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21화
43. 아이리스(1)
앙리 마르소가 날 빤히 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어린애들 상대할 시간 없습니다.”
“그런가.”
다행이긴 한데 묘하게 억울하다.
“나쁜 일은 아닐세. 학생을 가르치면서 도리어 배우는 것도 많으니.”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쳤던 분이시니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말씀이리라.
다만 마르소는 관심 없는 모양이다.
작품 활동 외의 일로 시간을 빼앗기기 싫은 마음이야 충분히 이해한다.
“근데 왜 마르소한테 연락해요?”
“내 말이.”
유명한 작가를 강사로 초빙하면 그만큼 교육 질이 오를 테지만, 앙리 마르소는 정도를 넘어섰다.
그를 고용하려면 대체 얼마나 많은 돈을 줘야 할지 의문인데다 돈으로 움직일 사람도 아니다.
“푸생 씨 때문이지?”
셰리 가도가 음식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푸생?”
“앙리 4세 중학교 교장이셔. 앙리에겐 은사 되시고.”
“은사는 무슨.”
마르소가 틱틱거렸다.
경험상 저런 반응을 보이면 좋게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아니나 다를까 셰리 가도가 두 사람이 가까운 사이라고 알려주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앙리가 정말 존경하는 분이란다. 중학생일 때 앙리 미술 선생님이셨어.”
마르소도 앙리 4세 중학교를 졸업했던 모양.
“그때는 좀 나았어요?”
“뭐가?”
“성격이요.”
마르소가 인상을 쓰자 셰리 가도가 깔깔 웃었다.
“지금은 신사지. 그때는 정말 아무도 못 말렸어.”
지금도 천방지축인 그가 어렸을 땐 얼마나 답이 없을지 상상하기 힘들다.
“푸생 씨를 만나고 사람 됐지. 안 그러니?”
“흥.”
사춘기의 앙리 마르소를 잘 보살핀 걸 보면 멋진 교육자 같다.
“그럼 푸생 씨가 교사로 일해달라고 부탁하는 거예요?”
“곁에 두고 잔소리하려는 거야.”
어떤 사람일지 감이 안 잡히지만, 미셸도 그렇고 셰리도 있고.
셰바송 씨몽 회장과 푸생 교장까지 앙리 마르소에게 생각보다 친구가 많다는 게 놀랍다.
“자, 자. 먹으면서 이야기하자. 오늘 아를에 간다며?”
“네.”
“먼 길 가니까 든든하게 먹어야 해. 수열 씨도 많이 드세요.”
“껄껄. 네. 잘 먹겠습니다.”
셰리 가도가 준비해 준 아침은 여느 때와 같이 근사했다.
* * *
젊은 영화감독 대니얼 스콧은 빈센트 반 고흐의 열정적인 팬으로, 지난 2년간 다큐멘터리 <빈센트> 제작에 열정을 쏟아부었다.
마틴 얀센이 일생에 걸쳐 수집한 자료를 반복해 정독했고 촬영지를 답사하며 빈센트 반 고흐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반 고흐가 남긴 편지와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남긴 기록을 분류했고.
여러 전문가를 만나 가르침을 구하며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을 깨닫는 과정은 즐겁기까지 했다.
사랑하는 빈센트 반 고흐가 단순히 미치광이가 아니었음을 알리고 싶었다.
운명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다가 끝끝내 스스로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던 비극적 삶을 조금이나마 위로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심혈을 기울였거늘.
진정 어린아이를 출연시켜야만 하는가.
대니얼 스콧은 마틴 얀센의 요구를 쉬이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정말 그래야만 합니까?’
‘자네는 훈이에 대해 조금도 모르네. 직접 만나게 되면 내가 왜 이러는지 알 거야.’
대니얼 스콧은 마틴 얀센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화가로서의 재능은 충분히 인정하지만, 굳이 빈센트 반 고흐의 일대기를 다루는 다큐멘터리에 동양인 소년을 출연시켜야 하는지 의문이었다.
그럴 바에는 빈센트 반 고흐를 오랫동안 연구한 경력 있는 화가를 초빙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투자자인 마틴 얀센이 강력히 주장하는 일이라 어쩔 수 없었다.
‘어린아이가 설명하는 반 고흐라니.’
빈센트 반 고흐는 매우 복합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타인을 사랑하는 이타적인 면모를 보이면서도 때때로 고집을 부려 주변을 힘들게 했다.
화가로서의 자아가 너무나 강한 탓이었다.
그러는 한편 동생 테오도르와 주고 받은 편지를 살피면 인정받지 못한 데에서 오는 좌절과 번민이 드러나 있었다.
동생에게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는지 구구절절 설명하는 문장에서는 다급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미치광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이성적이었고, 이상적인 인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인간적이었다.
그런 인물을 아이가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최대한 잘라내야지.’
대니얼 스콧은 마지못해 촬영하기로 약속하고 고훈의 촬영분을 최대한 줄이기로 마음먹었다.
다큐멘터리의 흐름을 이유로 편집하면 마틴 얀센도 어쩔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고훈이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 빈센트 반 고흐의 마지막 작업 장소를 발견한 일을 접했다.
믿을 수 없었다.
고훈이 말하는 빈센트 반 고흐는 대니얼 스콧이 생각했던 반 고흐 그 자체였다.
반 고흐의 입장에서 상황을 둘러봐야만 내놓을 수 있는 추론이었다.
어쩌면 마틴 얀센의 말이 아주 틀리진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대니얼 스콧은 5부작으로 구성한 <빈센트> 중 네 번째 화 일부를 비워두었다.
만약에.
정말 만에 하나라도 고훈이 좋은 그림을 보여준다면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해 둔 것이었다.
“……후우.”
대니얼 스콧이 담배 연기를 내뿜고는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없지.’
대니얼 스콧은 촬영장을 둘러보며 본인이 쓸데없는 기대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 * *
그리운 아를에 도착했다.
파리 리옹역에서 직행인 기차는 많지 않은데다 대부분 매진이라 걱정했는데, 마르소가 표를 구해주었다.
기차에서 내려 역사 앞으로 나가니 방태호가 마중 나와 있었다.
고작 일주일 정도 못 봤을 뿐인데 이렇게 반가울 수 없다.
“아저씨.”
“훈아.”
방태호가 웃으며 다가왔다.
“잘 지냈어? 얼굴 좋아졌네.”
“못 지냈어요.”
“못 지냈다고?”
“운동 좀 했다고 엄살이구나.”
할아버지와 방태호가 소리 내어 웃었다. 뭐가 재밌는지 모를 일이다.
“아저씨는요?”
“음. 한시름 놓았지. 걱정해 줘서 고마워.”
방태호가 내 팔을 쓸어내리곤 허리를 폈다.
“덕분에 잘 다녀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욕봤네. 모친께선 좀 어떠신가.”
“회복이 잘 돼서 이젠 말씀도 하십니다.”
“천만다행일세.”
수술이 잘 끝났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대화를 나눌 정도라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부모를 잃는 심정을 너무나 잘 알기에 안도했다.
방태호가 미리 준비해 둔 차를 타고 촬영장으로 향했다.
“훈아, 뒤에 상자 있는데.”
“이거요?”
조수석 뒷자리에 잘 포장된 상자가 놓여 있다. 꽤 크다.
“한나가 고맙다고 주래.”
<피의 낙인>의 저자 이한나 작가가 보낸 선물이라니.
서둘러 리본을 풀렀다.
“과자네요?”
한국 과자다.
음식은 한국이나 프랑스나 각기 다른 매력이 있지만, 프랑스 편의점에서 파는 과자는 미칠 듯이 달아서 한국 과자가 그립던 차.
마침 잘 되었다.
“잘 먹을게요.”
원뿔 모양의 과자 봉지를 뜯어 손가락에 끼웠다.
“인사는 내가 해야지.”
“왜요?”
“저번에 방송 나갔을 때 피의 낙인 이야기했었잖아.”
몇 번 그런 적 있었다.
최근에 출연했던 알퐁스 멘디 쇼에서도 언급했는데, 할아버지가 피의 낙인이 뭐냐고 물으셔서 낭패를 봤었다.
전에도 설명하다가 할아버지가 키즈락을 걸어두셨는데.
그걸 잊곤 열심히 설명하다가, 어떻게 봤냐는 질문을 받아 당황했었다.
막상 보면 폭력적이거나 선정적인 내용은 적고 재밌는 드라마라고 애써 설득했지만 할아버지는 1화를 보다가 고개를 저으시곤 키즈락을 다시 설정해 버리셨다.
나중에 차시현에게 풀어달라고 할 예정이다.
“덕분에 관심 가진 사람들이 많아졌대. 마르소도 봤다고 하니까.”
“아.”
“프랑스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어. 출간하고 싶다고. JH시네마에서도 프랑스 서비스 준비 중이고.”
“정말요?”
“응. 진짜 네 덕분이지. 상자 아래 보면 쿠폰 같이 있을 거야.”
과자를 들어내니 편지랑 쿠폰이 들어 있다.
<피의 낙인> 소설이 연재되었던 카카오페이지에서 사용할 수 있는 캐시 쿠폰이다.
편지는 이한나 작가가 직접 쓴 편지다.
한국에 가게 되면 꼭 보답할 수 있게 만나자는 이야기, 방태호와 즐겁게 일해줘서 고맙다는 이야기가 정성스레 적혀 있었다.
<피의 낙인> 작가에게 직접 편지를 받다니.
이건 잘 보관해 둬야겠다.
“출판사에서 보고 싶은 책 있으면 얼마든지 알려달래. 보내주고 싶다고.”
이한나 작가의 신작 <미열>이 떠올랐다.
교수를 사랑하는 대학생이 주인공인 소설인데 풋풋함과 농밀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수작이라는 평이 있었다.
한 번쯤 읽어보고 싶던 차다.
“아이들이 보는 책도 내나?”
“…….”
“브랜드가 여럿이라서요. 꽤 여러 종류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랬구만.”
할아버지가 계시니 달라고는 못 할 것 같다.
10분 정도 걸렸을까.
차로 이동한 지 얼마 안 되어 촬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수열! 훈아!”
마틴 얀센이 두 팔을 벌려 환영해 주었다.
할아버지와 번갈아 그와 포옹하고 방태호도 인사를 나누었다.
“이쪽은 대니얼 스콧. 유능한 감독이지.”
마틴 얀센이 다큐멘터리 감독을 소개했다.
30대 중반의 스코틀랜드 남자로 삐쩍 마르고 담배 냄새를 풍겼다.
사납고 신경질적인 인상이다.
“얼굴하고 성격은 더러워도 실력 하나는 믿을 만하지. 하하핫!”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데, 대니얼 스콧 감독도 딱히 부정하지 않는다.
“바로 들어가도 되나?”
“좋아요.”
내가 할 일은 지면으로 충분히 안내받았다.
예전에 그린 작품을 따라 그리며 ‘빈센트’와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인터넷 방송하듯이 자유롭게 풀어내라고 했다.
“붓꽃이었죠?”
대니얼 스콧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많이들 좋아해 주는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을 계획했지만, 아르누보 공모전 도중 <붓꽃>으로 해줄 수 있냐고 요청받았었다.
감독이 요구한 일이기도 하고, 하고 싶은 말도 있는 작품이라 수락했었다.
“그럼 각부터 보지.”
제작진의 안내를 받아 캔버스 앞에 앉자 조명과 카메라가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