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36화
44. 없었는데요 생겼어요(4)
고훈은 시청자들과 다시 한번 논의하여 포스터와 문구를 완성했다.
시계는 어느덧 아홉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하암.”
앙리 마르소 저택에서 머물렀던 9주간 일찍 자는 습관이 들어버린 탓에 밤 9시만 되면 졸음이 몰려들었다.
고훈이 눈을 끔뻑끔뻑 떴다 감으며 채팅창을 확인했다.
└졸린가 봐 ㅋㅋㅋ 귀여워
└얼른 자
└제육 덮밥 먹고 싶다
“네. 자야 할 것 같아요. 근데 여러분은 대체 언제 자요? 오늘 학교 안 가도 돼요? 회사나.”
고훈이 컴퓨터로 서울 현재 시각을 확인했다.
새벽 5시.
방송을 두세 시간 동안 했으니 새벽 3시부터 계속 봤다는 뜻이었다.
└그런 거 묻는 거 아니에요.
└엄마 죄송해요 ㅠㅠ
└백수라서 ㄱㅊ
└근데 집에서 하면 불편하지 않나?
└밤에 일함.
채팅창을 읽던 고훈이 고개를 숙였다.
“항상 감사합니다. 방송도 봐주시고 사람 구하는 것도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집에서 하면 불편하지 않냐는 채팅이 눈에 들어왔다.
“작업실을 따로 구하기 부담스러워서 집을 큰 걸로 샀어요. 나중에 사람이 많아지면 모르겠는데, 두세 사람 정도면 괜찮을 거예요.”
시청자들이 의아해했다.
파리 부동산 가격이 아무리 높다고 해도 고훈에게 부담스러울 리 없었다.
<서리 밀밭>만 하더라도 어마어마한 가격에 거래되었고 <해바라기>를 포함해서 앙리 마르소가 사들인 작품 가격만 합쳐도 한화 200억 원에 육박했다.
시청자들은 고훈이 수수료와 세금을 얼마나 냈는지 몰라도 상당한 자산가로 인식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조부 고수열은 말할 것도 없었으며, 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도 상당할 테니, 고훈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 집은 할아버지가 사셨어요. 작업실 구하려고 하면 구할 수 있는데, 갤러리 짓고 싶어서 돈 모으고 있거든요. 마르소가 소개해 준 사람한테 돈 맡겨서 주식이랑 채권 투자도 하고 있고.”
└대체 얼마나 크게 지으려고?
└건축비는 사실 그리 많이 안 들걸? 대부분 땅값이지.
└고훈 12살: 파리에 갤러리 지으려고 돈 모으고 있어요.
└나 12살 때 뭐 했지…….
“마르소 갤러리 정도로 짓고 싶은데, 지금 공시지가가 1㎡에 15만 유로래요. 실제 거래 가격은 더 비싸고. 마르소한테 물어보니까 건축비도 상당하더라고요. 그래서 돈 모으고 있어요.”
└공시지가로 평당 49만 5,000유로?? 그럼 실제로는 평당 한 10억쯤 함??
└도랐네.
└평당 10억ㅋㅋㅋㅋㅋㅋㅋㅋ
└못 살 만하네.
“네. 그래서 지금은 그럴 돈 없어요. 하암. 자러 갈게요. 다음 주에 봐요.”
고훈이 손을 흔들어 보이다가 방송을 종료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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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틴 노먼 감독의 영화 <기암성>은 개봉 첫날부터 대흥행을 예고했다.
각국 주요 영화관 서버가 불안정해질 정도로 접속자가 많았으며, 이는 개봉 첫 주가 흐른 시점에 발표된 흥행 수익으로 입증되었다.
1억 7,700만 달러의 오프닝 성적을 거두며 전미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른 <기암성>은 개봉 첫 주 만에 전 세계 4억 8,500만 달러의 수익을 벌어들였다.
월드 디자인 스튜디오와 크리스틴 노먼 사단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공격적인 마케팅을 이어나갔다.
주연 배우들은 각국을 방문하여 팬들을 위한 시사회 및 행사에 참석하였으며.
아르센 뤼팽 관련 상품을 출시하는 등 팬들이 <기암성>과 아르센 뤼팽을 더욱 깊고 다양하게 즐길 수 있도록 배려했다.
콘셉트 아트 매니저로 활동한 고훈의 설정화 또한 주요 수입원이었다.
<기암성> 아트북은 출간 하루 만에 전 세계 모든 서점에서 매진되어 증쇄를 거듭했고.
원화 전시회는 첫날에만 1만 명이 다녀가는 기염을 토해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기암성> 콘셉트 아트 전시회에 초청받은 고훈은 놀라서 눈을 깜빡였다.
“아저씨.”
“응?”
“저 못 할 거 같아요.”
고훈이 준비해 온 물감과 끝도 없이 이어진 대기 줄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휘트니 비엔날레에서 했던 사인회를 예상하고 찾아온 모든 사람에게 해바라기를 그려 줄 생각이었는데, 그렇게 했다간 당시 앙리 마르소처럼 될 것 같았다.
“하핳. 이름만 적어줘도 돼. 그림에 서명 남기듯이. 해바라기가 아니라도 좋아해 줄 거야.”
방태호의 말에 고훈이 망설였다.
미국 전역에서 찾아와 준 고마운 이들에게 이름만 적어준다고 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대체 얼마나 잘 된 거예요?”
“어마어마하게. 정말로.”
방태호가 힘주어 말했다.
“오늘 확인해 보니까 8억 달러 근처더라고.”
“8억 달러요?”
고훈이 입을 쩍 벌렸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지금 당장만 계산해도 대단하지. 제작비 2억 달러에 마케팅 비용 8,000만 달러였으니까 5억 2,000만 달러가 수익인데 보통 절반은 극장이 가져가.”
고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 절반. 그러니까 2억 6,000만 달러를 배급사랑 투자사, 제작사가 나눠 가지고. 중국에서는 원선이라고 극장조합 같은 곳이 조금 가져가기도 하고.”
방태호가 영화 수입 분배 비율을 자세히 설명했지만, 익숙지 않은 개념인 탓에 따라가기 힘들었다.
“그럼 저는요?”
“러닝개런티 비율이 0.5%였으니까. 아, 극장이랑 원선 수수료를 떼고 계산하는 거야. 잠깐만.”
방태호가 스마트폰을 꺼내 계산을 시작했다.
“63만 달러 정도 되겠네.”
혹시 파리에 갤러리를 지을 만한 돈을 벌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고훈이 조금 실망했다.
큰돈이긴 하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 있었다.
“거기에 아트북 매출액의 12%를 받기로 했는데 지금까지 31만 부 팔렸다고 알고 있거든?”
“네?”
고훈이 깜짝 놀랐다.
고훈과 콘셉트 아트 팀이 그린 원화를 300페이지에 꾹꾹 눌러 담긴 했지만, 한화 65,000원이나 하는 고가에 판매했기에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아르센 뤼팽의 매력에 빠진 이들이 <기암성>의 세계관을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을 몰랐던 것이었다.
“대충 24억 원 정도 벌었네.”
“…….”
“영화가 계속 잘되니까 여기서 멈추진 않을 거야. 게다가 원본은 네 소유니까 나중에 경매에 올릴 수도 있고, 가면처럼 대여해 줄 수도 있고.”
방태호의 말대로 개봉 3주 차를 앞둔 현재, <기암성>은 여전히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수익을 올릴지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다.
“신기하지?”
방태호가 미소 지었다.
“네.”
고훈은 길을 찾은 듯했다.
파리 시내에 개인 갤러리를 짓는다는 목표는 막연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와 같이 작품을 판매한다면 머지않은 미래에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으나, 과열된 경매 시장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조부 고수열과 방태호는 투기와 자금세탁이 일반적인 일이 아니라고 안심시켰으나, 고훈은 보다 많은 사람에게 다가가고 싶었다.
한 작품을 수억, 수십억 원에 판매하는 대신 전시회를 열어 더 많은 사람과 소통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는 큰돈을 벌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개인 방송과 영화, 다큐멘터리 제작 참여 등에 힘쓴 이유도 돈 많은 이들만이 참가하는 경매 시장에 의존하지 않고 수익을 올리기 위함이었다.
“고훈 작가님, 입장 부탁드립니다.”
직원이 다가와 사인회 시작을 알렸다.
상념에 빠졌던 고훈이 밝게 웃었다.
“다녀올게요.”
“파이팅!”
* * *
사인을 두 시간이나 했더니 꽤 지쳤다.
저번처럼 무리하지 않은 덕에 손이 아프진 않지만, 해바라기를 그려줄 수 없어서 조금이라도 길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진이 빠졌다.
호텔로 돌아와서 씻는 것도 잊은 채 침대에 누웠다.
신기하게도 몸은 이리도 힘든데, 마음만은 희망으로 가득하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충족감에 가슴이 뛴다.
휘트니 비엔날레 사인회에 찾아와 주었던 사람들이 이번에도 찾아와 주었다.
앤서니 화이트, 조슈아 밀러.
잊을 수가 없는데, 내가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뛸 듯이 기뻐해 주었다.
“훈아, 씻고 자야지.”
할아버지가 방으로 들어오셔서 벌떡 일어났다.
“할아버지.”
“음?”
“뉴욕에 와 주셨던 분이 오늘 또 와 주셨어요.”
할아버지가 빙그레 웃으셨다.
“그거 고마운 일이구나.”
“네. 그리고 태호 아저씨한테 기암성으로 얼마나 벌 수 있는지 들었어요.”
“꽤 되겠지. 얼마라고 하든?”
“지금까지 30억에서 31억 정도래요.”
“그렇게나?”
할아버지도 깜짝 놀라셨다.
생각해 보면 어머니, 아버지가 젊은 나이에 그렇게 큰 재산을 모으실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식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림 비싸게 파는 것만 답이 아니었어요.”
할아버지가 나를 지그시 보시더니 머리를 헝클었다.
“아빠랑 비슷한 말을 하는구나.”
“아버지도요?”
고개를 끄덕이신다.
“아마. 그림만으로 가능하진 않았을 거예요. 이야기가 붙고, 인물이 움직이고 그러니까 더 좋아하게 되고 더 알고 싶었던 거겠죠?”
“그렇지. 이야기가 가진 힘이란다. 훈이 너도 소설이나 드라마 좋아하잖니.”
“네.”
“그림이든 음악이든. 아니면 영화처럼 종합 예술이든 그것을 좋아하게 만드는 데에는 어떤 이야기가 필요해. 사연 있는 작품이 사랑받는 것도 그 때문이지.”
고개를 끄덕였다.
빈센트로 살 적에 그렸던 작품들이 수백억 원에 팔린 데 크게 충격받았었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빈센트 반 고흐로서의 삶이 작품 가격에 영향을 주었음을 이해했다.
그림 한 폭에 담긴 이야기.
그것은 작가의 일생이 될 수도 있었고 그림이 탄생하는 과정이 될 수도 있었다.
완성 이후 누가 가졌는지, 어떻게 알려졌는지도 이야깃거리였다.
사람들은 그것에 열광했다.
“돈 많은 사람이 비싸게 사 주길 바라지 않아도 돼요. 그러지 않아도 제 꿈을 이룰 방법이 있었어요.”
할아버지가 숨을 길게 내쉬고 씩 웃으신다.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어려운 길일지도 몰라. 자기 이야기를 하되 아주 재밌게 풀어내야 하거든.”
할아버지 말씀이 맞다.
만약 대중이 바라는 그림을 그린다면, 과거 귀족이 바라던 그림을 그렸던 때와 달라지는 건 없다.
나를 지키면서 내 이야기를 듣고 싶어지도록 해야 한다.
그런 일이 쉬울 리 없다.
“괜찮아요.”
그래도 그것이 내 꿈을 향한 길이라면 기꺼이 걸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