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25화
43. 죄와 벌(1)
해가 바뀌어 2029년 1월 3일.
고수열이 데미안 카터와 관련한 일로 앙리 마르소를 찾았다.
방태호를 통해 알아본 바를 전하며 1987년, 뉴욕 소더비에서 앨런 본드가 <붓꽃>을 낙찰받은 일을 덧붙이였다.
“어찌 생각하나.”
“의심하고 있습니다.”
앙리 마르소가 테이블을 세 번 두드려 화면을 띄웠다.
프랑스 사법권 밖의 일이라 아르센을 통해 사건을 개인적으로 조사하던 앙리 마르소는 그간 보고 받은 자료 중 일부를 고수열에게 보여주었다.
“흐음.”
고수열이 신음했다.
“데미안 카터의 물건을 구매한 사람 중 17명이 영국 소더비에게 융자를 받았습니다.”
앙리 마르소는 데미안 카터의 작품을 굳이 물건으로 표현했다.
“가격을 높이기 위해선가.”
고수열은 눈 앞에 펼쳐진 사실을 좀처럼 믿을 수 없었다.
데미안 카터가 작품 낙찰가를 높이고자 경매장과 손을 잡고 이런 일을 벌였을 거라니.
믿고 싶지 않았다.
“근본적인 이유는 아니죠.”
“아니라고?”
“소비자신용법이라고 아십니까.”
고수열이 고개를 저었다.
앙리 마르소가 테이블 스크린을 조작해 영국의 소비자신용법을 검색했다.
1854년에 이자제한법이 폐지되었단 내용이 함께 표기되었다.
“이자제한을 폐지하는 법이 있었습니다.”
“이자제한을 폐지하다니. 이자에 상한선이 없단 말인가?”
앙리 마르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수열은 영국 같은 선진국에 대출 이자에 상한선이 없다는 말을 믿기 힘들었다.
“74년에 과도한 신용거래를 규제할 근거를 마련하긴 했지만 실효성이 없었죠.”
“그런 악법이 어떻게 남아 있단 말인가.”
“06년에 개정이 들어갔습니다만, 채무자나 할부구매자가 영업을 목적으로 체결한 25,000파운드를 넘는 신용계약이나 할부구매계약은 규제 대상에서 면제되었습니다.”
앙리 마르소는 이자제한법을 다시 제정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고 설명했다.
“큰 거래일수록 규제가 되어야 하지 않나?”
“영국 놈들이 언제는 제정신이었습니까?”
고수열은 영국이나 프랑스나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으나 굳이 불필요한 말을 섞지 않았다.
“그래서. 그것과 카터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나.”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앙리 마르소가 케일 주스가 든 잔을 돌렸다.
“데미안 카터가 만든 것을 영국 소더비가 비싸게 팔고 그걸 사치 갤러리와 일부 재력가가 굳이 융자를 받으면서 산다. 그런데, 그 이자에 제한이 없다.”
“…….”
“이 비정상적인 거래 관계에서 누가 이득을 볼까. 궁금하지 않습니까?”
“영국 소더비인가?”
앙리 마르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영국 소더비가 가장 큰 이득을 보게 됩니다. 물건을 비싸게 팔았으니 수수료도 그만큼 챙길 테고, 거기다 이자까지 받아 챙기니까.”
영국 소더비가 사치 갤러리나 카터의 후원자들에게 얼마나 많은 이자를 챙기는지는 사적인 영역이라 알 수 없었지만, 영국 법을 고려하면 상당한 금액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두 번째로 이득을 보는 사람은 데미안 카터죠. 자기 물건이 비싸게 팔리니까.”
고수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세 번째. 사치 갤러리와 제이 조플링 같은 인간들은 왜 그런 손해를 보면서까지 데미안 카터의 물건을 살까.”
앙리 마르소가 케일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그 궁금증을 해결해 준 게 영국의 소비자신용법입니다. 많게는 수십억 파운드의 자산을 가진 사람들이 왜 불합리한 융자를 받으면서까지 데미안 카터의 물건을 샀을까. 그들에게 데미안 카터의 물건이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겠죠.”
수집가의 욕심이라고 생각하기엔 과정이 너무나 수상했다.
“토막 낸 상어 따위를 누가 갖고 싶어 하겠습니까.”
앙리 마르소는 데미안 카터의 물건 따위에 미적 가치가 없다고 단정하며 말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정말 손해를 봤을까 하고.”
고수열은 데미안 카터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적도, 감동한 적도 있었기에 앙리 마르소의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다만 진실을 알고 싶었다.
“거액을 융자받아야만 하는 다른 이유가 있다는 말이군.”
고수열의 지적에 앙리 마르소가 동의했다.
“쓸데없는 일에 돈을 퍼붓는다면 하나밖에 없죠.”
“……역시 자금세탁인가?”
앙리 마르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한 많은 자금을 합법화하고 싶었을 겁니다. 절반. 아니, 10%라도 건지면 이득이니까요.”
고수열이 고민을 길게 이어가다가 입을 열었다.
“그들이 카터의 작품을 진정 소유하고 싶었을지도 모르지 않나.”
“그럴 리는 없겠지만 가능성을 열어두고 생각하면, 데미안 카터와 영국 소더비의 담합으로 사건이 끝나겠죠.”
설령 사치 갤러리와 카터의 후원자들이 데미안 카터의 작품을 소유하길 바랐어도, 데미안 카터와 영국 소더비는 책임을 회피할 수 없었다.
“하나 더. 자금을 세탁하려고 했다면 다시 되팔아야 하지 않나. 거래된 작품이 시중에 다시 나온 경우는 드물다고 했으니 앞뒤가 맞질 않네.”
“조심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요.”
“다른 이유?”
앙리 마르소는 아직 특정할 수 없다는 뜻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찾아낸 조각을 엮는 과정이니 모든 가능성을 열어둬야 합니다. 영국 소더비와 낙찰자 사이의 계약서 같은 더 확실한 증거가 나오면 확실해지겠죠.”
고수열은 괴로웠다.
데미안 카터를 향한 신뢰는 이미 무너져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믿고 싶은 마음만이 남았기에, 이성적으로 접근할수록 가슴이 옥죄였다.
“만약 그렇게 산 작품이 시중에 나오지 않는다면 작품을.”
고수열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장물을 처분하는 곳이 따로 있지 않겠나.”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고수열은 숨을 길게 내쉬고는 과거를 입에 담았다. 괴로워도 명백히 밝혀야만 하는 일이었다.
“내 예전 그림을 소유한 사람을 역조사하면 꼬리가 잡히지 않겠나?”
앙리 마르소가 미간을 좁혔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많을 리 없고. 같은 사람은 아니라도 서로 알진 않겠나.”
“누굽니까.”
“이반 모로조프.”1)
경매장에서 낙찰한 금액만 50억 달러에 이른다는 러시아의 대부호였다.
“그 사람이 사라졌던 내 그림을 가지고 있네.”
“확실합니까.”
“얀센이 그와 친분이 있거든. 일전에 그의 집에서 봤다고 얘기했었네.”
앙리 마르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마르소 가문의 비서 아르센 르블랑은 앙리 마르소의 지시로 한 달째 데미안 카터와 영국 소더비, 사치 갤러리를 조사하고 있었다.
제1목표는 영국 소더비에서 데미안 카터의 작품을 거래한 계약서.
조건이라도 알아보기 위해 부유한 노인으로 변장해 직접 경매에 참석하기도 했지만, 뉴 테이트 모던 갤러리가 그랬듯 항상 상위 입찰이 들와 실패했다.
‘이런 방식으로는 어려워.’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내부로 침입할 수 있었다.
10년의 공백이 있었지만 유능한 도둑이었던 그는 영국 소더비 건물 평면도를 입수하고 경비원들의 순찰 동선을 확인하는 등 필요한 모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다만 앙리 마르소가 법에 저촉되는 행위를 금했기에 참을 뿐이었다.
아르센 르블랑은 고용주의 까다로운 주문에 고민했다.
미행조차 적용법이 모호하여 간신히 가능한 정도였기에,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아르센은 데미안 카터의 작품이 영국 소더비로 들어오고 나갈 때를 노릴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카터 작품이 운반되는 걸 노려야 하나.’
데미안 카터의 작품은 일주일 뒤에 경매에 오를 예정이었고, 아르센은 남은 시간을 주요 인사들이 누구를 언제 어디서 만나는지 정도만 감시하고 있었다.
“아.”
버스 정류장에 서서 맞은편 건물을 감시하던 아르센이 앳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넘어진 아이가 다급히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앞을 보지 못하고 부딪힌 듯 연기하는 게 제법이었다.
아르센은 무릎을 구부려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곤 인자하게 웃었다.
“괜찮니?”
“네.”
아르센이 볼이 빨간 아이의 옷을 툭툭 털어주곤 지갑을 꺼냈다.
아르센의 주머니에서 지갑을 훔쳤던 아이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뛰지도 못할 것 같은 할아버지가 언제 지갑을 가져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노인으로 변장한 아르센이 50파운드짜리 지폐를 꺼내 주었다.
“연기는 제법이지만 손기술은 더 연습해야겠다.”
자존심이 상한 아이가 입을 잔뜩 내밀고 아르센을 노려보았다. 아르센이 돈을 가져가라는 뜻으로 한 번 더 권하자 낚아챘다.
자존심 때문에 받지 않을 수도 있거늘.
아르센은 창피함을 무릅쓰고도 돈을 챙기는 아이에게서 예전 자신을 떠올렸다.
“조심히 들어가려무나.”
아르센이 미소를 보이며 손을 흔들자 도망치듯 뛰어가던 아이가 멈춰 섰다.
아르센이 한 번 더 손짓해 가라고 하니 돌아와 주머니를 뒤졌다.
“……이거 줄게요.”
아이가 내민 손 아래 손바닥을 펼쳤다. 확인해 보니 푸른 보석이었다.
“그거 산 거예요. 나중에 딴말하지 말아요.”
돈을 돌려주려고 하나 싶었던 아르센은 피식 웃곤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보석일 리는 없었다.
“그래. 아주 예쁜 보석이구나.”
소년은 시선을 어디로 둬야 하는지 몰라 망설이다가 뒷걸음질 치더니 골목으로 들어갔다.
아르센은 손에 들어온 보석 조각을 살폈다.
‘낯익은데.’
소년이 준 물건은 언뜻 보면 보석 감정에 익숙한 아르센도 사파이어로 착각할 만큼 잘 만들어진 모조품이었다.
‘이런 걸 어디서 났지.’
아르센은 피식 웃으며 어디선가 훔치거나 주웠으리라 생각하곤 그것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는 다시 영국 소더비 건물을 지켜보다가 눈을 크게 떴다.
황급히 모조 사파이어를 꺼낸 아르센은 몇 번 더 살피고는 곧장 머물던 호텔을 찾았다.
‘설마.’
방에 들어선 아르센은 소년이 준 모조 사파이어를 자세히 살폈다.
불을 비춰 보기도 했고 돋보기로 내외부를 자세히 관찰했다.
그 결과 세공 방식이 지금은 행방이 묘연한 <영원>에 사용된 사파이어와 동일했다.
과거 도둑으로 활동했을 때 목표이기도 했던 탓에 알아볼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아르센 르블랑은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단지 우연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무엇인가 있다는 육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더 늦기 전에 소년을 찾아야만 했다.
* * *
1)실존 인물 이반 모로조프의 이름을 차용했을 뿐, 소설 속 내용이 사실과 다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