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18화
42. 예술과 예술 사이(3)
데미안 카터는 성난 눈을 마주하며 생각했다.
‘나를 쓸모없게 할 셈인가.’
앙리 마르소는 후원자들이 더는 후원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후원인들과 단단히 결속하고 이후로도 자기관리에 철저했던 데미안 카터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방식이었다.
어떻게 유명해질 수 있었는지.
작품 가격은 어떻게 높여 왔는지 누구도 입증할 수 없었기에 안심하던 차에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인 줄로만 알았거든.
데미안 카터는 본인이 오판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예상 못 했다만.’
오랜 세월 쌓아온 탑을 일순간에 무너뜨릴 순 없었다.
데미안 카터는 차분한 목소리로 앙리 마르소를 탓했다.
“경쟁을 참 좋아하는군. 누구를 넘어서고 이기는 게 자네의 예술관인가?”
빈센트 반 고흐와 폴 고갱.
앙리 마티스와 파블로 피카소 중 어느 쪽이 더 뛰어난 예술가냐와 같은 유치한 질문이 아니냐고 지적했다.
“난 자네가 남보다 뛰어나고 더 많은 사랑을 받길 바라는 것보다 스스로 만족하는 작품을 해나가길 바라네.”
“말을 자꾸 피하네. 자신이 없나?”
앙리 마르소가 씩 하고 웃었다.
“경쟁을 좋아한다고? 역겨운 행동을 포장하는 게 꼴사나워서 증명해 보란 말이야. 내가 내 작품에 만족을 못 한다고? 나 앙리 마르소가?”
앙리 마르소는 데미안 카터와 같은 부류를 혐오했다.
그는 불리한 사실은 피하고 작은 일을 의도적으로 곡해했다.
동시에 그럴듯한 말로 잘못된 인식을 심음으로써 상대가 스스로 의심하게 했다.
“지금까지 그런 가스라이팅으로 먹고 살았던 모양인데 상대를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어. 늙은이.”
앙리 마르소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보고 싶지 않나? 앙리 마르소 대 데미안 카터. 페널티 없는 공평한 경쟁이야.”
앙리 마르소는 언론의 본질을 잘 꿰뚫고 있었다.
아무리 친분이 있어도 결국 화제가 되는 일을 다룰 수밖에 없는 존재였고 이 시대 최고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두 예술가의 분쟁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요릿감이었다.
데미안 카터를 비호하던 더 선의 기자조차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외통수였다.
“…….”
데미안 카터는 쉽게 대응할 수 없었다.
앙리 마르소가 제시한 이지선다를 비웃으며 노련하게 대처했지만, 선택이 반복될수록 구석에 몰리는 기분을 떨쳐낼 수 없었다.
기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처음에는 앙리 마르소를 기이하게 여기던 좌중도 어느새 두 예술가의 경합을 기대하는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끝을 보자는 말이로군.’
앙리 마르소는 데미안 카터의 명성을 실속 없는 거짓이라고 증명하고 싶어 했다.
처참히 패배하면 후원자들은 데미안 카터를 더는 신뢰하지 않을 테고 지금껏 ‘데미안 카터의 작품이니 무슨 의도가 있겠지’라며 호의적으로 바라보던 시선도 잃을 터였다.
데미안 카터가 피식 웃었다.
자존심에 상처 입은 채 물러나고 싶진 않았으나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다.
데미안 카터는 언제나 그러했듯 차분히 입을 열었다.
“자네가 왜 이리 화를 내는지 알겠네. 오해한 듯한데, 싸울 일이 아니니 흥분을 가라앉히고 이야기해 보지 않겠나.”
감정을 좇아 강경히 나가는 건 하수나 하는 짓이었다.
데미안 카터는 끝까지 연장자로서 아량이 넓은 모습을 보여야만 자신을 옹호하는 사람이 생김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럴수록 거친 언행을 보인 앙리 마르소는 비난받을 터였다.
“다들 놀라지 않았나.”
데미안 카터가 부드럽게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시상식장에 참석한 대다수는 앙리 마르소가 공연히 트집을 잡는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기자들은 앙리 마르소가 던진 흥밋거리에 침묵했지만 그렇다고 그를 지지하고 나설 사람은 없었다.
많은 이가 앙리 마르소의 격한 언행을 부정적으로 여기는 상황에서 그를 두둔하고자 인격자이자 영국 예술계의 거장 데미안 카터에게 맞설 리 없었다.
‘끝이군.’
데미안 카터는 오늘의 소동으로 본인의 이미지가 한층 더 좋아질 거라 확신하며, 프랑스의 젊은 예술가에게 고마워했다.
“오해가 아니에요.”
앳된 목소리가 나섰다.
앙리 마르소와 데미안 카터에게만 집중되었던 이목이 한 소년에게 쏠렸다.
고훈이었다.
“데미안 카터 씨는 계속 마르소가 오해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저도 아르누보 공모전 참가자로서 불쾌했어요.”
좌중은 혼란에 빠졌다.
모두 두 거인의 싸움에 끼어들었다가 괜한 상처를 입을까 두려워하는 참이었다.
그것을 충분히 인지하던 터라 안심하고 앙리 마르소를 대하던 데미안 카터는 깜짝 놀랐다.
적어도 친분을 나눈 고수열은 본인 편에 있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고훈 군?”
“공모전에 참가한 사람들을 배려하고 한 행동이라고 해도 달라지지 않아요.”
고훈은 할아버지에게 시선을 주었다.
믿고 기다려달라는 눈빛에 고수열은 숨을 고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반 고흐란 인식을 벗어내고자 몇 달을 준비했어요. 어떤 사람은 성공하고 싶어서. 또 어떤 사람은 당장의 생계가 달린 문제였어요. 이미 살롱전 수상이 확정된 상황에서 특별 전시회에 참가해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나요?”
“꼬맹이.”
고훈은 앙리 마르소에게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데미안 카터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 서운할 수 있겠구나.”
영국의 거장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내게도 큰 도전이었단다. 그걸 증명할 수 없어서 아쉬울 뿐이란다.”
“진심이에요?”
“물론이지.”
“그런데 왜 자꾸 마르소가 어리다는 듯이 말해요?”
고훈은 목소리를 높이지도 크게 말하지도 않았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구나.”
“아르누보 공모전에 그렇게 진심이었으면 그걸 부정당한 사람이 얼마나 큰 상처를 입었는지 알 거 아니에요.”
“…….”
“최선을 다했는데. 내겐 정말 중요한 일이었는데 알고 보니 저 사람에겐 별거 아닌 일이었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어요?”
고훈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SNBA 살롱전 특별 전시회는 초청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장소 아니었어요? 아르누보 공모전을 통해서 공평하게 경쟁해서 얻어낼 기회잖아요.”
고훈은 처음 아르누보 공모전에 참가한다고 밝혔을 때 앙리 마르소가 한 말을 똑똑히 기억했다.
네가 나가서 우승하면 다른 사람들은 뭐가 되냐고.
그 말의 진의를 아르누보 공모전에 참가하면서 깨닫게 되었다.
과거 본인처럼 인정받지 못한 사람이 열정을 쏟아내는 광경을 보고 그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다.
그 또한 간절했기에.
다른 참가자들의 마음도 헤아릴 수 있었다.
“살롱전에 초청받지 못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자리를 굳이 노렸다고 하니까 믿을게요. 카터 씨만의 이유가 있겠죠. 하지만 그렇게 간절했다면 마르소가 화를 내는 이유를 이해해야죠. 달랠 게 아니라 사과하셔야죠. 마르소뿐만 아니라 저한테도. 아르누보 공모전 참가자 모두에게요.”
고훈이 말을 마치자 시상식장이 고요해졌다.
어린 소년은 데미안 카터의 진심을 부정하지도, 과격한 언사를 꺼내지도 않았다.
데미안 카터가 이미 SNBA 살롱전 참가를 확정된 상황에서도 아르누보 공모전에 참가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면.
그것이 진심이었다면 그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줄 수 있는지 이해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을 뿐이었다.
생각을 거듭하던 데미안 카터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내 생각이 짧았구나. 미안하다.”
다른 방도가 없었다.
이 이상 논쟁이 오가면 본인이 세운 논리를 헤치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었다.
‘한 방 먹었군.’
한발 물러서야 할 때였다.
“미안하네, 마르소 군.”
데미안 카터가 앙리 마르소를 보며 사과했다.
“누가 사과하랬어?”
* * *
성질머리하곤.
소싯적에 나도 한 성질 했지만 저 인간은 도무지 적당히란 걸 모른다.
“책임을 지라고. 사과 따위 받자고 이러는 것 같아?”
하지만 듣고 보면 맞는 말이기도 하다.
사과 한마디로 풀릴 일이었으면 애초에 저렇게 나대지도 않았을 거다.
나 또한 마르소가 불리해 보이기에 거들었을 뿐이지 사과를 받아도 그리 유쾌하지 않다.
상황상 어쩔 수 없이 한 행동이지 데미안 카터의 본심이 어떤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어찌하면 좋겠는가.”
“한 달 뒤. 여기서 똑같은 방식으로 해보자고.”
아르누보 공모전과 같은 방식이라면 방문객 투표를 말하는 것이리라.
“그렇게까지 바란다면 해보세. 즐거운 시간이 되겠군.”
예상과 달리 데미안 카터도 더는 물러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에게 받은 느낌으로는 아마 어떤 계산을 세워뒀을 가능성이 크다.
“아무렴. 즐겁겠지.”
앙리 마르소가 악당처럼 웃자 곁에 있던 블랑쉬 파브르가 멋있다고 읊조렸다.
얘는 마르소를 좋아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알 수 없다.
“똑같은 방식이라면 투표를 말씀하신 겁니까?”
“프랑스에서 열게 되면 공평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쥐 죽은 듯 조용하던 시상식장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기자들은 앙리 마르소와 데미안 카터에게 질문을 쏟아냈고 어수선한 틈을 타 단상에서 내려왔다.
할아버지에게 돌아가기 전에 블랑쉬와 한 약속이 떠올라서 주변을 둘러보니 마침 바로 뒤에 있었다.
“도감 교환하기로 했잖아.”
“응. 기다려.”
블랑쉬가 어디론가 가더니 가방을 들고 왔다. 제법 두툼한 공책을 꺼내 보여준다.
겉면에 파브르 곤충 일기라고 적혀 있다.
“봐도 돼?”
“응.”
펼쳐 보니 곤충강을 정리한 도감 같다.
보이는 대로 기록했던 나와 달리 메뚜기목, 대벌레목,강도래목, 집게벌레목, 사마귀목 등 항목을 나누어 정리해 두었다.
한눈에 봐도 소중히 다룬 티가 난다.
“대단하네.”
“대단하지.”
고개를 들어 웃었다.
“가지고 다녀?”
“아니.”
고개를 기울이니 태연히 말한다.
“오늘 만날 테니까.”
연락처가 없어서 어찌할까 고민했는데 생각해 보니 과연 그렇다.
특별 전시상을 받으러 올 테니 나도 미리 준비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미안. 그 생각을 못 했네.”
“됐어.”
표정 변화가 없지만 다소 실망한 느낌이다.
스마트폰을 꺼냈다.
“번호 알려 줘. 메일 주소랑.”
눈을 가늘게 뜨고 살짝 고개를 돌린 걸 보니 확실히 실망한 듯하다.
“미안. 경황이 없었어. 계속 마르소 집에 있었거든.”
“왜?”
“할아버지가 바쁘셔서 혼자 머물 데가 없었거든.”
“좋았겠다.”
“하나도 안 좋았어.”
“하나도?”
“……대부분.”
대화가 묘하게 끊어졌다.
“그래서 번호는?”
다시 한번 물으니 또 표정이 안 좋아진다.
“개인정보 막 묻는 거 아니야.”
순간 맞는 말이긴 하다 싶어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약속이 있으니까 알려 줄게.”
스마트폰을 가져가더니 번호를 누른다.
“아침 8시부터 저녁 8시까지는 학교 가고 작업하니까 사적인 연락은 안 했으면 좋겠어. 점심시간에는 연락해도 되지만 밥 먹을 때는 안 받을 거야.”
“…….”
“넌 언제 연락하면 안 돼?”
“어……. 잘 때?”
“언제 자는데?”
“그때마다 다른데.”
“어떻게?”
마르소도 그렇고 얘도 그렇고 이상하게 규칙적이다.
나도 나름 규칙적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편이지만 이렇게까지 깐깐하게 할 필요가 있나 싶다.
“저리 안 꺼져!”
마르소의 목소리가 멀리서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