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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반 고흐-238화 (193/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38화

44. 없었는데요 생겼어요(6)

“하하핫하. 네. 앙리 마르소 작가는 호구가 아니라고 하시네요.”

알퐁스 멘디가 고훈의 말을 받아서 정리하자 고훈도 웃고 말았다.

“그렇죠. 그런 이야기 잠시 돌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당시 100만 달러를 투자하셨다는 기사가 났었는데, 사실이라면 이번에 수익률이 상당하겠네요.”

“맞아요.”

고훈이 알퐁스 멘디와 눈을 마주치고 또 한 번 웃으니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죄송합니다.”

“아하하. 괜찮습니다. 여기저기서 연락을 많이 올 테니까요.”

“마르소예요. 보고 있나 봐요.”

“하하핳핫!”

알퐁스 멘디가 큐 카드로 입을 가리곤 어쩔 줄 몰라 했다.

“아~ 정말. 하하항. 좋습니다. 앙리 마르소 작가님도 언제 한번 출연하셔서 못다 한 이야기를 풀어주셨으면 하네요.”

알퐁스 멘디가 간신히 진정하곤 질문을 이어갔다.

“그나저나 방금 우리 마르소라고 하셨는데, 어떤 의미인가요?”

“한국에서는 자주 쓰는 개념이에요. 우리 학교라든지 우리 엄마 아빠, 우리 남편, 아내처럼요.”

“……우리 남편이요?”

알퐁스 멘디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방청객들도 의아해하는 기색을 보였고 고훈은 그들이 무엇을 이상해하는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공동체적인 사고 때문이에요. 실제로 배우자를 공유하는 개념은 아니고요.”

“아.”

알퐁스 멘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전에 소개했던 피의 낙인 같은 드라마가 한국에서도 일상은 아니군요?”

“네.”

“혹시나 했습니다.”

고훈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되게 멋진 개념이라고 생각해요. 서로를 존중하면서 하나가 되기도 하는 그런 느낌이요. 실은 얼마 전부터 같이 그림 그릴 사람을 모으고 있었거든요.”

“네. 그랬죠. 수상한 포스터.”

고훈이 멈칫했다가 다시 이야기를 풀어냈다.

“네. 많이들 연락해 주셨는데 마음 맞는 분을 찾진 못했거든요. 지금까지는 딱 한 사람뿐이었어요.”

“혹시 마르소 작가인가요?”

고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작업실을 쓰진 않지만 가끔 만나서 작품 이야기도 하고 그래요.”

“그렇군요. 작업은 따로 하지만 작품에 관해서 깊이 대화할 수 있는 일종의 소모임 같은 거네요.”

“맞아요.”

“아주 좋습니다. 잠시 후 2부에서 고훈 작가가 구성한 소모임에 관하여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죠.”

* * *

다음날.

개벽이 업데이트되었단 소식을 듣고 연구실을 찾았더니 마르소가 씩씩대며 걸어왔다.

“너 미쳤어!”

언제 봐도 씩씩한 친구다.

“좋은 아침이에요.”

“좋은 아침은 개뿔! 전화는 왜 안 받아!”

“피곤해서 잤어요. 돌아오자마자 방송 나갔거든요.”

“피곤하면 헛소리해도 돼? 쓸데없는 말은 왜 꺼내서 난리야!”

“뭘요?”

“몰라서 물어?”

“우리 마르소라고 한 거요?”

“이 자식이!”

눈을 부라리며 달려든다.

작년 11월부터 쭉 느낀 바로 마르소는 이렇게 골려 먹을 때가 가장 재밌다.

평소에는 진지하고 조용한 편인데 조금만 놀려도 발작하는 게 귀엽다.

미셸과 아르센이 가끔 마르소를 놀리는 걸 즐기는 것처럼 보여 의아했는데, 이제는 충분히 이해한다.

“아, 호구 아니라고 한 거?”

“그래!”

“그게 왜요?”

“당연한 말을 왜 하냐고!”

“놀리니까 그렇죠.”

“웃기지 마. 네가 일부러 그러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아!”

마르소가 입을 크게 벌리기에 초콜릿을 입에 넣어줬더니 미간을 좁힌다.

“……이거 뭐야.”

“맛있죠. 브뤼셀에 있는 수제 초콜릿 가게에서 사 왔어요.”

여행 다녀온 기념으로 산 선물이 마음에 든 모양인지 초콜릿 상자를 이리저리 살핀다.

“훈이 있었네?”

미셸 목소리다.

고개를 돌리니 평소와 달리 긴 머리를 올려 묶은 미셸이 안경을 쓴 채 들어섰다.

“이거 받으세요.”

가방에서 초콜릿 상자를 하나 더 꺼냈다.

“어쩜. 이게 뭐야?”

“브뤼셀에서 사 왔어요. 맛있더라고요.”

“고마워. 잘 먹을게.”

미셸이 하나 집어 먹더니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성난 앙리 마르소도 얌전히 만든 초콜릿이니 무리도 아니다.

“진짜 맛있다. 그렇게 달지도 않고.”

“부드럽죠?”

“응. 엄청 진하다.”

하나 더 집어 먹는다.

표면을 감싼 화이트초콜릿 아래는 눅진한 초콜릿 크림이 들어 있는데, 풍미가 대단해서 입안에 퍼지는 순간 취할 수밖에 없다.

쌉싸름하면서도 그윽한 단맛을 즐기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한 상자를 비우고 만다.

“참. 사람 계속 구하고 있어?”

“네. 생각 있어요?”

“아니.”

미셸이 웃는다.

폭넓은 지식과 큐레이터로서의 경험을 갖춘 그녀라면 좋은 토론 상대가 되어줄 텐데 아쉽다.

“지원자가 있어서 추천해 볼까 싶었지.”

“누군데요?”

“비다 라바니라고 16살. 그림 좋아하고 착해.”

독특한 이름이다.

“그 일 일어났을 때 같이 있었는데. 혹시 기억나?”

“아.”

마르소 갤러리에 테러범이 들었을 때 인질로 잡혔던 무슬림 꼬마다.

통성명도 못 했지만 함께 사탕을 골랐었다.

이후로 소식이 없고 무슨 일인지 언론에서도 그 아이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아 걱정하던 차였다.

“알아요. 어떻게 알아요?”

“갤러리에서 미화원으로 일하고 있어. 지각 한 번 안 하고 엄청 성실해.”

기특하게도 어린 나이에 일을 시작한 모양이다.

“얼마 전에 메일 보내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해서 도와줬거든. 네 포스터 봤었대.”

요즘 세상에 메일 보내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가질 수 없을 만큼 생활이 어렵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데, 간과하고 말았다.

“어때? 한번 만나볼래?”

“네. 내일 갤러리로 가면 돼요?”

“응. 언제든지.”

“시간 낭비야.”

마르소가 초콜릿을 까먹으며 말했다.

“갤러리 짓고 싶다며. 작품을 하든 방송을 하든 네가 지금 딴 녀석 신경 쓸 때야?”

“부담되지 않을 정도로만 만나면 되죠.”

“그건 네 생각이고. 너하고 일하고 싶은 인간 중에 제대로 된 사람이 몇이나 있었어? 어떻게든 뭐 하나 얻어먹으려는 것들뿐이었지.”

워낙 개떡 같은 인간을 많이 겪어서 그런지 기본적으로 사람을 믿지 않는다.

“그 애는 달라. 훈이한테 부담 줄 애 아니야.”

미셸이 비다 라바니를 두둔했다.

“그건 모르지.”

앙리 마르소가 일어나서 미셸의 초콜릿에 손을 대려다가 그녀에게 찰싹 얻어맞았다.

“내 거야.”

마르소가 고개를 돌리기에 내 몫을 하나 넘겨주자 한입에 털어 넣었다.

“아무것도 못 먹은 사람은 욕심이 없어. 간절할 뿐이지.”

절박한 만큼 살아남는 것만을 생각하게 된다.

“욕심은 조금이라도 입에 들어간 순간 생겨. 결핍이 오래될수록 먹어도 먹어도 만족할 수 없게 되지.”

간단한 말이다.

빈속으로는 허기를 참을 수 있지만, 아주 조금 무엇을 먹으면 참기 힘들어진다.

“인간은 원래 그래.”

마르소가 단호히 말했다.

아마 데미안 카터 일이 마르소에게 크게 작용한 듯하다.

“그런 사람도 있지만, 안 그런 사람도 있어요. 사람이 다 나쁘면 어떻게 지내겠어요.”

언젠가는 이 고집스러운 친구가 조금은 솔직해지길 바라며 초콜릿을 하나 더 줬다.

* * *

오랜만에 마르소 갤러리를 찾으니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비다 라바니가 활짝 웃으며 반겨주었다.

“고훈!”

여전히 말랐지만 피골이 상접했던 전보다는 건강해진 모습에 안심했다.

“잘 지냈어?”

“나 기억해?”

“그럼.”

눈을 크게 뜨고 기뻐하니 내 기분도 덩달아 좋아진다.

“오늘 사탕 중에는 이게 제일 맛있어.”

비다 라바니가 캐러멜 사탕을 잔뜩 집어 주었다.

많은 미술관과 갤러리를 다녔지만 <79㎏>을 이렇게 기분 좋게 접한 건 처음이다.

작품을 설명해 주진 않지만, 페르디난도 곤잘레스가 비다 라바니를 봤다면 자기 작품을 가장 잘 표현해 준 해설사로 꼽지 않을까 싶다.

“고마워.”

캐러멜 사탕을 세 개 집어서 하나는 입에 넣고 나머지는 주머니에 챙겼다.

“미셸한테 들었어. 같이 그림 그리고 싶다고.”

“대표님이?”

“응. 잠깐 이야기해도 돼?”

“어……. 지금은 근무 중이라서. 미안. 호, 혹시 퇴근하고 집에 찾아가도 돼?”

“언제 끝나는데?”

“6시.”

두 시간 정도 남았다.

“온 김에 구경하고 있을게.”

“응! 빨리 끝낼게!”

정해진 시간을 어떻게 빨리 끝낸다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안으로 들어서서 작품을 감상하기를 얼마간 미셸이 다가왔다.

“비다하고 얘기하는 거 아니었어?”

“일하고 있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어요.”

“얘기를 하지. 불러올까?”

“아니에요.”

“왜?”

“부담일 것 같아서요.”

미셸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굳이 채용할 이유는 없지만 사정이 안타까워 들였다고 한다.

막상 고용하고 나니 성실해서 잡무를 맡기고 있다고.

미셸이라면 그런 이야기를 비다 라바니에게 했을 리 없지만, 거리 생활을 한 아이가 눈치가 없을 리 없다.

되레 그 사정을 너무나 잘 알기에 더욱 더 열심히 일하고 있을 거다.

그런 아이에게 근무 도중에 시간을 내달라고 하면 불안하고, 불편해할 것이 뻔하다.

“그러네.”

미셸이 씩 웃고는 감상하고 있던 <앙리 마르소 677>을 바라보았다.

앙리 마르소가 자신의 사진을 활용해 백합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최근 많이 힘들어했어.”

“라바니가요?”

“앙리.”

<앙리 마르소 677>을 보던 미셸이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했다.

“앵테르미탕하고 개벽도 신경 써야 하고. 경매 시스템 개편안도 작성하고 있고. 하는 일이 많은데 데미안 카터 일이 조금 충격이었나 봐.”

“…….”

“사파이어처럼 보였던 유리. 일부러 흘렸던 것 같아.”

보석을 직접 활용할 수 없었던 시절, 유리를 가공해 보석처럼 보였던 데미안 카터는 마지막 발표작에 과거에 활용했던 기술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것이 단서가 되어 비밀 작업장이 발각되었다고 들었다.

“그가 범죄를 저지른 건 사실이고 그렇기에 더더욱 용서할 수 없는데, 마냥 미워할 수 없어서 고민하는 것 같더라고.”

나와 같은 생각이다.

동정하지만 용서할 수 없는 모순된 감정을 느끼고 있다.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을 거야. 어제 그런 말을 하긴 했지만, 속으로는 고민하고 있어.”

“앵테르미탕도 그 때문에 도입한 거잖아요.”

“응. 말은 그렇게 해도 이것저것 신경 쓰고 있어.”

미셸이 마르소의 속내를 한 번 더 상기해 주었다.

“알아요. 믿지 않는 척해도 마르소만큼 예술가 신경 쓰는 사람도 없는 거.”

미셸이 웃었다.

“고마워. 너 만나고 나서 많이 웃는 것 같아.”

“저도 그래요. 놀리는 거 재밌거든요.”

“흐흫. 어젠 좋았어.”

미셸과 손뼉을 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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