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34화
44. 없었는데요 생겼어요(2)
“미술반이 꼭 그림 그리는 법만 배우는 건 아니란다.”
“그럼요?”
“미술이 어떻게 시작되고 어떤 형태로 변화해 왔는지도 공부하고, 회화의 구조와 논리를 이해하는 시간도 있어. 미술이 사회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한 것도 배우고 글 쓰는 과목도 있단다.”
“글이요?”
“네가 말했듯이 미술도 대화의 일종이니까.”
내가 알던 아카데미 교육과는 다르다.
“미술 대학에 가면 좀 더 여러 가지를 배우지. 회화, 목공, 판화, 조소 같은 고전적인 예술도 배우지만, 사진이나 미디어를 활용한 기술도 공부할 수 있단다. 상호작용 예술도 북아트란 장르도 치료, 교육 등 미술은 정말 여러 곳에 활용되거든.”
“Interactif가 뭐예요?”
처음 듣는 단어를 언급하길래 물었다.
푸생 교장이 영어로 Interactive라고 말해주었지만 여전히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다.
양쪽 모두 합성어 같은데, 상호 간의 행동이라고만 이해해서는 감이 잡히지 않는다.
“말 그대로 실시간으로 영향을 주고받는 예술이야. 음악가의 연주에 무용수가 즉흥으로 춤을 추는 것도 상호작용이지.”
“같이하는 예술이네요?”
“그렇지. 행위와 행위가 만나는 거야. 예술가와 함께할 수도 있고 관객과 함께할 수도 있단다.”
“관객하고요?”
“음악 공연장에 가본 적 있어?”
고개를 저었다.
“음악가들이 정해진 연주를 하는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아. 관객들이 열렬히 반응하면 더 신나서 과감하게 연주하기도 하지.”
양쪽이 실시간으로 소통한다는 의미 같다.
미술로는 어떻게 활용하는지 알고 싶다.
“배우고 싶어요.”
푸생 교장이 고개를 끄덕이곤 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저 문을 나서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궁금하구나.”
가정교사가 꿈이 무엇인지, 목표는 무엇인지에 대해서 준비해 보라고 해서 그런 질문을 예상했는데 의외다.
“밥부터 먹고 싶어요.”
푸생 교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배고프거든요.”
“허헣. 맛있는 걸 먹어야겠구나.”
“어젯밤부터 플라미슈를 먹고 싶어서 어디가 맛있게 하는지 찾아봤어요. 뤽상부르 공원 근처에 있는 식당이 유명하던데 혹시 가보셨어요?”
고기와 부추, 치즈와 버터를 잔뜩 넣어 구운 타르트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잘 알지. 그곳 마루왈 치즈는 파리에서 제일이란다.”
현지인이 인정하니 믿을 만하다.
할아버지께 점심은 플라미슈로 먹자고 해야겠다.
“아주 훌륭한 점심이 되겠구나. 점심을 먹고 나선 뭘 하고 싶니?”
“영화 보러 가요.”
“영화?”
“기암성이란 제목인데. 콘셉트 아트를 그렸거든요. 오늘 개봉해요.”
“오오. 그거 재밌겠구나. 모리스 르블랑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거지?”
“맞아요.”
“훌륭한 점심에 환상적인 저녁이구나.”
“밤에는 포스터 만들 거예요.”
“포스터?”
“같이 그림 그릴 사람을 구하려고요.”
“좀 더 듣고 싶구나. 도움이 필요한 거니? 아니면 혼자 그리기 심심해서?”
“아니요. 혼자가 편하죠.”
“음?”
“여러 자극을 받고 싶어요.”
“자극이라. 조부나 앙리처럼 훌륭한 예술가가 곁에 있잖니.”
“미래 이모에게 들은 말인데 좋은 자극을 받는 것보다 다양한 자극을 받는 게 좋대요. 생각해 보니 맞는 말 같더라고요.”
“계속해 보렴.”
“포테이토 피자는 맛으로도 영양학적으로도 완벽한 음식이거든요. 특히 마르소네 포테이토 피자는 최고예요.”
“포테이토 피자를 좋아하는구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마르소네 포테이토 피자만 먹으면 언젠가는 익숙해지고 말 거예요. 익숙하고 편해지고 감흥이 없어질 테죠.”
“흠.”
“그러니 여러 매장에서 파는 포테이토 피자를 먹는 게 좋아요. 매번 새로운 즐거움을 찾을 수 있거든요.”
“허허. 그거 재밌는 말이구나.”
“그거 말고도 좋은 음식은 많아요. 조금 전에 얘기했던 플라미슈라든가 짜장면이라든가 삼겹살이라거나 새우살이라거나.”
푸생 교장이 고개를 갸웃한다.
그 맛있는 음식들을 모르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 짜장면과 삼겹살과 새우살을 설명하다 보니 시간이 다 되고 말았다.
“시간이 다 되었구나.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있니?”
“선생님도 같이 그림 그려보지 않으실래요?”
“내가?”
“언제든 환영할게요.”
* * *
면접을 마친 고훈을 배웅하고 돌아온 마고가 교실을 정리하고자 시험장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는 니콜라스 푸생을 보며 웃었다.
“어떠셨어요?”
“재밌는 아이더군요.”
“그렇죠?”
“음. 훌륭한 미식가였어요.”
마고가 눈을 깜빡였다.
니콜라스 푸생이 고개를 들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좋은 경험보다는 다양한 경험을 하고 싶다던데, 마고 선생은 어떻게 생각해요?”
창의력과 사고력은 정보와 정보를 잇는 일이었다.
영화, 게임 같은 종합 예술뿐만 아니라.
철학적 사고를 필요로 하는 양자역학의 세계, 인문학적으로 디자인한 전자기기, 감성을 건드는 치료 행위, 야구를 사회과학과 통계학으로 바라보는 등 고도로 발달한 기술과 문화는 과거에는 생경한 학문의 만남으로 탄생했다.
한 분야만 파고들어서 해결하지 못했던 것을 다른 학문에서 영감을 얻는 일이 잦아지며 복합, 융합의 중요성이 대두되었다.
“그 나이에 생각하기 쉽지 않은 일인데 기특하네요.”
푸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부도 같은 생각이었지요. 보통은 자식에게 좋은 음악, 좋은 그림만 보여주고 싶은 게 부모 마음인데 예술하는 분이라 그런지 생각이 다르더군요.”
니콜라스 푸생은 자식이나 학생에게 우아하고 고상한 것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을 부모나 교사의 욕심으로 생각했다.
부모의 좋은 것.
교사의 좋은 것을 강요하는 행동으로 판단했기에 학생이 가능한 많은 일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 과정에서 학생이 좋아하는 일을 찾으면 지적인 호기심을 채워주기 위해 최고의 환경을 제공하면서.
동시에 여러 지식과 문화,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유도했다.
‘모르는 게 있으면 안 돼.’
니콜라스 푸생은 오래전 앙리 마르소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며 슬며시 미소 지었다.
높은 곳에 올라선 사람은 모르는 게 없어야 한다던 앙리 마르소와 여러 사람과 함께하고 싶다는 고훈.
너무나 다른 두 천재가 어쩜 그리 가까워질 수 있었는지 흥미로웠다.
푸생은 고훈의 이름 옆에 Passe라고 적었다.1)
* * *
모리스 르블랑 원작.
크리스틴 노먼 감독의 영화 <기암성>이 전 세계 동시 개봉했다.
수많은 영화를 흥행시킨 거장이 스테디셀러로서 오랜 세월 사랑받은 소설을 다뤘고.
2억 달러의 제작비가 투입되었으며 인기 배우 토비 샬라메가 주연을 맡은 데다 미술계의 신성으로 떠오른 천재 고훈이 콘셉트 아트 매니저로 참여하는 등 <기암성>을 향한 기대치는 최고조에 도달해 있었다.
개봉일의 분위기를 느끼고 싶었던 탓에 시사회에도 참여하지 않고 영화관을 찾은 고훈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영화관을 가득 채운 사람들로 키가 작은 고훈은 사람들의 옷만 볼 수 있을 뿐이었다.
“할아버지.”
“음? 아이고. 미안해요.”
사람이 워낙 많은 탓에 서로 밀치고 발을 밟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다음에 볼래요?”
“뭐라고?”
“다음에 볼래요!”
“여기까지 왔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요.”
손자가 참여한 영화를 볼 수 있어 기대했던 고수열이 아쉬워했다.
그러나 고훈의 말대로 사람이 너무 많은 탓에 혹시나 어린 손자가 다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은 낑낑대며 겨우 영화관을 빠져나왔다.
주차장에서도 한참을 씨름하고 나서자 지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집에 가서 피자나 시켜 먹자꾸나.”
“좋은 생각이에요.”
고훈이 아쉬워하며 불평했다.
“상영관이 그렇게 많으면서 왜 두 곳에서만 하는 거예요?”
“여러 영화를 볼 수 있게 배려해서 그래.”
고수열이 다른 나라 영화관과 프랑스의 차이를 설명했다.
“돈이 많은 회사에서 만든 영화가 상영관을 독점하면 저예산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잖니.”
“아.”
“그래서 어지간하면 같은 영화관에서는 세 관 이상 사용할 수 없어. 독립 영화나 예술 영화를 보고 싶은 사람을 배려하는 거지.”
“보는 사람이 많은가 봐요.”
수익을 목적으로 운영되는 영화관이 상영관을 보장한다고 하니, 독립 영화를 보는 사람이 많으리라 생각했다.
“작품마다 다르지. 독립 영화라고 잘 안 되는 것도 아니고 상업 영화라고 잘 되는 건 아니야.”
“아.”
“그래도 한 사람이라도 보려고 한다면 자리를 마련해 둬야 한다는 게 방침이야.”
고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관이 손해를 보더라도 다양한 영화를 관람할 수 있게 상영관을 배분하니, 영화 제작사도 새로운 도전을 계속해 나갈 수 있을 터였다.
관객도 독립 영화와 거액을 투자받은 영화를 가리지 않고 영화를 그 자체로 받아들이니 다양성이 존중되는 나라로, 나아가 예술의 나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영화관에서 영화를 관람하지 못해 아쉬울 뿐이었다.
“처음이었는데.”
“음?”
“영화관에서 영화 보는 거요.”
“처음이라고?”
고훈이 고개를 끄덕이자 고수열이 깜짝 놀라 물었다.
“엄마 아빠랑 한 번도 안 가봤어?”
2년 전에 영화가 무엇인지 물어봤을 때는 기억을 잃어서 그렇겠거니 여겼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기억을 되찾은 손자가 영화관에서 영화 관람을 한 번도 못 해봤다고 하니 의아했다.
“뉴튜브로 지겹게 본 스펀지빵을 굳이 큰 화면으로 보고 싶지 않았어요.”
다시 태어나고 영화라는 문화에 대해 지식이 없을 때의 일이었다.
애니메이션이라면 TV와 태블릿, 스마트폰으로 충분히 볼 수 있는데 굳이 영화관에 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었다.
마침 고해성, 이수진 부부가 아들에게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 스펀지빵의 극장용 애니메이션이었던 것도 이유였다.
“그래도 그렇지. 엄마 아빠가 영화 일을 했는데.”
고훈이 어깨를 으쓱였다.
부모님이 제작에 참여한 영화를 보는 것보다 콘셉트 아트를 보는 게 더 재밌었을 뿐이었다.
“내일 아침엔 볼 수 있겠죠?”
“아무래도 평일 아침이면 지금보단 낫겠지. 표 있는지 한번 찾아보렴.”
고훈이 스마트폰을 꺼냈다.
제법 익숙하게 애플리케이션을 설치해서 내일 날짜로 <기암성>을 검색했다.
“첫 시간에 7표 남았는데 나머진 다 팔렸어요.”
“바로 사야겠구나.”
“제가 할게요.”
“할 수 있어?”
“시현이한테 배웠어요.”
<피의 낙인> 소설과 드라마를 결제하며 스마트폰으로 결제하는 방법에 익숙해진 고훈이 영화 티켓을 구매했다.
“샀어?”
“네. 사긴 했는데.”
고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원래 좌석을 못 고르는 거예요?”
“프랑스는 그렇더구나. 먼저 가는 사람 마음대로 앉을 수 있어.”
“아.”
고훈이 영화관에 사람이 바글바글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줄 서 있던 거였어요?”
“그렇지. 좌석 예매를 할 수 있으면 그렇게 복작거리지 않아도 될 텐데 말이다.”
인기 있는 영화는 좋은 좌석에서 관람하고 싶기에 사람들이 일찍 줄을 섰다.
주변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영화 상영 시간에 맞춰 상영관을 찾아도 되는 한국 영화관에 비하여 사람이 몰릴 수밖에 없었다.
“……전 그냥 볼 수만 있으면 어디든 괜찮아요.”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할지도 모른단 생각에 고훈이 못을 박았다.
* * *
1)passe(프): 통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