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30화
43. 죄와 벌(6)
제이 조플링이 책상을 내려쳤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아르누보 공모전을 포함해 여러 전시회에서 여론을 조작해 온 제이 조플링도 이번만큼은 큰 힘을 쓰지 못했다.
여론은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치밀하게 쌓아야만 하는 일을 고작 한 달 만에 처리하기란 쉽지 않았다.
더불어 경합 시작 전부터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순 없었으니 제이 조플링에게는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임시방편으로 앙리 마르소의 인성을 문제 삼았으나 영국 내부와 몇몇 관계자 사이에서만 호응이 있을 뿐.
마르소 갤러리 총기 사건 이후 앙리 마르소의 주가는 최고조에 달한 프랑스에서는 이렇다 할 반응을 얻을 수 없었다.
데미안 카터와 앙리 마르소의 영향력이 적은 네덜란드는 말할 것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경합 당일, 그간 거래해 온 언론사와 전문가를 대동해 <앙리 마르소 002>를 비판하는 글을 쏟아냈지만 그조차 무의미했다.
사람들은 <앙리 마르소 002>와 <눈부신 삶>을 구경하고 즐길 뿐 어떤 기사가 나고 전문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두 작품을 볼 기회가 단 하루뿐이었기에 작품을 경험하고 주변 사람과 공유하기 바빴다.
‘처음부터 계산해 둔 거야.’
제이 조플링이 이를 갈았다.
장기전으로 이끌어야 여론전이 통할 텐데, 앙리 마르소는 그런 틈을 내주지 않았다.
기간도 조건도 장소마저 최악이었다.
네덜란드는 영국, 프랑스와 달리 미술시장이 크지 않았기에 문화예술이 융성한 국가임에도 불구.
제이 조플링은 데미안 카터의 활동 영역에 암스테르담, 로테르담 같은 도시를 포함시키지 않았었다.
활동한 적이 없었으니 그의 명성에 기댈 수도 없는 노릇.
영국의 팬들이 로테르담으로 간다고 한들 그 수가 많을 수 없었다.
곱씹을수록 철저히 계산된 일정이었다.
‘약삭빠른 놈.’
제이 조플링은 앙리 마르소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한 데미안 카터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저가 진짜 거장이라도 된 줄 아는 모양이지.’
초조했다.
공들여 만든 데미안 카터라는 브랜드가 무너질까 두려웠다.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제이 조플링이 고개를 저었다.
그가 끌어들인 후원자들은 크게 두 부류. 불법으로 획득한 자금을 합법화하고자 하는 이들이거나, 투기꾼이었다.
영국 소더비에서 구매한 거장 데미안 카터의 작품은 높은 세율을 감안하더라도 매력적이었다.
작품을 파기해 왔기에 사려는 사람은 많은 데 비해 작품 수는 많지 않았고 영국 소더비와 작전 세력 덕에 경매가는 매해 갱신되었다.
그 모든 것이 데미안 카터가 최고의 예술가였기에 가능했던 일.
오늘 경합은 단순히 앙리 마르소에게 패배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구매자들에게 데미안 카터가 더는 안전 자산이 아니게 됨이 문제였다.
“회장님, 회원들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안내해.”
제이 조플링은 그와 자레드 사치가 모은 후원단체 다이몬의 회원들이 찾아왔다는 말에 이를 갈았다.
‘승냥이 같은 놈들.’
그들 역시 오늘 일의 중대함을 알고 있기에 압박하러 온 것.
후원자들이 방으로 들어서자 제이 조플링이 초조함을 감추고 미소로 맞이했다.
“반갑습니다, 레밍턴 경. 해밀턴 회장과 존스 회장께서도 와 주셨군요. 왕 첸 씨도 오랜만입니다.”
제이 조플링이 두 팔을 벌렸지만 다이몬 회원들은 헛기침하여 불쾌함을 내비쳤다.
“반갑지 못하오.”
“하하. 무슨 일로 그리 언짢아하십니까.”
“몰라서 하는 말이신가. 오늘 일을 그르치면 어찌 되는지 잘 알고 계시겠지.”
“걱정하실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카터를 못 믿으십니까?”
“마르소 그 어린놈이 대놓고 경고하는 이유가 있을 것 아니오.”
“가정 교육도 제대로 못 받은 얼뜨기일 뿐입니다.”
“그 말을 어찌 믿어! 법 개정한다고 한 지 10년이 흘렀네. 매번 말뿐인 사람을 우리가 어찌 믿겠나!”
제이 조플링은 구매자들을 묶어두기 위해 자본이득세를 개정하여 세율을 낮추겠다고 약속해 왔었다.
세율이 낮아진다면 더 큰 차익을 낼 수 있으니 구매자들은 작품을 처분하지 않았고.
파는 사람이 없고 사려는 이들만 모이니 데미안 카터의 작품은 나날이 비싸졌었다.
“올해는 정말입니다. 걱정은 덜어내시고 오신 김에 편안히 즐기시다가 가시죠.”
제이 조플링이 직원에 손짓했다.
* * *
2029년 1월 20일 토요일 오후 7시 30분.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린 가운데 두 거장의 자존심을 건 경합이 발표를 앞두고 있었다.
투표는 보이만스 반 뵈닝겐 거장전을 직접 방문한 모든 이가 참여할 수 있었으며.
개표는 프랑스 국립 예술 협회(SNBA)와 영국 왕립 예술 협회(RSA)가 참관하는 가운데, 보이만스 반 뵈닝겐 미술관에 의해 진행되었다.
“친애하는 미술 애호가 여러분 반갑습니다.”
보이만스 반 뵈닝겐 미술관의 알렉산더르 더 모르 관장이 사회를 맡았다.
“영국과 프랑스 각국을 대표하는 예술가 두 분이 오늘 이곳 로테르담 보이만스 반 뵈닝겐 미술관에서 새 작품을 발표하셨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봐야겠지요? 데미안 카터, 앙리 마르소 씨를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청중이 열렬히 박수를 보냈다.
사회자를 가운데에 두고 왼쪽에 앙리 마르소가, 오른쪽에 데미안 카터가 섰다.
“먼저 데미안 카터 씨, 눈부신 삶이란 작품을 발표하셨는데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데미안 카터가 빙그레 웃곤 마이크를 잡았다.
“오늘은 어쩌면 제게 또 다른 삶이 시작되는 날일지도 모릅니다.”
그는 평소와 같이 차분히 이야기를 풀어냈다.
“저는 지금껏 보석과 죽음을 다뤄 왔습니다. 어떤 분께서는 죽음 앞에 무의미한 보석을 두어 낯선 이미지를 보여주었다고 말했고. 또 어떤 분께서는 죽음의 부정적 의미를 아름답게 재해석했다고도 말씀하셨죠. 이번에는 어떻게 보셨을지 궁금합니다.”
“실제 보석을 사용해 오셨는데, 오늘은 직접 세공하신 유리를 사용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멋진 작업이었죠. 제게 이런 재능이 있는 줄 알았더라면 유리 세공사가 되었을 겁니다.”
데미안 카터가 던진 농담에 청중이 작게 웃었다.
제이 조플링은 언짢은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그래. 큰 차이만 나지 않으면 어떻게든 무마할 수 있어.’
앙리 마르소에게 유리했다거나 하나의 작품이 작가의 전부를 말하진 않는다 등등.
일이 잘못되었을 때를 대비해 준비한 말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면 앙리 마르소 씨. 개벽으로는 두 번째 작품을 보여주셨습니다.”
알렉산더르 관장이 앙리 마르소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프랑스의 미술 영웅은 주변을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오늘 나와 같은 미래를 경험했을 거다.”
청중 대다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앙리 마르소는 흡족했다.
그에게 미술가란 세상을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자신만의 시선을 타인과 공유하여 세상에 없던 무엇을 현실로 끄집어내는 일.
그것은 행복일 수도 슬픔일 수도 아름다움일 수도 추악함일 수도 있었다.
그는 차마 말로는 못다 할 관념을 표현해내는 과정을 사랑했다.
“다른 말이 필요한가?”
앙리 마르소의 말에 알렉산더르 관장이 미소 지었다.
그 역시 앙리 마르소가 어떤 미래를 꿈꾸는지 깊이 이해했기에 사족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두 분 모두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무대 중앙에 스크린이 내려왔다.
“멋진 작품을 보여주신 두 분께 거듭 감사드리며, 오늘 경합의 결과를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알렉산더르 관장이 결과가 적힌 봉투를 들어 보였다.
“이곳에 어떠한 보상도 없이 자존심만을 건 경합의 결과가 들어 있습니다.”
앙리 마르소는 턱을 치켜든 채 서 있었고 데미안 카터는 평온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제이 조플링은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으며, 고수열은 의연히 결과를 기다렸다.
“총 37,901분이 제출해 주신 결과를 지금 확인하겠습니다.”
사회자가 봉투를 열어 결과를 확인했다.
믿을 수 없는 결과에 당황한 그는 고개를 돌려 결과지를 전달한 직원에게 확인을 구했고.
오류가 아님을 확인한 뒤에도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보이만스 반 뵈닝겐 거장전 결과. 발표하겠습니다.”
사회자의 목소리는 잔뜩 떨렸다.
“우승은. ……우승은 36,113표를 얻은 앙리 마르소입니다!”
발표와 동시에 스크린에 투표 결과가 나타났다.
보이만스 반 뵈닝겐 거장전
-앙리 마르소 VS 데미안 카터-
앙리 마르소
(프, 1995)
36,113표
데미안 카터
(영, 1975)
1,788표
기쁨도 희열도 아니었다.
보이만스 반 뵈닝겐 미술관을 찾은 이와 생중계를 지켜보던 시청자 모두 압도적인 격차에 경악하고 말았다.
“진짜야?”
발표를 중계하던 알렉스 우드가 놀라 혼잣말했다.
그 역시 앙리 마르소의 우세를 점치고 있었으나, 그동안 데미안 카터가 쌓아 온 명성을 무시할 순 없었다.
영국이 자랑하는 현대 예술가였으며 작품당 가격으로는 현존하는 예술가 중 가장 높은 가격에 거래되는 거장이었다.
그런 이를 상대로 전체 표의 95.2%를 쓸어 담을 거라고는 조금도 예상할 수 없었다.
제이 조플링도 마찬가지였다.
“……이익.”
상정해 두었던 최악의 상황을 한참 밑도는 결과였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커흠.”
불쾌한 헛기침에 제이 조플링이 고개를 돌렸다.
다이몬의 회원들이 당장에라도 제이 조플링을 찢어 죽일 듯 노려보았다.
그들을 이용해 왔던 제이 조플링은 핏기가 가셨다.
단순히 돈 많은 이들이 아니었다.
구매자의 절반은 범죄 단체에 연루된 이들이었으며, 그들의 원한을 사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 뻔히 알고 있었다.
“잠깐. 제 말 좀 들어보세요. 그래. 부정입니다. 저게 사실일 리가 없지 않습니까.”
제이 조플링이 당황해 그들을 붙잡았지만 소용없었다.
다이몬 회원들은 조플링의 손을 뿌리치곤 경고했다.
“이 일에 대한 책임은 확실히 져야 할 걸세.”
“일단 진정하시고. 자, 잠깐. 잠깐. 존스 회장?”
“다음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지.”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아, 왕 첸 씨. 왕 씨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영국 놈답게 멋지게 뒤통수를 치는구만.”
데미안 카터는 무대 위에서 구매자들에게 쩔쩔매는 제이 조플링을 보며 씁쓸히 웃었다.
영혼을 팔아서 얻었던 꿈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그는 눈을 감고 숨을 고른 뒤 앙리 마르소를 보았다.
턱을 들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젊은 예술가를 향해 미소 지었다.
“자네가 이겼네.”
* * *
[영국 미술계의 추악한 민낯]
영국 소더비 자금세탁에 관여
유령법인회사 통해 거래된 데미안 카터 작품
SNBA 셰바송 씨몽 회장 증언
영국 현대 예술을 대표하는 예술가 데미안 카터(54)가 영국 소더비와 담합해 경매가를 의도적으로 높인 정황이 포착됐다.
2010년 영국 소더비 경매에서 5,000만 파운드에 낙찰된 <영원>은 데미안 카터 신화의 시작이었다.
당시 무명 예술가였던 데미안 카터는 자레드 사치와 제이 조플링이 구성한 후원단체 다이몬의 후원을 받고 <영원>을 발표하였다.
당시 실제 사람의 두개골을 사용한 점과 20만 파운드 상당의 보석을 사용해 논란에 올랐던 <영원>은 치열한 경매 과정을 통해 제이 조플링 시그널워치 社 당시 부사장에게 판매되었다.
지금도 가난한 예술가가 미술계의 거장으로 발돋움한 작품으로 회자되는 <영원>은 지난 19년간 행방이 묘연하던 가운데 15일, 데미안 카터의 작업실에서 발견되었다.
[데미안 카터의 작업실 사진]
런던에 위치한 데미안 카터의 작업실에는 19년 전 판매되었던 <영원>과 함께 영국 소더비에게 높은 수수료를 약속하는 대가로 경매 시작가를 300만 파운드 이상으로 설정하자는 계약서가 있었다.
[영국 소더비와 데미안 카터의 계약서 일부]
당시 경매를 맡았던 경매사 피터 웨스트 씨는 현재 인터뷰를 거절하고 있다.
한편 데미안 카터의 작업실에는 유찰된 작품들의 잔해로 가득하여 의구심을 자아내고 있다.
(후략)
-김지우(예화)
보이만스 반 뵈닝겐 거장전 투표 결과가 발표된 직후.
김지우의 기사가 한국어, 영어, 프랑스어 세 개 언어로 작성되어 각종 포털 사이트에 등재되었다.
처음에는 조회 수를 목적으로 한 가십으로 여겼던 이들은 기사에 포함된 증거 사진을 확인하고 기함했다.
언론과 대중이 막 데미안 카터와 관련한 고발을 인지한 순간.
프랑스와 독일, 스위스, 미국 등 유력 일간지에 데미안 카터의 작품이 자금세탁 목적으로 거래되었단 기사가 속속들이 게시되었고.
각 국 주요 뉴스에서는 데미안 카터와 영국 소더비의 담합 사실을 속보로 전하였다.
거기에 영국 국세청이 데미안 카터와 제이 조플링, 영국 소더비가 탈세했다는 증거 자료와 고발장을 접수받았다고 알려지자 사태는 일파만파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