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16화
42. 예술과 예술 사이(1)
<집>을 감상하고 있자니 시간이 순식간에 흐르고 말았다.
할아버지에게 연락이 와서 시간을 확인하니 오후 3시 50분이다.
전시실 밖으로 나와서 전화를 받았다.
“네, 할아버지.”
-할아버지 다 왔는데 어디야?
“한국관이요.”
-그래. 지금 가마.
다행히 시상식에 늦지 않으셨다.
2~3일 사이에 파리와 서울을 오가시느라 많이 피곤하실 텐데, 조금 걱정이다.
회복 캡슐을 가지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니 내일 일정은 미루고 호텔에서 푹 쉬시라고 해야겠다.
연세도 있으신데 너무 무리하시는 것 같다.
“도착하셨대?”
마르소가 다가왔다.
얼굴을 보니 이틀 동안 푹 쉬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뭐야?”
“이따가 할아버지 회복 캡슐 좀 쓰게 해주세요.”
마르소의 눈썹이 기이하게 뒤틀렸다. 왼쪽 눈썹은 올리고 오른쪽 눈썹은 잔뜩 찡그린다.
“싫어요?”
“그러든지.”
거절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받아주었다.
“훈아.”
할아버지 목소리다.
고개를 돌리기가 무섭게 몸이 압박된다.
고작 며칠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이렇게 격하게 반기시면 한두 달 정도 못 본 뒤엔 위험할 수도 있겠다.
“잘 지냈어? 어디, 얼굴 좀 보자.”
할아버지가 볼을 감쌌다.
“얼굴이 좋아졌는데?”
조금 놀란 기색이다.
“회복 캡슐이랑 마사지 덕분이에요. 누가 새벽부터 달리게 해서 힘들었어요.”
“달리기?”
“5㎞나요.”
할아버지를 만난 반가움 때문인지 앙리 마르소의 악행을 고하고 싶었다.
억울함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네가 5㎞나 뛰었다고?”
왜 좋아하시지.
놀란 얼굴에 기쁜 마음이 서려 있다.
“운동 좀 시켜야겠습니다.”
마르소가 나섰다.
“체지방량이 많고 근육은 적은데 고열량 음식을 많이 먹으니 이대로 가면 비만이 되겠죠.”
“흠.”
할아버지가 내 몸을 살핀다.
“그래. 훈아, 운동 좀 해야겠구나.”
“네?”
“적당히 운동하면 밥맛도 좋아져.”
60대에도 중량 운동으로 탄탄한 근육을 유지하시는 분이라는 걸 간과하고 말았다.
“밥맛은 지금도 좋은데.”
“할아버지처럼 무거운 거 들 필요는 없고, 아침마다 조금씩 뛰면 되겠구나.”
말을 잘못 꺼냈다.
“고훈이 말하던데, 오늘은 집에서 쉬시죠.”
“아닐세. 훈이 봐준 것만으로도 고맙고 미안한데 그럴 수 있나. 정말 고맙네.”
“어차피 시험 공부도 해야 하고. 개벽 조율 작업도 남았으니 부담 갖지 마시죠.”
“시험 공부?”
할아버지가 또 놀라면서 반가워하신다.
위험하다.
“입학 시험이요. 어제 확인해 봤는데 큰 문제 없었어요. 쉬워서 공부할 필요 없어요.”
“그걸 왜 네가 판단해?”
“내가 판단하죠.”
마르소가 할아버지를 보며 말했다.
“교사들 말로는 시험 방향만 파악하면 큰 문제 없다고 합니다. 미리 준비하면 작업 활동에 지장을 주지 않겠죠.”
“그런가?”
대체 언제부터 할아버지가 마르소를 믿으신 거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
* * *
시상식장으로 향하는 도중에 방태호의 모친께서 고비를 넘겼단 소식을 들었다.
“다행이네요.”
“다행이지. 바로 온다고 하길래 며칠 더 있다가 오라고 했어.”
나 같아도 그렇게 말했을 거다.
위험한 상황을 넘겼어도 줄곧 해외에 있었으니, 며칠이라도 가족과 함께해야 내 마음이 편하다.
“한국관에 계속 있었어?”
“네. 서인호 작가 작품 보고 있었어요.”
“좋지.”
“작품 보셨어요?”
“그럼. 할아버지보다 한 해 선배인데 다들 언젠가 크게 될 사람이라고 생각했단다. 부친께서도 대단한 화가셨고.”
뛰어난 부모와 뛰어난 자식이라.
“저기 와 계신 것 같은데. 인사하러 갈까?”
“괜찮아요. 작품으로 충분히 얘기했어요.”
개인적인 만남이 싫은 건 아니지만 워낙 감명 깊었던지라 <집>은 감상으로 간직하고 싶다.
작가를 만나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집>에게서 받은 메시지가 바뀔 것 같다.
“지금부터 2028 SNBA 살롱전 시상식을 거행하겠습니다.”
사회자의 안내에 맞춰 박수를 보냈다.
시상식에 나선 사람들은 정말 많았는데,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알아갈 작품이 많다는 뜻이니 가슴이 또 막 두근거린다.
휘트니 비엔날레와 아르누보 공모전을 겪으며 동시대 예술에 다가가기 어렵다고 느꼈거늘.
찾다 보면 오늘 서인호 작가의 작품처럼 가슴에 와닿는 작품이 있을 거다.
“다음은 심사위원 특별상. 데미안 카터 작가님, 축하드립니다.”
데미안 카터?
아르누보 공모전에서 사퇴한 데미안 카터가 호명되어 깜짝 놀랐다.
할아버지도 의아한 표정을 지으셨는데 도착하자마자 자리에 앉아 그가 여기 와 있다는 사실도 모르셨던 듯하다.
앙리 마르소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묻고 싶어도 무슨 일인지 보이지 않는다.
풍성한 갈색 수염을 자랑하는 남자가 무대에 올랐다.
데미안 카터는 미소 지은 채 주변을 둘러보고 소감을 밝혔다.
“시상식 전에 잠시 전시관을 둘러보았습니다. 정말 멋진 작품들뿐이라 이 자리에 오르는 것이 민망하더군요.”
초청객들이 작게 웃는다.
데미안 카터가 던진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인 듯하나 나는 그럴 수 없다.
겸손한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게 그에 대한 나의 편견 때문만은 아니다.
SNBA 살롱전 공모전은 아르누보 공모전보다 빨리 시작되어 종료되었다.
시상식에 참가해야 하고 미리 일정을 조절해야 하니 수상자에게는 수상 소식이 미리 전달될 터.
할아버지에게도 한 달 전에 연락이 왔으니, 데미안 카터는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굳이 아르누보 공모전에서 상을 받지 않아도 SNBA 살롱전에 합류할 수 있음을 말이다.
SNBA 살롱전에 참가하지 못했어도 아르누보 공모전에서 사퇴했을까.
저 상이 데미안 카터의 부담을 덜어준 것만은 부정할 수 없으리라.
마음에 안 든다.
“마지막으로.”
연설을 이어가던 데미안 카터가 화제를 바꾸었다.
“최근 프랑스 국립 예술 협회의 행보에는 정말이지 감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앵테르미탕, 아르누보 공모전. 정말 여러 협회의 본이 되고 있지요. 감개무량합니다.”
SNBA 인사들이 미소로 화답한다.
“그 주역인 앙리 마르소 작가에게는 기대가 정말 큽니다. 젊고 힘 있는 그가 나서서 미술계를 번창시키니 기대도 크고요.”
“…….”
“앞으로도 오늘과 같은 멋진 무대를 만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데미안 카터가 연설을 마치자 사람들이 열렬히 박수를 보냈다.
사람을 의심하면 안 되지만 자꾸만 그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데미안 카터 작가님의 수상 소감이었습니다. 다음 순서는…….”
SNBA 살롱전 입선작들이 차례로 소개되고 수상자들이 나서서 소감을 밝힌다.
상은 회화, 조각, 사진, 설치 부문으로 나뉘며.
심사위원 특별상과 유명한 화가의 이름을 붙인 루이 질로 상, 샤를 코테 상 등이 있고.
동메달, 은메달, 금메달이 있다.
거기에 새로 추가된 상이 특별 전시상.
“다음은 아르누보 공모전에서 입상한 열 분께 특별 전시상을 드리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호명하는 순서대로 올라와 주시길 바랍니다.”
상금을 더 받는 건 아니고 상패만 하나 더 받는 일이다.
‘그나저나.’
이 인간은 대체 어디 갔지.
시상대에 올라야 하는데도 어디서 뭐 하고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다녀올게요.”
“그래.”
할아버지가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셔서 데미안 카터 일로 싱숭생숭했던 마음이 조금 가셨다.
“어?”
무대로 오르는 길에 블랑쉬 파브르와 눈인사를 했다.
전화번호가 없어서 어떻게 연락할까 고민했는데, 이따가 물어봐야겠다.
* * *
앙리 마르소가 문을 박차고 들어서자 셰바송 씨몽 회장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점잖게 좀 다녀! 놀랐잖은가!”
“어떻게 된 거야.”
셰바송은 잔뜩 흥분한 앙리 마르소를 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앉게.”
“말해!”
앙리 마르소가 한 번 더 다그치자 셰바송 씨몽이 그의 손을 붙잡아 앉히려 했다.
성난 영웅은 그를 뿌리쳤고, 셰바송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그를 진정시켰다.
“이미 정해진 일이었어. 지금 와서 어떻게 없던 일로 하겠나.”
“웃기지 마. 협회가 그딴 놈에게 상이나 주라고 있어?”
분개한 앙리 마르소가 책상을 세게 내려쳤다.
데미안 카터가 아르누보 공모전에서 사퇴하고 그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던 차.
그가 이미 SNBA 살롱전 공모에 입선한 사실을 알게 된 앙리 마르소는 협회에 재심사를 요구했다.
고훈이 불쾌함을 느껴던 것과 같이 앙리 마르소 또한 데미안 카터가 대회 규정을 교묘히 이용해 본인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 활용했다고 판단했다.
“그가 부정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이미 정해진 일을 어찌 되돌리겠나. 재심사에서도 올라온 걸 어쩌라는 말이야.”
앙리 마르소가 주먹을 쥐었다.
“영감도 알잖아. 그 자식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면서 그런 짓을 해?”
셰바송 씨몽이 앙리와 눈을 마주하고 한참을 고민한 끝에 진심을 털어놓았다.
“자넬 위한 일이었네.”
“뭐?”
“자네가 데미안 카터를 개새끼라고 했다고 전 유럽에 기사가 났어. 그런 상황에서 상까지 취소해 봐. 사람들이 자넬 어떻게 보겠나!”
“그걸 왜 영감이 신경 써!”
“신경 써야지!”
셰바송이 버럭 소리쳤다.
셰바송 씨몽은 두려웠다.
언론과 대중이 인식하는 것처럼 프랑스 국립 예술 협회는 앙리 마르소 개인이 좌지우지하는 단체가 아니었다.
그럴 만한 역량을 충분히 갖췄음에도 앙리 마르소는 이사로서의 위치를 지켜주었다.
그런 사실이 충분히 인지되지 않은 상황에서 프랑스 국립 예술 협회가 데미안 카터에게 주기로 한 상을 취소했을 때.
언론과 대중이 앙리 마르소를 어떻게 볼 것인지 너무나 두려웠다.
“자네 말고 그들을 상대할 사람이 또 누가 있나.”
“…….”
“너무나 오랫동안 굳건히 결속한 놈들이야. 그런 카르텔을 무너뜨리고 새 시대를 열고 싶으면 이미지를 생각해야지.”
셰바송 씨몽이 앙리 마르소를 달랬다.
“자네도 잘 알지 않나. 누굴 상대하는지. 고작 데미안 카터만의 문제가 아니잖아!”
앙리 마르소에게 조금의 시간만 있다면 데미안 카터 한 사람은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
위법한 일을 저지르지 않고서도 앙리 마르소에게는 그럴 만한 재력과 권력이 있었다.
문제는 데미안 카터 뒤에 있는 존재들.
사치 갤러리를 포함한 몇몇 갤러리와 영국 소더비 또한 문제가 아니었다.
미술계가 발칵 뒤집히겠지만 공정하게 운영되는 미술관과 경매장이 있기에 잠시 공백이 생길 뿐이었다.
문제는 그들을 후원하는 이들이었다.
현재까지 드러난 사람은 제이 조플링과 몇몇뿐이라 대체 얼마나 많은 적을 상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자네밖에 없어. 그런 자네에게 힘을 줄 수 있는 건 언론과 대중뿐이고!”
앙리 마르소가 눈을 감았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상황을 냉정히 돌아보았다.
셰바송 씨몽의 말대로 그들을 상대할 힘을 갖춘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나의 범주로 묶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적을 상대해야 했기에 지금껏 신중하고 또 신중했었다.
앙리 마르소가 냉정을 되찾은 기색을 보이자 셰바송이 입을 열었다.
“혼자 싸우려고 하지 말게. 개혁은 혼자 이룰 수 없지만 자네가 없으면 시작조차 할 수 없어.”
“…….”
“같은 뜻을 가진 사람을 한 명씩 모아야 해. 자네가 힘이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야. 상대할 자들이.”
“알아.”
셰바송 씨몽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앙리 마르소는 어렸을 적부터 영민했다. 지식이 많을 뿐 아니라 판단력도 좋았다.
다만 과격한 성격이 걱정이었다.
본인과 미셸 플라티니가 곁에서 불같은 성정을 제어하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나.
미술 시장을 장악한 카르텔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포옹력 있어야 했고, 앙리 마르소에게는 그러한 면모가 부족했다.
구심점이 되는 앙리 마르소와 주변을 아우를 수 있는 사람이 함께해 준다면 믿음직할 텐데, 셰바송 씨몽은 안타까워했다.
한편 앙리 마르소는 본인에게는 없는 포옹력을 지닌 사람을 잘 알고 있었다.
고훈.
건방진 꼬맹이 주변에는 사람이 몰렸다.
작품이나 사람을 대할 때 편견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 될 일.
앙리 마르소의 시대는 미래의 귀감이 되어야만 했다.
부담이 될 순 없었다.
“이 일은 내가 해결할 테니 신경 쓰지 마.”
“앙리.”
앙리 마르소는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시선을 마주하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저런 걸 참을 수 있다고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