세계에서 살아도 인간이라면 응당 느끼는 무엇인가가 있을 거다.
하다못해 초콜릿과 과자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음악과 미술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믿고 싶다.
서로 사랑하기에도 부족한 삶을 테러와 차별로 채우는 어리석음이 안타깝다.
분하다.
상처받은 이들은 그들이 엄중히 처벌받기 전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위로받지 못할 거다.
국가, 종교, 사회, 집단이라는 거대한 힘 아래 짓눌렸던 나로서는 그들을 어떻게든 위로하고 싶다.
분명 그 자체로 욕하는 사람도 있겠지.
억울하니까.
똑같은 놈들을 위로하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조차 보듬고 싶다. 그 역시 상처받은 사람이니까.
“어렵네요.”
“어렵지.”
이 어려운 이야기를 모두가 관심 있게 볼 수 있도록 하는 건 얼마나 험난할까.
그래도 해야 한다.
테러에 희생된 이와 그 가족을 향한 안타까움과 일상도 제대로 영위하지 못하는 비다 라바니에 대한 동정도 모두 내 감정이니까.
그 감정을 속여서는 어떤 그림을 그리든 마음이 편치 않으리라.
다음 작품의 방향을 잡았다.
* * *
토요일.
비다 라바니가 쓸 책상과 이젤을 준비해 두고 간식을 덜어 놓고 스케치를 하다 보니 점심이 되었다.
할아버지가 밥 먹으러 올라오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셔서 계단을 올랐다.
달콤하고 농후한 냄새를 따라 주방에 이르니 식탁 가득 한 상을 차려두셨다.
“이게 다 뭐예요?”
소고기 갈비찜에 배추김치, 샐러드까지 평소 먹던 식단과 다르다.
“친구 온다고 하니 신경 좀 썼지.”
“바쁜가 봐요.”
할아버지가 모처럼 준비해 주셨는데 아깝다.
샐러드를 한 젓가락 집어서 먹으니 고소한 맛이 깊게 느껴진다.
“맛있다.”
“입에 맞아?”
“네. 맛있어요.”
할아버지도 맛보시곤 고개를 끄덕이셨다.
“참깨에요?”
“타히니라고 아랍에서 많이 먹는다고 해서 사 봤는데 괜찮구나.”
연락할 방법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 되었다.
비다 라바니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준비하신 할아버지가 얼마나 고생했을지 짐작된다.
“죄송해요. 언제 올지 확실하지 않았는데.”
“아니다. 우리끼리 맛있게 먹으면 되지. 앉아서 먹자.”
할아버지와 마주 보고 앉았다.
“합.”
갈비찜을 한 입 베어 물자 찐득한 기름기 아래 소고기가 부드럽게 녹아내리고 말았다.
농후하게 퍼지는 짙은 향에 정신이 아찔하다.
“맛있어요.”
“껄껄. 할아버지 이제 음식 좀 하지?”
“요리사 하셔도 될 것 같아요.”
“하하핳. 이 녀석. 김치도 먹고.”
“네.”
예전에 담그신 김치는 너무 짜서 먹기 힘들었는데, 최근에 한 겉절이는 아주 훌륭하다.
특히 갈비찜이나 수육과 함께 먹으면 정말 내가 알던 김치가 맞나 싶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상승효과를 일으킨다.
고기와 양념이 눅진하게 스며든 입을 시원하게 해주는 덕에 번갈아 먹으면 계속 먹을 수 있다.
“잘 먹었습니다.”
“다 먹었어?”
“네. 더는 못 먹어요.”
배가 터질 것 같아서 잠시 쉬다가 의자에서 내려왔다.
식탁에서 접시를 모아 남은 음식은 음식물처리기에 넣고 빈 접시는 식기세척기에 넣었다.
반찬통을 닫아 냉장고에 넣으니 할아버지가 씩 웃으신다.
“다 컸네. 다 컸어.”
“그럼요. 그러니까 이제 요리도 번갈아 가면서 해요.”
“위험해. 칼 잘못 쓰다가 손 베이면 어쩌게.”
할아버지만 밥상을 차리는 게 마음에 걸리던 차, 기회다 싶어서 나섰지만 씨알도 안 먹힌다.
청소도 빨래도 기계가 다 알아서 해주니 집안일이라고는 먼지를 털거나 빨래를 널고 개는 일 정도지만, 그나마도 할아버지가 하시는 게 불편하다.
손이 닿는 곳은 한다지만 할아버지 성에 찰 리 없다.
“그래. 구상은 잘 되고?”
“이것저것 생각하고는 있는데 잘 안 풀려요.”
“다른 작가는 어떻게 다뤘는지 보는 것도 도움이 되지.”
“맞아요. 많이 찾아보고 있는데 게르니카가 눈에 계속 밟히더라고요.”
“음.”
나치군의 폭격으로 다친 사람, 절규하는 사람을 표현한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
거대한 폭력 속에 희생당한 이들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나치 군인이 피카소에게 물었단다. 게르니카를 당신이 그렸냐고.”
피카소라면 눈앞에 총구를 들이밀어도 당당히 본인이 그렸다고 했을 것 같다.
“뭐라고 했어요?”
“아니. 당신들이 그린 그림이지.”
“……역시 피카소네요.”
부우웅- 부우웅
할아버지가 전해주신 일화에 감탄하며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미셸이에요.”
할아버지가 얼른 받아보라고 고개를 끄덕이셨다.
“네, 미셸.”
-훈아, 혹시 라바니 일 알고 있어?
“아니요. 무슨 일인데요?”
-라바니가 많이 아프대. 오늘 아침에 어머니한테 연락을 받았는데 생각보다 심각한 것 같아.
깜짝 놀라 물었다.
“네? 어디가 어떻게요?”
-음……. 놀라지 말고. 혹시 할아버지 곁에 있어?
“네. 같이 듣고 있어요.”
-자유의 수호신 그림을 그린 걸로 문제가 됐나 봐.
“그림이 문제가 돼요?”
-그들 입장에서는 우상을 그렸으니까. 몇 명이 때린 것 같아. 심하게.
너무 놀라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올 필요는 없지만 일단 병원 주소 보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