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22화
43. 아이리스(2)
“깐깐해 보이네요.”
방태호가 제작진과 대화 중인 대니얼 스콧을 보며 말했다.
스태프들은 잔뜩 긴장한 채 감독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뭐 만드는 사람치고 성격 좋은 사람 드물지 않은가.”
고수열이 껄껄 웃으며 대꾸했다.
이젤과 의자를 옮기는 스태프들 사이에서 물감과 붓을 준비하는 손자가 그저 귀엽고 기특할 뿐이었다.
방태호도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슬쩍 이야기를 꺼냈다.
“일전에 말씀하셨던 일 말입니다.”
“음.”
한국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지만 방태호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앨런 관장에게 슬쩍 물어보니 데미안 카터 작품은 못 산다고 합니다.”
고훈과 <가면>을 전시하기로 계약한 뉴 테이트 모던 갤러리의 마커스 앨런 관장이 한 말이었다.
앙리 마르소에게 데미안 카터의 이상 행동을 전해 들었던 고수열이 미간을 좁혔다.
“못 사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항상 상위 입찰이 들어와 부담스럽다고 하더군요. 워낙 가격이 높이 형성되어 있어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는 모양입니다.”
전시품 확보에 적극적이고 재정도 풍족한 뉴 테이트 모던 갤러리마저도 부담스러워한다니 쉬이 믿을 수 없었다.
‘아무리 비싸도 그렇지.’
고수열은 앙리 마르소의 의심을 곱씹으며 질문을 이어갔다.
“모든 작품이 그렇지는 않지 않겠나.”
21세기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예술가 데미안 카터.
미술관이라면 그 이름 때문이라도 한 점쯤 전시하고 싶을 터였다.
가격이 너무 높다면 상대적으로 저렴한 작품이라도 구할 성싶었다.
“저도 그게 이상해서 물어보니 경매 시작가가 300만 파운드 이상이라고 합니다.”
“허.”
“또 그나마 낙찰가가 적게 책정된 작품을 추후에 구하려고 해도 다시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고수열이 고개를 돌렸다.
“되파는 일이 없단 뜻인가?”
“그렇습니다. 낙찰 품목 중에 현재 행방이 확인된 작품은 몇 없습니다.”
“흐음……. 유찰된 작품은 어떤가. 작품 수가 워낙 많으니 꽤 있을 텐데.”
미술품 경매에서 작품이 유찰되는 경우의 수는 여럿이지만 크게 세 가지로 나뉘었다.
관심이 없어 아무도 입찰하지 않거나 낙찰가가 터무니없이 높아 낙찰자가 지불할 능력이 없는 경우.
마지막으로 작품이 위조, 변조, 파손된 경우였다.
이와 같은 이유로 유찰된 작품은 다시 경매에 올라오고 대체적으로 전보다 낮은 가격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유찰된 작품도 다시 나오는 경우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구하기 힘들다고.”
“그 많은 것을 어디에 보관해 두길래…….”
고수열이 앙리 마르소가 전한 이야기를 떠올리며 숨을 내쉬었다.
데미안 카터의 작품은 대부분 전시되지 않아 그 행방이 묘연했다.
“보관도 문제지만 팔 의지가 없다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방태호의 지적에 고수열이 또 한 번 의문을 품었다.
예술가 중에 특이한 사람이 많다고는 해도 작품을 판매할 의지가 없는 사람은 좀처럼 찾기 힘들었다.
“그럴 리가 있나. 자기 작품 팔고 싶지 않은 사람이.”
방태호가 고수열과 눈을 마주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고수열은 지난날 작품이 전시되지는 않고 수집가들 사이에서만 거래되거나, 자금을 세탁하는 용도로 사용된 일을 떠올렸다.
그를 경계하여 작품을 경매에 올리지 않았었다.
방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과 반대 이유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자금 세탁을 목적으로 했다는 말인가?”
“이유가 될 수 있겠죠.”
“어찌. 어찌 그럴 수가 있나. 경매에 참가하는 이들이 한두 사람도 아니고.”
“처음부터 거래 상대가 정해져 있었다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방태호의 말대로 작품을 거래할 사람이 정해져 있었다면, 다른 이들에게는 팔 의지가 없는 것으로 보일 만했다.
“아니. 그럴 순 없어. 유찰된 작품도 있지 않나.”
구매자가 정해져 있는데 작품이 유찰되는 것도 이상했다.
“이건 제 생각입니다만.”
방태호가 주변 눈치를 보고는 말했다.
“마르소 작가의 추측대로라면 아마 원하는 가격대가 형성되지 않아서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원하는 가격이라니?”
“자금 세탁이 목적이라면 낙찰가를 높여야 하는데 참가자가 적거나 소극적이면 원하는 가격을 형성하기 힘들지 않습니까?”
“……그렇지. 하나.”
“작품 파손 관련해 유찰된 일이 17건이나 됩니다.”
고수열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다른 곳도 아니고 영국 소더비에서 경매에 오른 작품이 파손으로 유찰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데미안 카터의 작품을 그리 허술하게 관리할 리 없었다.
“낙찰자가 지불할 능력이 없는 경우는 세 자릿수입니다. 비싼 작품에 그런 일이 왕왕 있다고는 해도 결코 정상적인 수치가 아닙니다.”
고수열이 신음했다.
“그게 왜 지금에 와서야 알려졌나. 낙찰자가 도망간 일이야 이해해도 파손 관련 일을 언론이 넘어갈 리 없을 텐데. 카터도 가만있을 리 없을 테고.”
“가만있는 것 자체가 영국 소더비와 데미안 카터 사이에 연대가 있다는 뜻 아닐까요?”
방태호의 말에 고수열이 이마를 짚었다.
데미안 카터와 영국 소더비 그리고 제이 조플링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정확히 알 순 없어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선생님.”
방태호가 입을 열었다.
“저는 이 일 밝혀내야겠습니다. 만에 하나 정말 부정이 있다면 뿌리를 더 내리기 전에 도려내야만 합니다.”
고수열이 카메라 앞에서 붓을 든 손자를 바라보았다.
방태호도 시선을 함께했다.
“이런 일이 계속되게 두고 볼 순 없지 않습니까.”
방태호는 추악한 미술계를 좌시하고 둘 수 없었다.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다면 고훈이 언젠가 이 시대 최고 거장의 실체를 알게 되었을 때, 너무나 창피할 것 같았다.
고수열도 같은 생각이었다.
본인이 겪었던 그 아픔을 손자가 반복해 겪길 원치 않았다.
더군다나 지금은 휘트니 비엔날레와 아르누보 공모전, SNBA 살롱전 특별 전시회 등으로 이제 막 주목받기 시작한 시기였다.
2029년 상반기에는 콘셉트 아트 매니저로 참가한 <기암성>과 지금 촬영 중인 <빈센트>가 개봉할 터.
고훈에게는 너무나도 중요한 기점이었다.
고수열은 캔버스를 채워나가는 고훈을 바라보며 주먹을 쥐었다.
* * *
밑칠을 시작하니 촬영 시작을 알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대니얼 스콧 감독이 왜 <붓꽃>을 그려달라고 했는지는 몰라도 마침 데미안 카터 때문에 상처받은 이들에게 위안을 주고 싶던 차.
소재로 삼기에 좋은 그림이다.
“붓꽃은 빈센트가 생폴 드 모솔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가장 먼저 그린 작품이에요.”
그때처럼 정원에 핀 붓꽃을 앞에 두고 싶지만, 한겨울에 피어 있을 리 없다.
지금도 그곳이 남아 있을지 의문이고 말이다.
“1889년 5월 8일이었는데 그때가 붓꽃이 제일 예쁘게 필 무렵이거든요.”
발작 증세가 발현되면 도저히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어서 스스로 입원했었다.
병은 호전되지 않았지만, 발작이 없을 때 주변 경관을 그리는 일로 그나마 희망과 용기를 얻었다.
“붓꽃은 습작이었어요. 꽃잎을 관찰하고 형태와 질감을 잘 표현하고자 연습했던 건데 빈센트의 생각과 달리 평가가 좋았어요.”
꽃 위치를 잡아갔다.
“5월에 그려서 테오에게 보냈어요. 9월에 열리는 앙데팡당전에 전시해 준다고 했거든요. 비록 돈을 내고 걸어준 거지만 좋은 자리에 걸어주었어요.”
테오는 편지로 “멀리서도 시선을 잡아끌어. 생기가 넘치는 아름다운 그림이야”라고 말해주었다.
“최근에 알게 됐는데 80년대에 엄청 비싸게 팔렸다고 해요. 빈센트는 그리 크게 생각지 않았는데 좋게 봐주시는 걸 알면 신기해할 거예요.”
할아버지와 자주 나누는 이야기지만 예술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심혈을 기울여 그려낸 작품이 아무 반응도 못 끌어내는 반면, 크게 생각지 않은 그림이 걸작으로 추앙받기도 한다.
예술은 창작자와 관객이 함께 만드는 것 아닐까.
파란 물감에 검정 물감을 조금 섞었다.
“꽃을 그리기 전에 주의할 점이 있어요. 붓꽃은 잎에 향이 없어요. 빈센트도 명확하게 그려서 향이 번지는 느낌이 없도록 유도했어요.”
향이 없는 단절감을 표현하고 싶어서 당시에 많이 영향받았던 우키요에를 적용했었다.
테두리를 검은 선으로 구분했는데, 이 윤곽선은 우키요에에서 도드라지는 특징이었다.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검은 테두리는 존재하지 않으니 사용하면 안 된다는 인식이 많은데, 아름다우면 무엇을 어떻게 그리든 누가 뭐라 할까.
그림을 처음 배우는 입장에서는 지양해야 할지 몰라도 생동감을 주기에 참 좋은 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향이 없는 이유는 나비나 벌을 끌어들일 필요가 없어서래요. 열매를 터뜨려 번식한다고 하던데.”
붓을 한차례 씻어내고 이번에는 파란색에 흰색을 섞었다.
아주 조금 덜어내 바르고 또 조금 더 섞어 칠했다.
“입원해 있던 빈센트에게는 위안이 되는 꽃이었어요. 남의 도움 없이 스스로 예쁘게 피어나 있으니 시골 병원에 홀로 남은 외로움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었죠.”
몇 없는 벗들과의 관계는 틀어진 채 회복할 수 없었고 몸과 정신은 하루하루 망가져 가던 시기라 정말 위태로웠다.
“모두에게 무시받으니까 어떻게든 멋진 작품을 그려내겠다는 오기도 있었던 것 같아요. 붓꽃에서 용기를 얻은 거죠.”
흰색 물감에 파란 물감을 아주 조금 섞었다.
“빈센트가 어떻게 사랑받을 수 있었을까 하고 많이 고민해 봤어요. 정말로 많이요. 그러다가 붓꽃 같은 마음 때문은 아닐까 생각했죠.”
흰 붓꽃을 그려 넣었다.
“사실 생동감 있게 그렸지만 되게 슬픈 그림이에요. 혼자서도 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건 외로운 사람이 하는 말이니까요.”
결핍되어 있으니까 혼자라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라도 스스로 위안 삼지 않으면 정말 아무것도 못 하고 잊힐 것 같아서 무서웠다.
행복한 사람은 그 마음을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림 그리는 일은 즐거워요. 근데 작업이 끝나면 되게 외롭게 되거든요. 10시간이고 20시간이고 집중해서 그리다가 목이 아파서 허리를 펴면 주변은 어두워져 있죠. 집에 혼자 돌아가는 길은 고요해서 세상에 홀로 남겨진 기분도 들어요. 특히 빈센트처럼 인정받지 못한 시간이 길면 길수록요. 그건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 감정이에요.”
그때의 나를 위해.
이 시대의 예술가들을 위해 말하고 싶은 말이 있다.
“빈센트는 끝내 성공하지 못하고 죽었지만, 끝까지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노력했어요. 할 수 없을지도 몰라 하고 무서워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았어요.”
자랑도 거짓도 권유도 아니다.
“여러분이 하는 일을 주변 사람이 알아봐 주지 않는다고 해서 여러분이 틀린 건 아니에요.”
흰색 붓꽃 가운데 노란색을 찍었다.
“19세기는 엄청난 천재들이 저마다 기량을 뽐내던 시대였어요. 빈센트는 그런 꽃들을 보며 부러워했고요. 가끔 좁은 시골에서 이대로 잊히는 건 아닌가 하고 괴로워하기도 했고요.”
잘 된 것 같다.
“그래도 지금은 사랑받잖아요? 그가 바랐던 것처럼 그 역시 꽃이었던 거예요. 우리 모두 스스로 붓꽃이라고 믿어야 해요.”
붓을 내려놓았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아주 작은 용기라도 얻는다면 빈센트도 좋아하지 않을까요?”
고개를 살짝 돌려 카메라를 보니 주변이 고요하다.
어느새 직접 카메라를 쥔 대니얼 스콧이 천천히 이동하더니 얼굴을 내밀었다.
“완벽해…….”
다행히 한 번에 잘 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