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15화
41. 새 나라의 어린이(3)
험한 말을 들은 기자가 당황했다.
└아니 너네 살롱전이잖앜ㅋㅋ 꺼지라고 하면 어떡햌ㅋㅋㅋㅋ
└뜬금없네 ㅋㅋㅋ
└훈이랑 앙리 온도 차 무엇ㅋㅋㅋ
└그러게 ㅋㅋ 훈이 진짜 뽀송뽀송한데 앙리만 피곤해 죽음ㅋㅋㅋ
└원래 애 키우는 게 힘들어. 애랑 개랑 같이 놀게 하면 개도 지침.
└많이 놀아줬구나 ㅠㅠㅠ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럼?
└암튼 아님. 우리 형이 가정적일 리가 없음.
시청자들이 여러 추측을 내놓는 사이 고훈이 대신 나섰다.
“잠을 못 자서 그래요.”
자기 관리에 철저한 앙리 마르소가 잠을 못 잤다고 하면 분명 큰 이유가 있을 터.
기자들은 아르누보 공모전에서 우승한 <미>가 연작 중 한 점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는 한편, 개발 중인 개벽에 관한 일 때문이지 않을까 추측했다.
기자들이 마이크를 고훈에게 향하고 질문을 쏟아냈다.
“살롱전에서 공개한다는 미의 완성본 때문입니까?”
“프로젝트 개벽과 관련한 일인가요?”
고훈이 고개를 저었다.
“어제 드라마 같이 봤거든요.”
“드라마?”
기자들이 눈을 깜빡였다.
미술계의 변혁을 일으키기로 천명한 앙리 마르소가 일주일 동안 무슨 일을 했는지 듣고자 했거늘.
드라마 때문에 밤을 새웠다고 하니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평소 철저한 보안 속에 사생활이 노출되지 않은 앙리 마르소의 일상을 궁금해하는 이들도 다수였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앙리가 고훈을 막아서려고 하자 한 기자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물었다.
“어떤 드라마를 보셨습니까?”
“피의 낙인이요.”
고훈이 인터뷰를 할 때나 TV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몇 번 언급한 제목이었다.
기자 중에서도 어떤 드라마인지 알아보고자 했으나, 해외 서비스가 안 되는 드라마라 어떤 내용인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프랑스에서 서비스는 아직 안 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보셨습니까?”
“그러니까요. 신기하게 자막도 없는데 보더라고요.”
고훈이 앙리 마르소를 올려다보자 모든 기자가 그 시선을 좇았다.
잔뜩 인상을 쓰고 있던 앙리 마르소가 드물게 당황했다.
“어떻게 된 일인가요?”
“어떻게 된 거예요?”
고훈도 덩달아 물었다.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돼. 그냥 화면만 봤어.”
앙리 마르소가 자리를 벗어나려 했으나 기자들이 이번 SNBA 살롱전 최고의 요인을 그냥 보낼 리 없었다.
“한국말은 언제 배웠어요?”
고훈이 재차 물었다.
“배우긴 뭘 배워? 모른다니까.”
“모르긴 뭘 몰라요. 다 알아듣던데.”
고훈은 앙리 마르소가 드라마 내용을 완전히 이해한다고 확신했다.
간간이 주인공에게 공감하거나 욕을 하는 둥 모르는 사람이면 결코 할 수 없는 반응을 보인 탓이었다.
“그러고 보니 가끔 내 방송 들어와서도 채팅 치는 거 보면 이해하는 것 같던데.”
“모르는 일이야.”
고훈이 앙리 마르소를 빤히 올려다보다가 한국말을 꺼냈다.
“오늘 아침 커피에 침 뱉었는데.”
앙리 마르소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당장에라도 멱살을 잡고 흔들고 싶었지만, 고훈이 하는 인터넷 방송을 보고자 한국어를 익힌 사실을 밝히기엔 자존심이 상했다.
고훈이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입을 뗐다.
“남자 주인공 아빠랑 여주가 과거에 사귄 거 몰랐죠?”
앙리 마르소가 눈을 크게 떴다.
“미쳤어! 그걸 왜 말해!”
“봐요. 알아듣잖아요.”
상황을 지켜보던 기자들은 두 사람의 대화를 어떻게 기사화할 수 있을지 난감해했다.
* * *
“친애하는 프랑스 국민 여러분, 사랑하는 예술가 여러분. SNBA 살롱전에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프랑스 국립 예술 협회 셰바송 씨몽 협회장이 나서서 인사했다.
인상이 푸근하고 목소리에 힘이 있어서 언제 봐도 호감이다.
“야.”
마르소가 불러 고개를 돌렸다.
“아니라고.”
“알겠어요.”
“알겠다는 표정이 아니잖아.”
“황칠 같은 도료 구하다 보니 자연스레 배웠다면서요.”
“그래.”
이 사람은 자꾸 이상한 데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나도 익히는 데 꽤 시간이 걸렸던 한국말을 그 짧은 시간에 한국말을 소화해낸 것이 신기할 뿐인데.
자꾸 왜 배웠는지 강조한다.
“SNBA 살롱전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구호로 시작되어 올해로 167회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167년이라는 기나긴 역사.
현대적인 의미의 예술이 시작된 것이 인상주의 화가들이 활동할 시기로 보고 있으니, SNBA 살롱전은 현대적 예술과 역사를 나란히 했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
“야.”
“또 왜요.”
“커피에 침 뱉은 거 사실이야?”
“아뇨.”
“증명해.”
“그걸 어떻게 증명해요. 믿기 싫으면 말아요.”
“너 이 빌어먹을.”
“커험. 험.”
마르소가 목소리를 높이자 연설하던 셰바송 씨몽 회장이 헛기침해서 주의를 주었다.
마르소도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진 않은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돌렸다.
정말로 뱉었다고 해서 좀 더 놀려 보는 것도 재밌었을 듯싶다.
연설을 들으며 안내 책자를 폈다.
SNBA 살롱전 전시관은 크게 나라별로 나뉜다.
아르누보 공모전과는 별도로 진행된 공모전에서 당선된 작품과 초청받은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는데.
물론 한국관도 있다.
한국회화 분야에서는 할아버지가 초청받았는데 다른 작가들은 어떤 작품을 선보였는지 궁금하다.
할아버지를 기다리며 둘러보면 되겠다.
‘아슬아슬할 것 같은데.’
시상식은 4시부터 6시까지라서 할아버지가 도착하실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럼 예술을 위한 예술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짝짝짝짝-
셰바송 씨몽 회장이 인사하자 초청객들이 박수를 보냈다.
개최식이 끝났으니 한국관을 둘러보고자 밖으로 나섰다. 마르소도 일정이 있을 테니 여기서 헤어지는 게 서로에게 좋을 거다.
“난 한국관으로 갈 거예요.”
“가.”
“……볼일 없어요?”
“있어.”
“그럼 일 봐요. 난 할아버지 오실 때까지 구경하면 돼요.”
“길 잃으면 어쩌려고.”
“길을 왜 잃어요.”
“그럼 앞장서든가.”
한국관은 카루젤 드 루브르관에서 전시된다고 하니 아마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될 거다.
“아.”
발을 옮기자 마르소가 목덜미를 붙잡고 오른쪽으로 옮겼다.
“이쪽이야.”
“…….”
앙리 마르소를 따라서 걷기를 얼마간 한국 작가들의 작품이 모인 곳에 이르렀다.
할아버지 작품은 대부분 순회 전시 중이라 단 한 점만 전시되어 있는데, 내가 좋아하는 소나무 그림이다.
많이 봤던 작품이라 지금은 다른 작가 작품을 보고 싶다.
장미래를 제외하곤 한국 작가 작품을 그다지 많이 접하지 못한 탓인데, 서인호란 작가 이름이 눈에 띈다.
“흠.”
앙리 마르소가 먼저 발을 뗐다.
“아는 사람이에요?”
“잘 알지.”
마르소가 타인을 잘 안다고 하니 의외다.
“친해요?”
“아니.”
그럼 그렇지.
“그럼 어떻게 알아요?”
“2013년이었나. 그 사람 작품을 보고 개벽을 준비하기 시작했어.”
2013년이라면 15년 전 일인데 연도를 기억할 정도면 크게 감명받았던 모양이다.
마르소가 자기 입으로 ‘개벽’을 발상할 수 있었던 이유라고 할 정도니까.
어떤 작품일까.
설렌 마음으로 전시장으로 들어서자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머리에 이르렀다.
“세상에.”
전시장 안에 집이 있다.
3층 높이의 집은 반투명해서 안이 그대로 비치고 내부에는 여러 방과 가구가 마찬가지로 반투명한 소재로 자리하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니 천이다.
아주 얇은 천으로 집을 지어놓은 거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영화 <기암성> 그래픽 작업 중에 컴퓨터로 보던 모델링을 그대로 현실에 옮겨놓은 것만 같은데, 실제로 마주하니 압도되고 만다.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있었던 모양.
정신을 차리고 설명문을 확인했다.
제목은 <집>.1)
여느 동시대 예술가답게 감상을 제한하는 제목이 아니라 생각할 거리를 열어둔 단순한 제목이다.
그러나 작품을 마주했을 때의 충격과 감동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수도 없이 봤지만.”
마르소가 입을 열었다.
“이 사람의 작품을 보기 전까지 설치 미술에서 아름다움을 느껴본 적 없었어.”
작품을 보는 눈이 깐깐한 앙리 마르소가 극찬할 만큼 멋지다.
외형적 아름다움도 그렇지만, 마르소가 말하는 건 서인호 작가가 자신만의 철학을 내보이는 방식일 것이다.
어느 방향으로 봐도 집 외부와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는데, 심지어 가구마저도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지 알아볼 수 있다.
내가 봤던 그 어떤 작품보다 대작이며 완성도가 높다.
이런 작품이 존재할 수 있으리라고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다.
심지어 <집> 안에 들어가서 내부에서 구경하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작품이 단순히 입체적으로 표현된 것이 아니라 ‘실존’한다는 점에서, 앙리 마르소가 왜 서인호 작가 덕분에 ‘개벽’을 구상할 수 있었다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앙리 마르소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섰다.
“문화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게 뭐라고 생각해?”
답이 정해진 질문이다.
이런 작품을 앞에 두고 다른 답을 생각할 수 없다.
“집이요.”
“그래. 미국으로 넘어갔을 때 느낀 문화적 충격을 표현하려고 시작했다고 하더군.”
확실히 집은 한 사람의 흔적이 가장 짙게 남겨진 존재다.
일상이 이뤄지는 공간이니까.
긴 역사를 이어오고 변화한 건축 양식도 그렇고 내부에 어떤 가구가 있는지 모양은 어떤지 어디에 배치되어 있는지 모든 것이 흔적이다.
나 또한 <아를의 침실>을 통해 나를 보인 적 있었다.
방은 자화상만큼이나 ‘나’를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수단이다.
그것을 아주 얇은 천을 기우고 꿰매서 표현하다니.
정말이지 감탄할 수밖에 없다.
많은 작품을 보진 못했지만 내가 접한 어떤 동시대 예술품보다 충격적이고 설렌다.
* * *
1)서도호 작가님과 서도호 작가님의 작품을 모티프로 하였습니다.
서도호(1962~):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예술가.
20세기 후반부터 주목받기 시작하여 현재는 명실공히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거장.
휘트니 미술관 필립 모리스 분관, 테이트 모던 갤러리, 시애틀 미술관 등에서 여러 개인전을 열었다.
로스앤젤레스 미술관, 텍사스 휴스턴 미술관이 작품을 구입하여 전시하고 있다.
*꼭 한번 찾아보시길 권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