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237화 (192/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37화

44. 없었는데요 생겼어요(5)

-진짜. 진짜 뤼팽 너무 멋있어.

스마트폰 너머로 차시현이 호들갑을 떨었다.

-바로 내가 뤼팽이기 때문이지.

아르센 뤼팽이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위기에서 벗어날 때면 주변 인물들이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묻는데, 그때마다 내뱉는 대사다.

그 어떤 불가능한 일도 납득하게 되는 마법의 대사가 멋있어 보였던 모양.

목소리는 조금도 비슷하지 않지만 얼마나 많이 연습했는지 억양과 발음은 제법이다.

-더 나왔으면 좋겠다.

“더 나올 거야. 아직.”

-정말? 정말 2편 나와?

“응. 일정은 잡혔는데.”

-정말? 언제? 언젠데?

자꾸 보채는 바람에 좀처럼 말을 끝까지 이어나갈 수 없다.

“아직 대본도 안 나왔어. 1~2년은 기다려야 개봉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안 돼. 어떻게 기다려. 못 기다려.

이렇게 좋아해 주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 웃고 말았다.

-참. 엄마가 사인 부탁하셨는데. 괜찮아?

친구 어머니께 사인해 주려고 하니 조금 민망하다.

“무슨 사인이야. 나중에 한국 가면 인사드릴게.”

-응?

“응?”

-아니. 토비 샬라메한테.

아르센 뤼팽 역을 맡은 배우 토비 샬라메의 사인을 받고 싶으셨던 모양.

“……만나면 물어볼게.”

-사인해 주고 싶었지!

“네가 말을 헷갈리게 했잖아.”

최근 사인회를 워낙 많이 다녀서 어쩔 수 없었다.

-히히힛. 엄마랑 나랑 아트북 한 권씩 샀어. 나중에 사인해 주라.

“싫어.”

얼굴이 조금 뜨겁다.

다음에 누가 사인 이야기를 꺼내면 누구 사인을 바라는지 확실히 확인해야겠다.

-지금은 어디야? 암스테르담?

“아니, 파리.”

-그제만 해도 부다페스트에서 암스테르담 간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일 하나 끝내면 또 하나 기다리고 있더라. 오늘 방송 나가야 해서 어제 일 끝나자마자 돌아왔어.”

새 학년이 시작되는 9월까지는 느긋하게 지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큰 착각이었다.

<기암성>과 <빈센트>가 연달아 크게 성공한 덕분에 일이 몰려 들었다.

방송은 물론이고 <기암성> 아트북 판매처, 원화 전시회, 시사회, 이벤트를 좆아 사인회를 열다 보니 지지난 주부터 로스앤젤레스, 시카고, 뉴욕, 서울, 도쿄, 상하이, 런던, 베를린, 마드리드, 부다페스트, 암스테르담을 다녔고.

오늘 파리로 돌아왔다.

-힘들겠다.

“딱히. 하루 종일 하는 것도 아니고 구경 다니니까 재밌어. 맛있는 것도 먹고.”

-맛있는 거?

“마드리드에서 츄러스 먹었는데 초콜릿을 컵에 따라서 주더라.”

마드리드 사람들은 아침마다 츄러스에 행복을 찍어 먹는다.

-초콜릿을? 녹여서?

“엄청 진해.”

-맛있겠다.

“맛있어. 이동할 때마다 못 먹어봤던 거 먹으니까 좋더라.”

새로운 장소와 그곳의 식문화는 행복과 영감을 준다.

일이 마무리되면 예전처럼 할아버지와 미술관을 둘러보며 경치도 구경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다니고 싶다.

-그건 좋은데. 방송이랑 강의도 한다며.

<기암성> 덕분에 방송 출연이 잦아졌고, 다큐멘터리 영화 <빈센트> 덕분에 팔자에도 없던 강의까지 나가게 되었다.

테드 글로벌이라고 올해 파리에서 열리는 데 앙리 마르소와 함께 출연하게 되었다.

“그것도 다 경험이니까. 말하는 거 좋아하기도 하고. 나는 재밌는데 태호 아저씨가 고생이야.”

미국처럼 며칠씩 머물러야 하는 곳은 할아버지가 함께 가주었지만, 당일치기로 다닐 수 있는 유럽 일정은 방태호가 혼자 데리고 다녀준다.

덕분에 한 달 내내 서울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아저씨는 좋아하실 것 같은데.

“그래?”

-응. 돈 많이 버시잖아.

“그렇긴 해.”

외부 활동이 많아진 만큼 내 벌이가 좋아졌고, 당연히 방태호에게 돌아가는 금액도 많아졌다.

-그럼 이제 갤러리 지을 수 있어?

“설마.”

-그렇게 많이 버는데?

“정산이 되어 봐야 알지. 그 돈이 쉽게 벌릴 리가 없잖아.”

<기암성>과 <빈센트>가 앞으로 얼마나 더 잘될지 모르지만 설마 수백억 원씩 들어올 리는 없을 거다.

-돈 모으기 힘들면 같이하는 사람 모으면 되잖아. 꼭 혼자서 지어야 해?

“마음 맞는 사람 구하기가 힘드니까. 저번에 사람 구한다고 했잖아?”

-응. 수상한 포스터.

“…….”

-히히힣.

포스터를 떠올리면 좋지 않은 기억이 있다.

방태호가 포스터 만드는 방송을 뉴튜브에 올린 탓인데, 조회 수가 300만을 넘어 채널 중 가장 많은 사람이 봐 버렸다.

댓글마다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느냐, 누구를 납치할 거냐 같은 댓글은 수천 개나 달렸다.

시청자들의 의견을 수렴했을 뿐이거늘 수치스럽다.

“아무튼 이렇다 할 사람이 없더라고.”

연락은 꽤 많이 받았지만 의도가 불순한 사람들이 많아서 흐지부지됐다.

워낙 바빴던 탓에 모든 사람과 연락해 보진 못했지만 개중에는 활동하면 돈을 받을 수 있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고, 숙식을 지원해 주길 바라는 사람도 있었다.

그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나 내게 의지하는 사람과 함께하고 싶진 않다.

각자의 길을 걷되 가끔 찾아오는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지켜봐 주는 관계를 원한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일 경우 그 결과가 좋지 않았다.1)

“훈아, 준비하래.”

“네.”

방태호가 방송이 곧 시작된다고 알려주었다.

“가 봐야 해. 또 전화할게.”

-응. 잘해.

* * *

프랑스 최고 시청률을 자랑하는 TV 프로그램 알퐁스 멘디 쇼가 시작되었다.

인기 연예인 알퐁스 멘디가 가지런한 치아를 보이며 인사했다.

“프랑스 최고의 활극 소설이죠? 아르센 뤼팽 시리즈가 때아닌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영화 기암성 덕분이죠.”

방청객이 환호했다.

프랑스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세계적으로 성공하면서, 아르센 뤼팽 시리즈가 다시금 베스트셀러에 오르게 되었다.

개봉한 지 한 달이 흘렀으나 상영관이 적은 탓에 <기암성>을 실제로 관람한 사람은 많지 못했고.

사람들은 원작 소설을 보며 아쉬움을 달래고 있었다.

“그 기암성이 이분의 손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영화 기암성의 콘셉트 아트 매니저를 맡았던 화가 고훈을 모시겠습니다.”

고훈이 모습을 드러내자 방청객이 환호와 박수로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고훈이 알퐁스 멘디와 악수하고는 소파에 올라앉았다.

“정말 놀랍습니다. 우리가 만난 게 넉 달 전이었나요?”

“그럴 거예요.”

“넉 달 만에 세상을 또 한 번 놀라게 해주셨습니다. 어제 개봉 33일 만에 15억 달러.”

방청객들이 놀란 목소리로 호응했다.

“아르센 뤼팽을 다룬 영화는 이전에도 있었는데. 기암성이 유독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요?”

“원작을 잘 해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고훈이 차분히 답했다.

“크리스틴 노먼 감독은 천재예요. 아르센 뤼팽뿐만 아니라 이지도르, 헐록 숌즈, 가니마르, 레이몽드 등등 출연하는 모든 인물을 완벽히 이해했어요.”

“인물을 완벽히 이해했다.”

“네. 노먼 감독은 시나리오를 주고 인물이 어떤 생각으로 행동하는지 꼼꼼히 설명해 줬어요. 버릇은 뭐고 어떤 옷을 즐겨 입는지도요. 그 구두를 왜 신었는지까지 정말 철저했어요.”

“대단해 보이는데, 함께 작업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네요.”

“사실 편했어요. 모호한 부분이 없었거든요. 저는 감독의 머릿속에 있는 세계를 종이 위에 그렸을 뿐이에요.”

“노먼 감독은 고훈 작가가 없었다면 기암성을 만들 수 없다고 말했었죠.”

고훈이 싱긋 웃었다.

“아마 그걸 증명하는 작품이 이것이지 않을까 싶은데요.”

알퐁스 멘디의 말과 함께 스크린에 <총탄>이 떠오르자 방청석이 술렁였다.

총구에서 벗어난 총알에 비친 인물들의 표정이 적나라했다.

“영화만큼이나 화제가 되는 작품이죠. 총탄이란 제목의 그림인데 클라이맥스 장면이었죠?”

“네. 경찰이 쏜 총에 레이몽드가 죽는 장면이에요.”

“뤼팽을 지키기 위해서 달려들었죠. 영화 기암성의 명장면으로 손꼽히는데, 어떻게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습니까?”

“정말 많이 고민했어요. 비친다는 이미지는 마르소의 그림자에서 영감을 얻었고, 뒤틀린 구도는 마네를 참고했어요.”

알퐁스 멘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 영화에서도 동일한 장면이 삽입되어 있는데, 보통 이런 설정화가 영화 촬영에 영향을 주나요?”

“네. 하지만 보통은 감독처럼 연출 권한을 가진 사람의 요청으로 그리는 경우가 많아요.”

“그럼 총탄도?”

“그렇진 않아요. 제가 구상했어요.”

“정말 멋지네요. 고훈 작가가 없었더라면 영화가 완성될 수 없었단 노먼 감독의 말도 이해가 됩니다.”

여러 매체를 통해 찬사를 받았으나 고훈은 좀처럼 이러한 분위기에 익숙해질 수 없었다.

민망함을 애써 감추며 웃었다.

“그럼 영화 이야기는 조금 미뤄두고 근황 이야기로 넘어가 보죠. 요즘은 어떻게 지내시나요?”

“얼마 전에 앙리 4세 중학교 입학시험을 봤어요. 물론 합격했고요.”

“그러면?”

“네. 유학을 오게 돼서 당분간은 파리에서 지낼 것 같아요.”

“그거 반가운 일이네요. 앙리 4세 중학교라면 명문 중의 명문으로 알고 있는데.”

“다양한 경험을 약속해 주셔서 기대하고 있어요.”

“좋은 일이죠. 파리는 어떤가요?”

고훈이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좀 놀랐어요.”

“어떤 점이요?”

“다양성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하더라고요. 공원 같은 데 가면 쥐가 엄청나게 많은데. 제 팔보다 큰 쥐요.”

“하하핫!”

알퐁스 멘디가 크게 웃었다.

파리를 찾는 외국인들이 가장 크게 놀라는 일이기도 했으며, 파리 시민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이야기였다.

“그런 쥐도 보호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끝이 나지 않는 이야기죠.”

시내 곳곳에 들끓는 쥐는 오랜 세월 사회적 문제였다.

시민들을 물거나, 전염병을 퍼뜨리는 등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쥐를 죽여야 한다는 입장과 쥐 역시 보호 받아야 하는 생명이라는 주장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수십 년간 논쟁을 이어왔다.

다양성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고훈에게 혼란을 준 일이기도 했다.

“누구 말이 옳은지는 모르겠는데, 좀 놀랐어요.”

“그렇죠.”

알퐁스 멘디는 고훈이 예민한 이슈를 다뤄, 혹시나 동물 보호 단체에 공격을 받진 않을까 걱정하던 차에 안도했다.

누구 말이 옳은지 모르겠다는 말로 중립을 지켜 어느 한쪽에서 큰 비난을 받진 않을 듯했다.

예민한 이야기를 피하고자 화제를 돌렸다.

“아르누보 공모전, 기암성, 빈센트까지 잇따른 성공으로 많이들 알아볼 듯한데.”

“맞아요. 요즘에는 밖에 나가면 다들 인사해 주시더라고요. 사실 기암성이 가장 도움을 준 것 같아요.”

“하핫. 성공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잘될 줄은 아무도 몰랐죠.”

“네. 예전에 마르소가 투자했을 때 호구다, 돈을 버린다 그런 댓글을 봤었거든요. 정말 속상했는데.”

고훈이 카메라를 보고 말했다.

“보셨죠? 우리 마르소 호구 아니에요. 이번에 돈 많이 벌었어요.”

고훈의 말에 알퐁스 멘디와 방청객들이 크게 웃었다.

* * *

1)폴 고갱과의 경험 때문.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