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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반 고흐-232화 (187/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32화

43. 죄와 벌(8)

“와주셨군요.”

데미안 카터가 고수열을 반겼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연락했으나 정말로 찾아와 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었다.

동경해 온 남자는 성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들어오시지요.”

고수열은 가방과 외투를 받아주려는 데미안 카터를 무시하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앉으시죠. 좋은 차가 있습니다.”

“되었네.”

데미안 카터는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려다가 멈칫했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는 개의치 않고 버튼을 눌렀다.

“파리로 이사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데미안 카터가 소파에 앉으며 물었으나 고수열은 대꾸하지 않았다.

물 끓는 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에 흐를 뿐이었다.

“참. 축하가 늦었군요. SNBA 살롱전 금메달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경황이 없다 보니.”

“왜.”

고수열이 데미안 카터의 말을 끊었다.

“왜 그랬나.”

노여운 주름 사이마다 묻어나오는 슬픔을 본 데미안 카터는 눈을 감았다.

“배가 고팠습니다.”

20년 전 일이 어제와 같았다.

“주머니를 털어서 베이글 두 개를 샀죠. 그날 하나를 먹고 다음 날에 반을 먹었습니다. 마저 먹어버리면 내일 굶어야 하니까요.”

“…….”

“사흘 굶으니 자존심이고 뭐고 없더군요. 파트 타임을 하던 가게 주인에게 가불을 부탁했습니다. 그 고약한 남자가 웬일인지 한 달 치 월급을 줍디다. 이제 장사를 접는다고. 그동안 고생했다고.”

탁-

커피포트 버튼이 내려갔다.

“어떻게든 빨리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방팔방 안 다닌 곳이 없었지만, 미술을 전공한 35살 남자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습니다.”

데미안 카터가 일어나 커피포트로 다가갔다.

“가난하다는 건 슬픈 일도 비참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두려운 일이었죠. 두려움 앞에 무력해지는 일이었습니다. 죽기를 그저 기다릴 뿐이었지요.”

그는 펄펄 끓던 물이 식기를 기다리며 찻잎을 덜어냈다.

“그러던 중에 제이 조플링을 만났습니다.”

고수열은 입을 굳게 다문 채 데미안 카터를 노려보았다.

“큰돈을 벌고 싶지 않냐고 하더군요. 그렇다고 하니 그 자리에서 1,000파운드를 주었습니다. 밀린 월세도 내고 식사도 하며 작품을 구상하라고요.”

데미안 카터가 다관에 뜨거운 물을 붓고 타이머를 맞추며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일주일 뒤에 다시 찾아와 어떤 작품을 만들 건지 묻더군요. 열심히 구상한 디자인을 보여주었죠. 해골에 빨간 유리를 붙인 작품이었습니다.”

<영원>의 초기 디자인이었다.

“그가 말하더군요. 이렇게 해서는 화제가 될 리 없다고. 좀 더 생각해 보라며 500파운드를 주고 갔습니다. 일주일 뒤에 다시 찾아오겠다고.”

데미안 카터가 차를 잔에 따랐다.

“생각나는 패턴은 모두 그렸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를 만족시킬 수 있을까 하고요. 백 개 정도 그려서 보여줬는데 고개를 젓더군요. 그는 100파운드를 주고 일주일 뒤에 다시 찾아오겠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기회를 주는 것 같았죠.”

고수열은 데미안 카터가 권한 차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겨우 찾아온 기회를 날릴 순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죠. 일주일간 잠을 뒤척이다가 문득. 정말로 문득 실제 사람의 뼈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데미안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제이 조플링은 아주 좋아했습니다. 기왕이면 장식도 유리가 아니라 진짜 보석으로 하자고 권했죠. 그럴 돈이 없다고 하니 며칠 사이에 600캐럿의 사파이어를 가지고 왔습니다. 한 달 뒤에는 후원인들을 소개해 주고, 사치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들이 무슨 짓을 저지르려 했는지 몰랐다고. 그리 말하고 싶나.”

“아니요.”

데미안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들이 저를 이용한다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걸 알고도 기꺼이 어울렸죠.”

“카터!”

고수열이 노성을 터뜨렸다.

부끄러움 하나 없이 범죄 사실을 전하는 데미안 카터가 정말 본인이 알던 사람이 맞나 의심스러웠다.

“부끄럽지도 않나!”

데미안 카터는 숨을 길게 내쉬곤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어떤 자신감 때문이었습니다.”

“뭐라고?”

“내가 인정받지 못하는 건 모두 마케팅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이름이 없어서 무시당하는 거다. 한번 알려지기만 하면 다들 내 작품을 알아볼 거다. 그런 생각이요.”

데미안 카터가 피식 웃었다.

“오만한 착각이었죠.”

어리고 미숙했던 과거를 향한 비웃음이었다.

“단 한 번. 단 한 번만이라도 누군가 제 작품을 사 주길 기다렸습니다. 다이몬 회원들이 무슨 짓을 해도 언젠가는 내 작품을 사 주는 사람이 나타날 거라고.”

고수열이 미간을 좁혔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어쩌면 제가 틀렸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케팅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나는 본래 성공할 그릇이 못 되었던 것 아닐까. 아니, 어쩌면 예술이란 것 자체가 허상이 아닐까. 마케팅이 전부가 아닐까 하고.”

“……내가 자네를 잘못 봤었군.”

“그런데!”

고수열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데미안 카터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마르소 군과 고훈 군이 나타나더군요. 작가의 명성에 기대지 않고 사랑받을 수 있다는 걸 증명하더군요.”

데미안 카터가 고개를 들었다.

“부러웠습니다.”

가슴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감정이 넘쳐흐르는 탓에, 데미안은 입술을 오므리고 침을 삼켰다.

“그리고 좌절했지요. 어쩌면 내가 틀렸는지도 모른다. 단지 내가 부족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마르소 군은 제 마음을 들여다보는 듯이 말했습니다. 억울하면 다시 해보자고.”

데미안은 혼란스러웠다.

앙리 마르소와의 경합에서 승리를 거둔다면 그것은 곧 제이 조플링이 이룬 카르텔의 승리였다.

평생을 꿈꾸었던, 갈망했던 예술가로서의 꿈이 한낱 마케팅에 부정당하는 결과였다.

반대로 패배하면 자신의 무능함이 증명되는 꼴이었다.

데미안 카터는 어느 쪽도 인정할 수 없었고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예전처럼.

늘 그래왔던 것처럼.

“고맙게도 마르소 군은 아주 멋진 작품을 가져와 주었습니다. 그런 작품이라면 받아들일 수밖에요.”

“카터.”

“정말 상냥한 친구 아닙니까? 덕분에 죗값을 치를 수도 있게 되었고. 이제는 제 새끼를 부수지 않아도 됩니다.”

제이 조플링의 요구로 파기했던 천여 점의 작품 모두 소중한 자식이었다.

“카터.”

“동정받고자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죄를 부정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

“부끄럽지 않냐고 물으셨지요. 그렇습니다. 만약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저는 같은 선택을 할 겁니다.”

데미안의 목소리가 조금씩 격앙되었다.

“돈이 필요했고. 관심이 필요했습니다. 제가 무얼 말하고 싶은지도 모르는 인간들이 제 작품을 찬양하는 걸 속으로 비웃으면서도. 저들이 제 작품을 봤다는 것 자체로 만족했습니다. 수만, 수십만 명에게 보인다면 그중에 한 명은 알아봐 줄 테니까!”

작품 활동을 이어갈 만한 여건도 없었다.

어렵사리 재료비를 모아 겨우 한 점 완성해도 전시할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더군요.”

부끄럽지 않았다.

도덕성조차 저버리고 발버둥 쳤음에도 극복할 수 없음에 비참했다.

“우습지 않습니까? 비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납득이 되더군요. 그래. 돌멩이를 금이라고 백번을 말한들 금이 되겠냐고. 단지 내가 모자랐을 뿐이라고. 이름에 속아 헛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는 만큼, 진짜 예술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는 거니까.”

“자네가 이리도 멍청한 줄은 몰랐네.”

고수열이 입을 열었다.

“마르소 군이 아니라 자네를 선택한 사람들은 모두 머저리란 말인가? 작품은 볼 줄도 모르면서 이름 때문에 자넬 선택했다고 보는가? 정녕 그리 생각해?”

“…….”

“아직도 모르겠어! 자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고수열은 화가 났다.

데미안의 과거는 동정했다.

그가 항상 미소 짓고 있었기에 끼니마저 굶을 정도로 고생하는지 몰랐다.

한 번이라도 물어볼 것을.

조금만 더 관심을 가졌더라면 좋았을 것을 후회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데미안의 행동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었다. 법적으로도, 본인 스스로에게도.

“자네 작품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미안하지도 않나? 스스로 죄스럽지도 않아? 자네가 저지른 일 때문에 자네를 동경했던 마음도, 직접 만든 작품도 부정된 걸 왜 모르나!”

고수열이 안타까움과 분노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그딴 짓을 할 거였으면 날 찾아왔어야지! 사장에게는 가불해 달라고 했으면서 내겐 왜 그리 말 안 했나! 그 정도로 절박했으면 도와달라고 했어야지! 내게 말하는 건 부끄럽고 그 짓거리 하는 건 괜찮았어?”

“…….”

“다시 그 상황이 와도 똑같이 할 거라고? 부끄럽지 않다고! 그러면서 자선단체는 왜 했나! 그러면 죄가 좀 씻길 줄 알았나!”

데미안 카터는 답하지 못했다.

“당당했으면 모조 사파이어는 왜 버렸어! 자네 사파이어를 그렇게 알아봐 주길 바랐나!”

고수열은 데미안 카터를 믿지 않았다.

그가 정말 부끄러움을 몰랐더라면 자선단체에 기부하지 않았을 터였다.

모조 사파이어와 서명이 남은 토끼 모피를 그리 허술하게 버리지 않았을 터였다.

가난했던 시절, 사파이어를 다룰 수 없어 익힌 유리 세공술로 일그러진 성화를 만들진 않았을 터였다.

가짜 보석으로 만든 작품에 <눈부신 삶>이라는 제목을 붙이지도 않았을 터였다.

데미안 카터는 고수열이 자신의 의도를 모두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목이 메었다.

자신을 이해하는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도 모른 채 무얼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었다.

‘그렇게 간절했다면 마르소가 화를 내는 이유를 이해해야죠. 달랠 게 아니라 사과하셔야죠.’

한 달 전.

고훈의 말로 균열이 간 마음이 끝내 무너지고 말았다.

고수열은 어깨를 들썩이는 데미안 카터를 내려다보다가 가져온 가방에서 그림 한 점을 꺼냈다.

“훈이가 그러더군.”

데미안 카터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앞에 꽃병에 든 붓꽃 한 송이가 놓여 있었다.

“자네가 진정 가난 때문에.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한 일이라면 동정한다고.”

“…….”

“하지만 자네만은 본인을 용서하지 않길 바란다고. 그동안 만들었던 작품 모두를 스스로 망쳤으니까. 설사 자네 팬 중에 몇몇이 자네를 용서하더라도 자네만은 그러지 않길 바란다고.”

데미안 카터가 주먹을 쥐었다.

“이건 훈이가 주는 선물일세.”

고수열이 돌아보지 않고 호텔 방을 나섰다.

고훈의 <붓꽃>을 보던 데미안 카터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꽃병에 놓인 붓꽃 뒤로 꽃밭에서 찬란히 빛나는 붓꽃들이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당신도 저들과 같이 아름다운 꽃이었다고, 그러나 다시는 밭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 * *

[자진해 귀국하는 데미안 카터, 모든 혐의 인정]

[공항에서 곧장 체포된 데미안 카터, “씻어낼 수 없는 죄를 지었다. 겸허히 받아들이겠다.”]

[제이 조플링은 어디로?]

[그 사장에 그 직원]

30일, 제이 조플링의 비서였던 에밀리 넬슨(37)과 수행원 톰 시몬스(33), 제이콥 그린(32)가 상파울루 구아룰류스 국제공항에서 체포되었다.

이들은 제이 조플링의 영국 계좌가 정지되자, 해외 계좌가 정지되기 전 도주 자금을 확보해야 한다며 제이 조플링을 설득해 1,200만 달러를 인출하여 도주 중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받을 예정이다.

한편 제이 조플링은 2주째 잠적하고 있다.

[제이 조플링 변사체로 발견]

4일, 로테르담 경찰서는 오전 7시 20분 에라스무스 대교 아래 변사체가 보인다는 신고를 받아 구급대와 함께 현장을 조사, 시신을 발견해 병원에 안치했다.

로테르담 경찰서는 소지품과 외견을 통해 변사자가 영국의 사업가 제이 조플링으로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영국 소더비와의 유착 관계로 불법 자금세탁, 탈세 혐의를 받고 있던 사업가 제이 조플링이 사망한 경위를 조사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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