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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반 고흐-219화 (174/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19화

42. 예술과 예술 사이(4)

[두 거장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다]

불화설을 이어오던 앙리 마르소와 데미안 카터가 14일 오후 2028 SNBA 살롱전 시상식장에서 언쟁을 벌였다.

앙리 마르소는 살롱전 수상을 확정 지은 데미안 카터가 아르누보 공모전에 참가한 일을 비판했으며, 데미안 카터는 아르누보 공모전의 정신을 존중하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반박했다.

이에 앙리 마르소는 그가 공모전 개막일부터 본인 작품 앞에서 홍보한 일을 문제 삼았다.

더하여 “우승할 자신이 없었기에 표를 끌어모은 뒤 사퇴한 것 아니냐”며 재경합을 제안했고 데미안 카터가 이를 수용하며 두 거장의 경합이 성사되었다.

미술계의 반응은 분분하다.

고훈 등 일부 예술가는 앙리 마르소의 문제 제시가 정당했다며 그를 지지하는 한편.

미술평론가 제임스 리터를 비롯한 데미안 카터 지지자들은 앙리 마르소가 지나치게 대응하고 있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두 거장의 경합은 2029년 1월 중 영국과 프랑스가 아닌 국가에서 치러지기로 알려졌다.

앙리 마르소와 데미안 카터의 경합 소식은 순식간에 화제가 되었다.

속속들이 올라오는 기사를 확인하던 제이 조플링은 탁자를 치며 신경질을 냈다.

“대체 어떻게 아는 거냐고!”

<영원>에 관련된 사람은 자레드 사치, 제이 조플링을 포함한 몇몇뿐이었다.

철저히 비밀을 지켜왔기에 앙리 마르소가 사파이어를 언급했을 때는 과거가 밝혀질까 두려웠다.

“흥분하지 말게.”

데미안 카터가 찻잔을 들었다.

“증거 따위 없다는 건 자네도 잘 알잖아.”

제이 조플링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숨을 내쉬곤 의자에 앉았다.

“자신은 있어?”

“글쎄.”

여유롭게 차나 마시는 데미안 카터를 보니 제이 조플링은 화가 끓어올랐다.

“정신 차려. 성과를 내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

굳이 앙리 마르소를 이길 필요는 없었다.

문제는 앙리 마르소와 데미안 카터라는 양자택일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데미안 카터를 지지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양쪽 모두 내로라하는 인물이었으나 앙리 마르소는 많은 팬을 보유한 것으로 유명했다.

만약 표 차이가 심각한 수준으로 난다면 데미안 카터의 브랜드 가치는 한없이 추락할 터.

후원자들이 데미안 카터를 계속 지지할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잘 알지.”

“아는 사람이 이러고 있어? 뭔가 만들어 내야 할 것 아니야.”

제이 조플링이 두 주먹을 움켜쥐어 보였다.

데미안 카터가 잔을 내려놓았다. 천천히 그리고 여유롭게 고개를 들고 말했다.

“자네답지 않군.”

심각한 상황에서도 여유를 부리기에 짜증이 난 제이 조플링이 다소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뭐라고?”

“내가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게 중요한가?”

“그걸 말이라고.”

“이상하군.”

제이 조플링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잖은가. 지금의 나를 만들어 준 장본인이 그리 말하는 게. 나는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어.”

“후우.”

제이 조플링은 숨을 길게 내쉬곤 말했다.

“지금 말장난이나 할 기분 아니야. 마르소 그놈 때문에 다들 불안해하고 있어.”

“그러니 하는 말 아닌가.”

“뭐?”

“내가 보기 좋게 패배한다면 그동안 쌓은 이미지에 상처가 생기겠지. 마르소 군과 고훈 군 덕에 한 번 흔들리기도 했고.”

“그걸 알면 제대로 하란 말이야!”

제이 조플링이 소리쳤다.

데미안 카터는 말없이 그를 응시하였고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찾아왔다.

“그건 내가 할 말일세, 제이.”

“뭐라고?”

“잘 준비해 주게.”

제이 조플링이 벌떡 일어났다.

마치 자기 일이 아니라는 듯 말하는 데미안 카터의 태도에 분개했다.

“경합에 나서기로 한 건 자네야! 일을 이 지경으로 벌려 놓았으면 책임을 져야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말했잖아. 난 항상 그대로였다고.”

데미안 카터가 찻잔을 채웠다.

“이번에도 잘 부탁한다는 뜻이야.”

찻잔을 든 데미안 카터는 흥분하여 숨을 몰아쉬는 제이 조플링을 보며 말했다.

“비싸게 주고 산 작품이 헐값이 되어버리면 자네도 후원자들도 곤란해지지 않겠나.”

* * *

미셸 플라티니가 앙리 마르소의 작업실을 찾았다.

거대한 스크린에 빈센트 반 고흐의 <붓꽃>을 띄어두고 생각에 잠긴 앙리 마르소는 사람이 찾아온 것도 모른 채 집중하고 있었다.

미셸은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테이블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훈이 있더라?”

앙리가 고개를 돌렸다.

“며칠 더 있기로 했어.”

“고수열 경은 어떻게 설득했대?”

“부모가 바라는 일이야 뻔하지.”

앙리 마르소는 건강과 교육, 안전을 근거로 고수열을 설득했다.

전담 의료진을 통한 체계적인 신체 관리와 수준 높은 교육 제공 그리고 최근 문제가 되는 무슬림 테러에서 안전함을 언급하니 고수열도 어쩔 수 없었다.

설명을 들은 미셸이 피식 웃었다.

“대부라도 되는 줄 알겠어.”

앙리 마르소가 대꾸하지 않았다.

미셸도 말없이 반 고흐의 <붓꽃>을 보기를 얼마간 마침내 용건을 꺼냈다.

“데미안 카터 낙찰품목 가져왔어.”

앙리가 서류를 건네받았다.

지난 20년간 데미안 카터의 작품이 거래된 목록이었다. 제목, 판매일시, 판매장소, 구매자, 낙찰가, 경매 과정 등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생각보다 적더라.”

앙리가 열한 장으로 정리된 목록을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최근에 거래된 작품이 22번으로 표기되었으니 공식적으로 확인된 작품 거래는 22건에 지나지 않았다.

21세기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작가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적었으나 작품당 거래액은 상상을 초월했다.

“전부 영국 소더비라고?”

“응. 하나 빼고. 관여하고 있다고 봐야겠지.”

다른 경매장을 이용하지 않고 오직 영국 소더비를 통해 작품을 판매해 왔으니, 데미안 카터와 영국 소더비 사이에 연대가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알아보니까 시작가부터 말이 안 되더라고. 영원 이후로 300만 파운드 이하로 내려간 적 없었어.”

미셸의 지적에 앙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영원>이 5,000만 파운드에 거래되었다고는 해도 다음 작품 가격을 과하게 부른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당시만 해도 데미안 카터는 <영원>을 판매하며 무명에서 막 벗어난 시기였다.

그런 그의 작품을 최소 수천만 파운드에 팔릴 것을 상정해, 경매 시작가를 300만 파운드로 설정한 영국 소더비.

과감한 전략인지 의도된 일인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하나 더.”

미셸이 탁자를 세 번 두드려 스크린을 활성화했다.

개인 서버에 접속한 그녀는 934장 분량의 문서를 열었다.

“지금까지 데미안 카터가 발표한 작품들이야. 대충 26년 정도. 얼마나 될 것 같아?”

앙리가 미간을 좁혔다.

“1,360점. 대단하지?”

설치 예술가가 26년간 일주일에 한 작품씩 꼬박 만들어 발표했다는 뜻이었다.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현대 예술가는 작품을 구상하고 지휘, 감독할 뿐, 팀을 이뤄 작업을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1,360점을 만든 일이 쉬운 일은 결코 아니었다.

개인마다 차이는 있으나 한 사람이 낼 수 있는 아이디어에는 한계가 있었다.

천재거나 엄청난 노력가.

혹은.

“대리도 맡겼나?”

“그럴 가능성도 있어.”

돈을 주고 무명 작가에게 작품을 의뢰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것을 본인의 작품으로 발표해 오다가, 약속한 돈을 주지 않거나 무명 작가의 변심으로 망신당한 이들이 심심찮게 있었다.

“난 이게 이상하던데.”

앙리가 미셸과 눈을 마주했다.

“1,360점이나 발표했는데 팔린 건 22점밖에 없어.”

미셸의 의심은 타당했다.

그녀는 앙리가 가능한 여러 일을 떠올릴 수 있도록 계속하여 의문을 제시했다.

“처음에는 가격이 너무 높이 책정돼서 그런가 싶었거든. 그만한 돈을 가진 사람이 많은 건 아니니까.”

앙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미술관이라면? 재정이 풍족한 단체라면 꽤 많은데 왜 다들 안 샀을까. 데미안 카터 정도 되는 거장의 작품이라면 한 작품 정도는 살 법하잖아.”

“……안 팔았다는 뜻이네.”

“같은 생각이야. 영국 소더비가 도중에 커트했거나 아니면 후원자 중 일부가 일부러 상위입찰했을 수도 있고.”

고민하던 앙리가 답을 찾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왜?”

데미안과 후원자들이 굳이 다른 이들에게 작품을 팔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작품 가격을 높이 책정해서 판매했다면 돈을 벌기 위해서라는 간단한 답이 나왔지만, 다른 이들에게 판매하지 않았다면 문제가 복잡해졌다.

“그리고 이거.”

미셸이 열어 놓은 문서를 닫고 새 문서를 열었다.

탁자에 현재 데미안 카터의 작품을 전시하는 미술관, 갤러리가 제목과 함께 정리되어 있었다.

“지금 전시되고 있는 작품은 고작 97점이야.”

앙리 마르소가 또 한 번 인상을 썼다.

판매가 안 된 점은 비싼 가격으로 어떻게든 이해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데미안 카터처럼 유명한 작가의 작품은 여러 곳에서 전시 요청을 할 터였다.

충분한 대여료를 받을 테니 작가로서도 이득인데, 전시되는 작품이 100점조차 안 된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머지는?”

앙리가 전시되지 않은 나머지 1,263점의 행방을 묻자 미셸이 어깨를 으쓱였다.

“가지고 있나?”

“말도 안 돼.”

개인이 1,263점이나 되는 작품을 보관하기란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었다.

하물며 설치 예술가인 데미안 카터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했다.

그가 아무리 경제적으로 풍요해도 본인 작품을 전시하지 않고 한곳에 모아둘 이유가 없었다.

앙리 마르소조차 본인의 많은 작품을 활용하고자 개인 갤러리를 운영하여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아르센 씨가 찾아야 할 게 그거 아닐까 싶어.”

앙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셸이 지적한 대로 전시되지 않은 작품들이 어떻게 활용되는지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상식적으로 큰 비용을 지출하면서까지 창고에 보관해 둘 리는 없었다.

앙리 마르소가 아르센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셸은 앙리가 통화를 마칠 때까지 기다리다가 그가 스마트폰을 내려놓자 입을 열었다.

“쉽게 보지 마.”

“뭘?”

“만약 데미안 카터가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예술가라 해도 그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어지는 건 아니야.”

미셸은 다른 걸 걱정하지 않았다.

개차반 같은 성격이야 어렸을 적부터 알고 있었다.

시상식장에서 데미안 카터를 도발한 일도 아무 생각 없이 한 행동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나름의 이유가 있으리라 믿었다.

단지 데미안 카터가 만들어진 거장이라고 의심하기에,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마음조차 거짓된 것으로 생각하진 않을까 걱정되었다.

인기 투표라고 해도 무조건적으로 이길 거라 자만하지 않길 바랐다.

“알아.”

앙리 마르소가 태연히 답했다.

파리역 광고판을 모조리 사들였던 그는 홍보가 얼마나 중요한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데미안 카터는 그런 일에서는 독보적인 존재였다.

무시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다만 그를 용서할 수 없는 이유가 확실할 뿐. 앙리 마르소는 본인과 미셸 그리고 SNBA를 이용해 먹은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미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적도 너무 많이 두지 마. 넌 파리떼라고 했지만 데미안 카터는 그 사람들을 자기 편을 활용하고 있어. 잘못된 거랑은 별개로 힘을 이루고 있잖아.”

앙리를 잘 알기에 미셸은 굳이 같은 편을 만들라고 하지 않았다.

남에게 살갑게 굴 성격도 아니었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그에게 무엇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단지 스스로 방해 요소를 만드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앙리 마르소가 고개를 돌려 스크린에 띄어둔 <붓꽃>을 보았다.

“반 고흐가 이걸 왜 그린 줄 알아?”

생 레미 정신병원에 입원한 반 고흐는 150점의 작품을 남겼다.

꽃과 나무, 밤하늘 등 병원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을 그리며 마음의 평화를 되찾으려 했다.

미셸이 그러한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앙리는 미셸의 설명을 듣다가 고개를 저었다.

“붓꽃은 나비도 벌도 필요로 하지 않아.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열매를 터뜨려 번식해.”

앙리가 미셸과 눈을 마주했다.

“미술계 주류로 입성하기는커녕 동료 작가들에게서도 동떨어져 정신병원에 있던 반 고흐의 자화상인 거야.”

“왜 그렇게 생각해?”

“왼쪽에 혼자만 하얗게 핀 붓꽃이 있잖아.”

미셸이 고개를 돌렸다.

“붓꽃밭에 자기를 그려 넣은 거야.”1)

* * *

1)붓꽃(아이리스), 빈센트 반 고흐, 1889, 캔버스에 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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