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26화
43. 죄와 벌(2)
아르센이 주먹을 쥐었다가 펴며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은 못 찾아.’
시간이 늦었다.
아이의 행동반경은 넓을 수 없으니 거리를 돌아다닐 시간에는 어떻게든 찾아볼 수 있었다.
단속을 피할 정도로 똑똑하다면 소매치기하는 장소를 옮겨 다닐 테지만 매일 그러진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일이 잘못되었을 때 도망칠 길과 숨을 곳을 미리 파악해 두는 소매치기의 습관 때문에 활동 장소가 여러 곳이긴 힘들었다.
만약 집단에 소속되어 있으면 활동 구역이 정해져 있을 테니 찾기에 더욱 수월할 터.
50파운드는 하루 할당치로 충분한 금액.
아마 상납하러 갔든, 본인만의 피신처에 있든 지금은 어느 한 장소에 머물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곳이 드러난 장소가 아니라는 점이 유일한 문제였다.
“…….”
800만 명이 넘게 주거하고 건물이 빽빽이 자리 잡은 런던에서 한 아이의 은신처를 찾기란 불가능했다.
아르센은 내일을 기약했다.
다음 날.
아르센은 버스 정류장 근처에서 인내심을 가지고 주변을 살폈다.
어제와 같은 모습이었다간 아이가 멀리서 확인하곤 도망칠 수 있었기에 오늘은 젊은 여성으로 변장했다.
길고 통이 큰 코트로 다리와 어깨, 몸선을 감추고 무릎을 살짝 굽혀 키를 조절했다.
가방은 잠그지 않고 느슨하게 메고 있어, 소매치기라면 노릴 수밖에 없도록 연기했다.
그러나 오전 내내 소년은 나타나지 않았다.
오라는 소년은 찾아오지 않고 휘파람을 부는 정신 나간 남자들에게 짜증을 느끼던 차.
멀리서 어제 만난 아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르센은 아이가 가방이나 안에 넣어둔 지갑을 훔칠 수 있도록 모른 척 딴청을 부렸다.
성공한다면 피신처로 향할 테니, 뒤를 밟아 차근히 모조 사파이어를 어디서 구했는지 물어볼 생각이었다.
거리에서 붙잡고 물었다간 주변의 이목이 쏠릴 것을 경계한 탓이었다.
툭-
아니나 다를까.
어제와 같이 아이가 일부러 몸을 부딪쳤다.
아르센이 깜짝 놀란 연기를 하며 뒤돌았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괜찮아?”
소년은 당황했다.
대부분 말은 하지 않아도 경멸 어린 시선을 보냈거나 심한 경우에는 욕설을 내뱉었다.
그런데 젊은 여성은 차분한 목소리로 안부를 물었다.
가방 속 지갑을 훔친 자신을 일으켜 세워주고 더러운 옷까지 망설이지 않고 털어주었다.
호의에 익숙하지 않은 소년은 느껴보지 못한 감정에 혼란스러웠다.
“왜 그래?”
아르센이 고개를 슬쩍 기울이며 다시 한번 물었다. 물건을 빼앗긴 걸 전혀 모른다는 순진무구한 표정이었다.
소년은 얼굴을 붉히다가 아르센의 가슴팍에 지갑을 밀어 넣었다.
“이, 이거 떨어져 있었어요!”
소년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가자 아르센이 당황했다.
지갑이든 가방이든 가지고 도망가야 조용한 곳으로 이동할 텐데, 설마 물건을 돌려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자, 잠깐만!”
아르센이 황급히 소년을 쫓았다.
* * *
스마트폰이 울렸다.
작업을 이어가던 앙리 마르소는 중요한 시간을 방해한 사람이 누군지 확인하곤 가위를 내려놓았다.
런던에 가 있는 아르센에게서 온 전화였다.
“얌전히 있어.”
앙리 마르소가 빠삐용에게 단단히 경고하고는 전화를 받았다.1)
“나야.”
-찾았습니다.
어제, 모조 사파이어가 어디서 났는지 추적 중이라고 보고 받았던 터라 아르센이 무엇을 찾았는지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수고했어.”
-정말 수고했습니다.
앙리 마르소가 눈썹을 찌푸리며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좀처럼 생색내는 법이 없던 아르센이 정말 수고했다니 무슨 일이 있었나 싶었다.
“무슨 일 있었어?”
-그게. 설명해 드리자면 깁니다.
아르센은 생각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젓곤 본론을 꺼냈다.
-카딩턴가 끝에 쓰레기 수거 차량이 모이는 장소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찾은 모양입니다.
왕!
“얌전히 있으랬지.”
앙리 마르소가 빠삐용에게 다시금 경고를 주곤 아르센에게 물었다.
“그게 왜 거기서 나와.”
-저도 그 점이 의아해서 살폈습니다만.
“살폈는데.”
앙리 마르소가 빠삐용의 털을 빗으며 재촉했다.
-여긴 분리수거 따위 안 하는 모양이더군요. 하나하나 찾아봐야 할 듯싶습니다.
아르센이 불평했다.
영국의 분리수거 문화는 환경미화원들도 포기한 단계에 이르렀는데, 모든 쓰레기를 한 봉투에 모아 버리는 게 일반적이었다.
쓰레기통이 구분되어 있어도 미화원들이 수거할 때는 한곳에 모아서 가져가는 터라, 모조 사파이어가 어떻게 쓰레기 수거 차량 집합지까지 왔는지 알아보기 힘들었다.
“사.”
앙리 마르소가 빗질하며 말했다.
-예?
“몰래 할 수 없다는 말이잖아.”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쓰레기 수거 업체를 사라고.”
-…….
아르센은 당황하다가 고용주가 본래 그런 사람이라는 걸 깨닫고는 수긍했다.
시에서 관할하나 위탁 업체가 있을 터. 그곳을 사들이면 일을 편히 처리할 수 있을 듯했다.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앙리 마르소가 반려견 빠삐용의 털 길이를 맞추었다.
마르소 가문의 일원이 지저분하게 다니는 꼴을 볼 수 없었기에 신중하게 빗과 가위를 놀렸다.
앙리 마르소가 사다 준 과자를 먹던 고훈은 얌전히 앉아 있는 빠삐용이 그저 신기했다.
“얌전하네요.”
앙리 마르소가 빠삐용에게 간식을 주었다.
“기다리면 간식을 먹을 수 있으니까. 똑똑한 거지.”
고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위질을 참아내면 맛있는 간식을 먹을 수 있다는 걸 반복 학습으로 깨달은 듯했다.
앙리 마르소가 빠삐용을 이리저리 살피곤 고개를 끄덕였다.
“됐어.”
빠삐용이 뒤돌아 올려다보자 앙리 마르소는 상으로 간식을 하나 더 주었다.
“아까 전화는 뭐였어요?”
“별일 아니야.”
“쓰레기 수거 업체 산다면서요.”
“그럴 일이 있어.”
앙리 마르소가 털을 털어내곤 말했다.
“앉아.”
고훈이 눈을 깜빡였다.
“뭐 하려고요.”
“몰라서 물어?”
앙리 마르소가 미용 가위를 들어 보이자 고훈은 기가 막혀 코웃음을 쳤다.
“웬일로 주나 했네.”
고훈이 손에 묻은 과자 부스러기를 털어내고 일어섰다.
앙리 마르소에게 머리카락을 맡길 순 없는 노릇이었다.
과자를 더 못 먹는 건 아쉽지만 이한나 작가가 보내준 한국 과자로 대체할 수 있으니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내일 아침 운동은 안 해도 돼.”
밖으로 나서려던 고훈이 멈칫했다.
“착각하지 말아요. 할아버지가 좋아하셔서 뛰는 거지 당신이 시켜서 하는 게 아니니까.”
고훈은 순간적으로 망설였던 자신을 내심 탓하며 분명히 선을 그었다.
집을 구할 때까지 며칠 신세질 뿐인데, 모든 일정을 관리하려고 드니 몹시 언짢았다.
“짜장면이라고 했나?”
앙리 마르소가 턱을 들었다.
“짜장면이 왜요.”
“파리에선 먹기 힘들지.”
“……먹을 수 있다고요?”
“앉아.”
굳이 답할 가치도 없었다.
돈으로 해결 가능한 일 중 앙리 마르소에게 불가능한 일은 없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고훈은 인상을 잔뜩 쓴 채 거울 앞에 앉았다.
“거짓말이면 가만 안 둬요.”
앙리 마르소가 고훈의 머리카락을 들어 올리며 이리저리 살폈다.
“다듬기만 해요. 다듬기만.”
* * *
쓰레기 수거 업체를 인수한 아르센은 한 수거 차량이 가져온 쓰레기를 의심했다.
반투명한 쓰레기봉투 아래 검은색 봉투가 들어 있어, 내부를 확인할 수 없었는데 주변에 털이 잔뜩 묻어 있었다.
봉투를 열어보니 여러 조각으로 잘린 동물 모피가 잔뜩 들어 있었다.
옷이라면 굳이 이렇게 조각내 버릴 이유가 없을 터.
아르센은 봉투를 완전히 뜯어 안에 든 쓰레기를 바닥에 흩뿌렸다.
‘진짜 털이잖아.’
인공 모피가 아니었다.
영국은 2000년도에 모피 농장 운영을 법으로 금지했다.
영국뿐만 아니라 동물보호단체의 입김이 센 유럽 사회 대부분이 모피 사용을 지양하는 추세였다.
당연히 인공 모피라고 생각했던 아르센은 당황했다.
‘토끼인가?’
모피 조각 하나를 유심히 살핀 아르센은 토끼 모피로 판단했다.
‘런던 한가운데에 진짜 모피를 다루는 공장이 있다고?’
위법 단체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아르센은 쉽게 납득할 수 없었다.
고민을 이어가던 차.
아르센은 아르누보 공모전에 전시되었던 데미안 카터의 <이별>을 떠올렸다.
토끼를 유리 상자에 포름알데히드로 박제한 작품이었다.
‘설마.’
데미안 카터는 분명 토끼가 자연사한 거라고 말했었다.
만약 살아 있는 토끼를 일부러 죽였다고 해도, 이렇게나 많은 모피가 나오진 않으리라 생각했다.
몇 번이고 다시 만들지 않고서는 이만한 모피가 나올 리 없었다.
“……아니지.”
토끼를 어디서 구했는가 또한 고려해 볼 법한 일.
아르센은 토끼 모피를 수거해 온 장소가 어딘지 추적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며, 쓰레기를 뒤적이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한 모피에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없는 뭔가가 그려져 있었다.
다만 모피가 조각 난 탓에 무엇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아르센은 모든 모피가 겹치지 않도록 펼치고는 퍼즐을 맞추듯 하나하나 이어보았다.
한 시간. 두 시간.
밤을 꼬박 새운 뒤 태양이 가장 높은 곳에 오르고 나서야 작업이 끝났다.
토끼는 모두 31마리였고 그중 두 마리에 D.Carter란 이니셜이 적혀 있었다.
데미안 카터가 자기 작품에 새겨놓는 서명을 확인한 아르센은 쓰레기 수거 차량이 다니는 동선 중 데미안 카터의 작업실이 있다고 확신했다.
지난 5주간 좀처럼 잡아낼 수 없었던 실마리를 찾아냈다는 생각에 성취감이 들기도 잠시.
도무지 데미안 카터에게 어떤 비밀이 있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가보면 알겠지.’
아르센은 한동안 31마리의 토끼 모피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 * *
1)Papillon: 나비.
본래 명칭은 컨티넨탈 토이 스패니얼. 그중 귀가 위로 솟은 견종을 그 모습이 나비를 닮았다고 하여 빠삐용이라고 부른다.
한국으로 치면 진돗개 품종인 반려동물에게 진돗개란 이름을 지어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