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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반 고흐-223화 (178/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23화

43. 아이리스(3)

대니얼 스콧은 비로소 마지막 퍼즐 조각을 찾은 것만 같았다.

‘이거야.’

사랑하는 화가의 일대기를 다루게 되어 벅찼던 만큼 압박감에 시달렸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은 탓에 기준을 명확히 하기 어려웠다.

처음에는 여러 이야기를 취합해 보고자 했다.

자기 귀를 자른 미치광이.

비운의 화가.

현대적 예술의 시작을 알린 거장.

이미 너무나 많은 사람이 화가 빈센트 반 고흐에 관련해 다양한 이야기를 했었다.

그것을 정리하여 소개하는 일도 분명 의미 있는 일이었으나, 대니얼 스콧은 하나 더 추가하고 싶었다.

화가 빈센트 반 고흐에 관련한 이야기는 많으니, 인간으로서의 그를 조명하고 싶었다.

그가 왜 위대한 화가인지 말하기보다는 그가 왜 그렇게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는지 말하고 싶었다.

다만 어찌하면 효과적으로 영상에 담아낼 수 있을지 고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마틴 얀센의 추천을 받아 고훈을 알게 되었고, 소년은 대니얼 스콧의 바람을 완벽히 실현해 주었다.

<빈센트>의 감독이 고훈에게 다가갔다.

“훌륭했어.”

고훈은 한결 부드러워진 말투에 짐짓 의아해했다.

“4부는 아를을 둘러보며 인터뷰를 담을까 했는데, 괜찮다면 함께해 줄래?”

대니얼 스콧의 정중한 태도에 고훈은 잠시 고민했다.

이후 일정이 크게 없거니와 그러지 않아도 오랜만에 찾은 아를을 둘러보고 싶었기에 큰 문제 없을 듯했다.

“매니저하고 상의하고 말씀드릴게요.”

대니얼 스콧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훈이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려 고수열과 방태호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가자, 마틴 얀센이 슬쩍 다가왔다.

“어떤가?”

대니얼 스콧이 고개를 돌렸다.

마틴 얀센은 흡족하게 웃고 있었다.

“왜 사랑받는지 알 것 같습니다.”

“호오. 왜 그런가.”

“다들 반 고흐를 말할 때 광기, 우수, 애잔함, 죽음 같은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그 또한 반 고흐의 일부지만 간과하는 사실이 있죠.”

마틴 얀센이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했다.

“저 소년은 그걸 잘 알고 있습니다. 깊이 이해한다고 할까요. 상황이라든지 감정이라든지.”

“음.”

“덕분에 더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겠습니다.”

마틴 얀센이 씩 하고 웃었다.

“기대하겠네.”

얀센은 돌아서려다가 깜빡했던 일을 떠올리곤 멈춰 섰다.

“자네 덕에 출연료가 더 나가게 생겼어. 확실하게 해야 할 거야.”

“물론이죠.”

* * *

“이렇게나 많이요?”

추가 계약을 맡기고는 할아버지와 주변을 산책하고 돌아오니 방태호가 말도 안 되는 조건을 가져왔다.

이틀간의 추가 촬영분에 대한 출연료는 70,000유로로 기존 10,000유로와 합하면 한화 1억 원이 넘었다.

계약서를 받고 깜짝 놀라 방태호와 마틴 얀센을 번갈아 봤다.

“이 정도는 받아야지. 아르누보 공모전에서 준우승한 스타인데.”

방태호가 믿음직스럽게 웃었다.

일전에 <기암성> 계약 때도 그렇고, 뉴 테이트 모던 계약 건도 그렇고 매번 생각지도 못한 조건을 가져온다.

기존 계약과 달리 한 회 출연분이라고는 해도 아무런 준비 없이 고작 이틀 더 촬영할 뿐인데 70,000유로라니.

이래도 되나 싶다.

“괜찮아요?”

마틴 얀센에게 다시 물으니 호탕하게 웃는다.

“하핫! 이 녀석아, 수백만 달러씩 받는 녀석이 이 돈은 많아 보여?”

경매가 지나치게 과열되었던 것뿐이다.

지금도 나는 <서리 밀밭>이 정말 1,400만 달러나 받을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다.

<해바라기>도 마찬가지.

당시에는 정말 어떻게든 비싸게 팔아야 한다는 생각에 200만 유로를 불렀지만, 물가와 평균적인 임금을 인지한 지금 돌이켜보면 말도 안 되는 금액이었다.

내 그림에 푹 빠진 앙리 마르소가 아니었다면 씨알도 안 먹힐 제안이었다.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거니 아무 걱정 안 해도 돼.”

얀센이 머리에 손을 얹었다.

걱정이 아니다. 낯섦이다.

예술은 작가와 관객이 함께 이루는 일.

분명 그리 생각할진대 그들이 정한 금액이 당황스러운 건 지금의 나로서는 어쩔 수 없나 보다.

내가 생각하는 내 그림의 가치와 저들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일 테지만 감사하면서도 낯설다.

어쩌면 나는 작품을 비싸게 팔고 싶었던 게 아니라, 사 주는 사람이 있는 것 자체를 바랐던 게 아닐까.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내 마음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자, 시간도 늦었고. 식사부터 하자고. 기가 막힌 곳이 있으니까.”

마틴 얀센이 호기롭게 앞장섰다.

그러고 보니 저녁 먹을 때가 지났다. 말을 계속했더니 평소보다 훨씬 더 시장하다.

그의 차를 타고 이동하자 곧 익숙한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

처음에는 어둡기도 하고 너무 달라진 모습에 알아보지 못했는데 생 트로핌 교회에 이르니 옛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여전하구나.’

빛바랜 벽돌과 코린트 양식을 연상시키는 기둥과 조각상.

정겹기까지 한 낡은 목재 문까지.

옛 모습 그대로다.

여기서 우측 골목으로 들어가면 고대극장 터가 나오고 거기서 조금만 더 걸어 들어가면 원형 경기장이 있다.

원형 경기장에서는 내가 살던 노란 집까지 10분도 채 안 걸린다.

‘아쉽네.’

반 고흐 미술관의 케빈이 노란 집은 전쟁통에 무너졌다고 알려주었다.

마틴 얀센의 안내를 받아 계속 걸었다.

“이쪽으로 가면.”

“오. 아는 거냐?”

모를 리가 없다.

<아를 포룸 광장의 카페 테라스>를 그렸던 장소가 나온다.

설마 하며 계속 걷자 마치 140여 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LE CAFÉ LA NUIT

노란색 테이블보와 의자.

노란색과 녹색이 섞인 벽면과 천막이 눈에 들어온다.

천막에는 녹색 글씨로 ‘밤의 카페’라고 적혀 있고 벽면에는 내 이름을 자랑스레 써 두었다.

푸른 밤을 밝히는 커다란 가스등과 그 위로 별이 빛나는 밤하늘.

내가 느꼈던 그때의 카페다.

“세상에.”

“멋지지? 아를 포룸 광장의 카페 테라스. 지금도 그때 모습 그대로 영업 중이야.”

마틴 얀센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얀센이 인수한 거예요?”

“8년 정도 되었지. 음식 맛이 영 아니라서 다 갈아엎었어.”

내가 살던 때도 커피 맛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처럼 인수해서 이것저것 고친 모양이다.

“그럼 저 벽도 얀센이 칠했어요?”

원래 이곳 카페 벽은 내가 <아를 포룸 광장의 카페 테라스>에서 표현했던 것처럼 레몬색이 아니었다.

“그건 아니고. 90년대에 복원 공사를 했거든.”

“반 고흐가 그린 장소라고 해서 찾아와 봤는데 전혀 다르니까 실망해서 똑같이 칠했대.”

마틴 얀센과 방태호가 번갈아 가며 설명해 주었다.

가로등과 별빛으로 빛나는 모습을 극적으로 표현하고자 칠했던 색이 지금은 현실로 이뤄지다니.

신기한 일이다.

“자, 추천 메뉴가 있으니 그걸로 하자고.”

오베르 쉬르 우아즈 라부 여관에서도 추천을 받았었다.

내가 직접 먹었던 식단을 소개해 주었는데, 무척 맛있었던 터라 이번에도 얀센의 추천에 따랐다.

늦은 시간이라 손님이 적은 덕인지 음식은 금방 나왔다.

“할아버지, 이거 드셔 보세요.”

“그래. 그래. 먹고 있다. 먹을 만해?”

“맛있어요. 합.”

늦은 저녁 식사를 즐기던 차, 묵묵히 포크를 움직이던 대니얼 스콧 감독이 말을 걸었다.

“붓꽃이 지금 어디에 있는 줄 알아?”

고개를 저었다.

“말리부에 있어.”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서쪽에 있다고 한다.

그곳에 세워진 J. 폴 게티 미술관이란 곳에서 전시되고 있다고.

“개인이 산 걸로 알고 있었어요.”

아주 비싼 가격에 팔렸다고 들어서 수집가가 개인 소장하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전시되고 있다니 기쁘다.

“사정이 복잡해.”

대니얼 스콧이 뜻 모를 말을 꺼내 고개를 갸웃하니 방태호가 대신 나섰다.

“가격 감정 문제였죠?”1)

대니얼 스콧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정 문제라뇨?”

“폴 게티 미술관이 붓꽃을 사려고 하기 전에 앨런 본드라는 사람이 소유하고 있었거든. 얼마에 팔렸더라.”

“5,390만 달러. 1987년 당시 최고가였지.”

마틴 얀센이 반 고흐 재단 이사장답게 거래 가격을 바로 알려주었다.

다시 들어도 어마어마한 수치다.

대니얼 스콧이 설명했다.

“우습게도 앨런 본드는 50억 달러의 빚이 있었어. 능력은 없으면서 경매장이란 경매장은 전부 들쑤시고 다닌 놈이지.”

“……빚이 50억 달러였다고요?”

대체 무슨 짓을 하면 80년대에 50억 달러의 빚을 질 수 있는지 모르겠다.

“아니. 그런데 어떻게 산 거예요?”

50억 달러나 빚졌으면서 5,390만 달러에 그림을 사겠다고 나섰더니 대체 무슨 신경인지 알 수 없다.

“뉴욕 소더비가 2,700만 달러를 빌려줬지.”

이건 또 무슨 말이지?

“경매장이 돈도 빌려줘요?”

“가격을 높이기 위한 수작이었지.”

“…….”

“반 고흐가 남긴 고결한 메시지를 더럽힌 거야. 뉴욕 소더비도, 앨런 본드도.”

황당해서 말이 안 나온다.

할아버지도 당시 일을 기억하시는지 입을 여셨다.

“국제화랑가에서도 가만있지 않았단다. 작품 가격을 올리려고 구매자와 경매장이 담합했다고.”

충분히 그럴만한 일이다.

“아.”

방태호가 들썩였다.

“선생님. 혹시…….”

할아버지도 방태호와 시선을 마주하더니 다소 당황하신 눈치다.

“무슨 일 있어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할아버지와 방태호가 뭔가를 숨기려는 듯 고개를 젓고는 애꿎은 파스타만 빙빙 돌렸다.

“그렇게 한번 가격이 올라가니 3년 뒤 1990년에 폴 게티 미술관에서 다시 사려고 했을 때는 잔뜩 불어난 가격인 5,300만 달러에 살 수밖에 없었지.”

빚을 지고 있던 앨런 본드가 그림 가격을 지불하지 못하게 되자 유찰된 <붓꽃>을 다시 판매했는데 그전 가격으로 판매했단 뜻이다.

돈을 빌려주고 더 비싸게 책정했던 가격 그대로.

가격 감정에 문제가 있었다니 이런 일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19세기에서도 편법은 많았지만 부당한 이득을 취하려는 이들의 행동은 정말이지 창의적이다.

“천박한 놈.”

마틴 얀센이 앨런 본드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결국 마네의 산책을 거래하다가 사기를 쳐서 실형을 받았지. 인생 전체가 사기였어.”

대니얼 스콧이 왜 사정이 복잡하다고 말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얀센 이사장님의 말씀처럼 천박한 놈들 때문에 더럽혀진 붓꽃이 오늘 네 설명으로 명예를 되찾은 것 같아.”

“아.”

“정말 고맙다. 반 고흐도 네게 고마워할 거야.”

신경질적인 인상의 남자가 작게 웃었다.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따라 웃었다.

“감독에게도 감사할 거예요.”

진심이다.

* * *

1)고흐「붓꽃」감정가 6천만 불, 중앙일보, 1990년 4월 10일,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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