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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반 고흐-214화 (169/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14화

41. 새 나라의 어린이(2)

앙리 마르소는 눈을 가늘게 뜨곤 고훈의 시험지를 확인했다.

고훈은 FLE(프랑스에서 외국인을 위해 마련한 프랑스어 수업) 과정에서 특출한 성적을 보였다.

문법, 어휘력, 철자법, 구술 능력에서 고등 교육을 수료한 현지인 수준이었다.

평소 대화를 나눌 때 큰 무리가 없던 터라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바였으나.

역사, 지리, 문학 등 프랑스 문화에 관련한 전반적 지식은 물론 제스처와 같은 사회 통념에도 일정 부분 이해하고 있었다.

앙리 마르소가 초빙한 교사는 고훈이 FLE 과정을 이수할 필요가 없으며, 약간의 시간만 들이면 DALF(Diplôme Approfondi de Langue Française: 프랑스어 심화 자격증)도 단기간 안에 취득할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또한 수리적 사고력도 평균보다 우수했다.

프랑스 중등교육 과정은 모두 익히고 있었으며, 몇 차례 확인한 결과 단순 암기가 아닌 원리를 설명하는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그 외에도 지금까지 대화를 나눠본 결과 자산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절세하는 방법 등의 기초 지식 또한 지니고 있었다.

사고 이후 고수열이 교육을 잘한 덕분인지는 모르겠으나.

앙리 마르소는 기존에 고훈이 학습 능력이 떨어진다는 조사 결과가 잘못되었다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이 정도는 해야지.’

그는 자신의 유일한 경쟁자가 수준급 지능을 가진 걸 확인하여 흡족했다.

앙리 마르소가 4시간에 걸친 시험에 녹초가 된 고훈을 바라보았다.

책상에 널브러진 소년은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나쁘지 않네.”

고훈은 반응하지 않았다.

앙리 4세 중학교 입학 및 유학 관련 공부는 어차피 해야 할 테고, 지금으로서도 큰 문제 없이 합격할 수 있는 걸 확인했으니 4시간에 걸친 시험은 문제가 아니었다.

단지 지쳤을 뿐이었다.

“일어나.”

“싫어.”

“일어나.”

“싫다고. 또 뭘 시키려고.”

“아르센.”

앙리가 그의 비서를 불렀다.

아르센이 익숙하게 고훈을 안아 들었다.

어제와 오늘, 저항이 무의미함을 깨달은 고훈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곤 몸에 힘을 풀었다.

눈을 감고 몸을 맡기기를 얼마간.

향긋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높은 침대와 은은한 조명 그리고 초콜릿이 가득 쌓인 쟁반이 눈에 띄었다.

아르센은 눈을 크게 뜬 고훈에게 초콜릿을 가져다주며 달랬다.

“마사지를 충분히 받고 20분 정도 목욕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마사지요?”

고훈이 초콜릿을 입에 넣고 물었다.

“책상이나 이젤 앞에서 장시간 작업하면 어깨, 목, 등 근육 등이 뭉치며 섬유화가 진행됩니다. 스트레칭과 마사지를 충분히 받으셔야 합니다.”

고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근육이 섬유화된다는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해당 부위 근육이 섬유화되면 통증이 생깁니다. 심해지면 팔과 손목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에 예술가에겐 특별히 신경 써야 하는 일이죠. 또한 목과 등 근육 섬유화는 뇌로 향하는 혈류량을 줄여 심각한 경우 뇌 기능 저하의 위험도 있습니다.”

“…….”

“작가님은 고훈 군이 어렸을 적부터 바른 생활을 습관화하고 관리를 받아 오랫동안 건강히 활동하시길 바랍니다.”

고훈이 별말 하지 않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아르센이 빙그레 웃었다.

“저녁 식사 이후에는 편히 시간을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원하시는 일은 무엇이든 들어드리라고 했으니 편히 말씀하세요.”

고훈이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푹신한 소파에서 큰 화면으로 드라마를 보고 싶어요.”

“준비해 두겠습니다.”

잠시 후.

마사지를 받고 목욕을 하고 난 고훈은 황홀함 속에서 저녁 식사를 마쳤다.

아침부터 조깅과 스트레칭, 개벽 테스트, 시험 문제 풀이로 몸과 마음이 지쳤지만 훌륭한 식사와 휴식 덕에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고훈은 앙리 마르소의 개인 시청각실에 앉아 며칠 동안 보지 못한 웹드라마 <피의 낙인>을 몰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야.”

앙리 마르소가 눈을 찌푸렸다.

“왜요.”

“이거 15세잖아.”

“재밌어요.”

고훈이 알퐁스 멘디 쇼에 나와 <피의 낙인>을 소개한 일을 기억한 앙리 마르소가 스크린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나 오늘 하루 충실한 고훈에게 취미 활동을 즐길 권리는 있었고 15세 관람가라면 보호자가 함께하는 한 어린아이라도 볼 수 있었다.

“귀찮게.”

앙리 마르소가 고훈과 나란히 앉았다.

고훈이 인상을 썼다.

“뭐예요?”

“지금은 내가 보호자니까 같이 봐야 할 거 아냐.”

“보호자는 무슨. 자막도 없어요.”

“상관없어.”

앙리 마르소가 시간을 확인했다.

“9시까지 봐.”

“안 돼요. 오늘 밀린 거 다 볼 거예요.”

“애들은 9시에 자야 해.”

고훈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고 리모컨을 조작했다. 유난히 길었던 하루를 망칠 순 없었다.

* * *

드라마를 보다 보니 어느새 잠들었던 모양이다.

“으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불을 덮고 있다.

-그게 사랑이야? 아무 데도 못 가게 하고 다른 사람이랑 연락하는 것조차 방해하는 게 사랑이냐고!

<피의 낙인> 5화에서 나온 대사다.

틀어놓고 잠든 탓에 한 바퀴를 돌아 처음부터 재생된 것 같다.

“깜짝이야.”

몸을 일으키니 퀭한 얼굴로 <피의 낙인>을 보고 있는 앙리 마르소를 볼 수 있었다.

“뭐야.”

“조용.”

“왜 여기 있어. 설마 밤새웠어요?”

꼴을 보니 밤새 보고 처음부터 돌려본 게 분명하다.

-당신 미쳤어. 미쳤다고.

-…….

-내 기분이 어떤 줄 알아? 내 생각 한 번이라도 해봤어? 당신이랑 있으면 숨이 막혀. 답답해 미칠 것 같다고! 그런데도 날 사랑한다고?

남자가 여자에게 과하게 집착한 탓에 갈등이 생기는 장면이다.

여자가 신고했다면 아마 쇠고랑을 찼을 게 분명한 수준인데 남자는 아주 당당하다.

-그래.

-뭐라고?

-살아도 내 곁에서 살고 미쳐도 내 앞에서 미치라고.

-그게. 그게 할 소리야? 너 정말 미쳤니?

-그래! 네가 할아버지한테 안겨서 웃을 때마다 미쳐 버릴 것 같아. 너도 그 인간도 죽여버릴 것 같다고!

훌륭한 미친놈이다.

“그럴 수 있지.”

앙리 마르소가 읊조린 혼잣말이 무섭게 느껴졌다.

삐비빅- 삐비빅-

때마침 알람 소리가 울리며 커튼이 걷혔다. 아직 밖은 어둡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아침 5시 30분. 앙리 마르소가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씻고 나와.”

또 뛰자고 할 게 뻔하다.

“잠깐만 앉아 봐요.”

“왜.”

“저 두 사람 어떻게 될지 안 궁금해요?”

앙리 마르소가 스크린을 힐끔 쳐다보았다.

“관심 없어.”

“저 여자가 왜 저 남자 할아버지랑 만나는지 안 궁금하냐고요.”

“복수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왜 복수하는데.”

“……돈?”

다음 화에 나오는 내용은 아직 못 본 모양이다.

구필 화랑에서 그림을 팔 때처럼 호기심을 자극하고자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이렇게 훌륭한 작품을 못 알아보냐고, 그런 당신이 너무 불쌍하다는 얼굴이어야 한다.

마르소가 인상을 썼다.

“뭔데.”

“생각해 봐요. 겨우 돈이겠어? 사랑하는 남자까지 거부하면서 다가가려는데? 자기 경력까지 위협받을 수 있는데?”

“쓸데없는 짓 말고 빨리 말해.”

웃으면 안 된다.

스크린을 향해 슬쩍 시선을 옮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예상대로 마르소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밤을 새워서 봤을 정도니 분명 취향에 맞을 테고, 아무리 규칙적인 생활을 해왔더라도 인간은 호기심과 흥미를 이겨낼 수 없다.

“흥.”

앙리 마르소가 시청각실을 나섰다.

평소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다 보니 몰랐는데, 생각보다 자제력이 훨씬 강하다.

하기는 그러니 어렸을 적부터 크게 주목받았을 테지.

아쉽게 되었다.

이불을 정리하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또 늑장 부린다고 뭐라 할 기세다.

“알았으니까 그만 해요.”

고개를 들자 앙리 마르소가 성큼성큼 걸어와 소파에 앉았다.

“밖이 추워.”

“……근데요?”

“감기 걸린다고.”

마르소가 <피의 낙인> 6화를 틀었다.

여기서 더 자극하면 괜한 자존심 때문이라도 밖으로 나갈 테니 모른 척해야 한다.

“오후에 살롱전 해야 하니까 컨디션 관리하라는 말이야.”

어제 누구 말대로 궁색한 변명이지만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 * *

2028 SNBA 살롱전은 현존하는 살롱전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살롱전으로.

매년 세계 각국의 거장을 초청하여 현재 가장 주목받는 작가와 미술품을 즐길 수 있는 행사였다.

올해는 세계적으로 큰 흥행을 일으킨 아르누보 공모전과 함께하여 이목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언론은 그중에서도 현 세대를 대표하는 예술가 앙리 마르소와 작년과 올해 혜성처럼 등장한 고훈를 조명했다.

각 나라를 대표하는 인기 작가 사이에서 오직 작품만으로 예술성과 대중성을 증명한 두 사람이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되었다.

“앙리 마르소다!”

루브르 박물관 앞에서 아침부터 대기하던 기자들이 앙리 마르소의 황금 롤스로이스가 나타나자 앞을 다투었다.

비서 아르센이 뒷문을 열자 고훈이 폴짝 뛰어내렸다.

차르르르르륵-

카메라 셔터 소리가 연달아 났다.

“고훈! 여기 좀 봐요!”

“고훈이 왜 저기서 내리지?”

“같이 왔어?”

“앙리는?”

“아르누보 공모전 트로피는 결국 누가 가져갔습니까!”

“앙리 마르소 집에서 합숙하고 계시단 소문이 사실입니까?”

고훈이 평소보다 혈색 좋은 얼굴로 웃으며 기자들을 상대했다.

“합숙은 아니고 잠깐 신세 지고 있어요. 트로피는 돌려줬고요.”

기자들이 고훈에게 한눈이 팔린 사이 앙리 마르소가 비틀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기자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앙리 마르소의 눈이 빨갛게 충혈되었고 그 주변이 어두웠기 때문이었다.

평소 자기 관리에 철저한 이미지와 달리 몹시 피곤해 보였다.

“마르소 씨, 무척 피곤해 보이시는데 건강 문제인가요?”

“방금 앙리 마르소 작가가 루브르 박물관 앞에 도착했습니다. 이틀 만에 모습을 드러낸 그는 몹시 피로한 기색을 보였는데요,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마르소 씨!”

앙리 마르소가 잔뜩 인상을 쓰고 고개를 들었다.

“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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