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13화
41. 새 나라의 어린이(1)
아침 5시 30분.
고훈은 어머니의 품과 같이 포근한 침대와 햇살을 머금은 이불 속에서 단잠을 즐기고 있었다.
앙리 마르소는 그런 고훈이 못마땅했다.
본인과 함께 새 시대를 열어젖힐 인간이 게으름을 피우는 꼴을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일어나.”
앙리가 고훈을 깨웠지만, 곤히 잠든 소년은 반응하지 않았다.
“일어나.”
몇 번을 더 부른 끝에 인내심이 바닥 난 앙리 마르소가 고훈을 흔들었다.
“흐어?”
잠에 취한 고훈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눈 떠.”
“하아.”
갑자기 잠을 깨운 남자가 앙리라는 사실을 깨달은 고훈이 한숨을 내쉬고 다시금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앙리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일어나.”
“5분만…….”
고훈의 숨소리가 다시금 안정을 찾아갔다.
앙리 마르소가 이불을 벗겨내고 커튼을 걷어냈다. 주변은 아직 어둑어둑했지만, 창문을 열자 한기가 찾아들었다.
고훈이 몸을 웅크리며 버티다가 이불을 찾고자 일어났다.
소년의 시야에 이불을 든 앙리 마르소가 들어왔다. 고개를 돌리니 밖은 아직도 어두웠다.
“아침부터 왜요.”
“조깅할 거니 옷 입어.”
“조깅은 무슨.”
고훈이 있는대로 얼굴을 찌푸리며 짜증을 냈다.
빈센트 반 고흐로 살 적부터 바른 생활을 해오던 그였으나, 해도 뜨지 않은 시간에 조깅하자는 앙리 마르소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
앙리는 고훈이 이불을 빼앗으려 하자 소년을 번쩍 들어 세면대 앞에 두었다.
“씻어.”
“아니. 지금 몇 신데요.”
“5시 40분.”
고훈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따지고 들거나 반항할 기운도 없이 오직 좀 더 자고 싶을 뿐이었다.
“이따 해요. 한 시간. 아니, 두 시간만 더 자고.”
앙리 마르소가 고훈의 옆구리를 잡았다.
“무슨 짓이야!”
뜻하지 않은 감각에 깜짝 놀란 고훈이 펄쩍 뛰었다.
“살 봐. 그렇게 돼지처럼 먹으니까 찌는 거 아니야.”
“뭐래. 내가 찌든 말든 무슨 상관인데.”
“아름다운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드는 법이야. 어리다고 막 살면 금방 망가져.”
“아니.”
“금방 죽고 싶어? 그림 더 안 그려?”
“……운동 좀 안 한다고 금방 죽는 건 비약이 심하잖아요.”
“건강은 작은 방심 때문에 잃어. 방심이 습관이 되고 습관이 삶이 되고 삶이 운명을 결정한다는 말 몰라?”
“…….”
“지금처럼 먹고 운동도 안 하면 금방 살쪄. 비만은 성인병을 유발하고 기저질환이 있는 상태에서 합병증이 찾아오면 이미 늦어.”
“그러니까 한 시간만 자고.”
“미적인 관점으로도 그 얼굴을 하고 관리하지 않는 건 직무유기다. 씻고 나와. 5분 주지.”
고훈은 앙리 마르소가 나선 방문을 허망히 바라보았다.
그의 고압적인 제안이 무척 짜증 났지만 과거 건강을 잃어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소년은 분한 마음을 억누르고 세수하기 시작했다.
* * *
“하악. 하악. 하악.”
현관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졌다.
서 있을 힘은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어 그대로 누워 있으니 마르소가 다가왔다.
“늦어.”
아주 작은 힘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가만 놔두지 않았을 거다.
“5㎞에 50분.”
5㎞나 뛰었다고?
“저질이야.”
“하아. 하아.”
“30분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뛰어. 하루도 빼먹지 말고.”
“웃기고. 있네. 누구 마음대로.”
누워서 숨을 고르니 조금씩 정신은 돌아오지만 정말 일어날 힘이 조금도 없다.
“일어나.”
“그놈의 일어나란 소리 좀 제발 그만해.”
“아르센, 일정 설명해.”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다.
“고생하셨습니다.”
아르센이 수건을 주었지만 땀을 닦아내는 일조차 귀찮다.
“아침 식사 후 정오까지 개벽 테스트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고개를 저었다.
“오늘. 못 해요.”
목에 칼을 들이밀어도 못 한다.
새벽에야 잠결에 무심코 말을 들었지만, 두 번은 안 통한다. 무슨 말을 해도 오늘은 아무것도 안 할 거다.
“말했잖아. 할 일 많다고.”
“그럼 이렇게 뛰게 하질 말든가.”
“고작 그거 뛰어놓고 엄살이야?”
“엄살이고 나발이고 못 한다고. 힘이 있어야 뭘 하지.”
운동도 적당히 해야지.
갑자기 5㎞를 뛰게 하니 기력이 남아날 리 없다. 오늘은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지쳐서 못 한다고?”
“그래.”
“아르센, 저 녀석 회복 캡슐에 집어넣어.”
“알겠습니다.”
“아니.”
“힘없다며. 한 시간 뒤에 아침 먹이고 작업실로 데려와.”
“그렇게 하겠습니다.”
“…….”
할아버지가 내게 생일 선물로 사 주신 회복 캡슐을 더 자주 사용하시는데, 운동을 더 하기 위해 들어가시는 걸 보고 질린 적 있다.
그렇게까지 열성적이니 그 연세에 그런 근육을 유지하시는 거겠지만 자의가 아니라 타의로 피로를 강제로 회복되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알 것 같다.
“아, 그리고 이걸.”
저항할 힘도 없어 회복 캡슐까지 이끌려 가니 아르센이 음료가 든 병을 주었다.
“마담 셰리 가도가 만들어 주신 특제 음료입니다. 피로가 풀릴 겁니다.”
이온 음료 같은 건가 싶다.
빨대를 물고 쭉 빨아들이니 향긋한 레몬향이 입 안을 가득 채운다.
달다.
“이게 뭐예요?”
“꿀 레몬 에이드입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하드라마우트 산맥에서 수확한 꿀과 마르소 가문이 운영하는 농장에서 재배한 레몬으로 만들었죠.”
이런 걸 플라시보 효과라고 했던가?
좋은 재료로 만들었다는 말을 들으니 방금 마셨는데도 몸에 힘이 돌아오는 것 같다.
“감사합니다.”
“아침 식사로는 특별히 한국풍으로 준비했습니다.”
음식으로 유혹해서 어떻게든 일을 시킬 의도였겠지만 이번만큼은 넘어가지 않는다.
한식을 좋아하긴 해도 내가 좋아하는 한식은 한정식처럼 비싼 음식이 아니라 한국식 피자, 치킨, 짜장면 같은 대중적인 음식이다.
“한국식 소고기 스테이크죠.”
아침 식사부터 소고기라니.
의외의 공격을 받아버렸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소고기 샤롤레종 중에서도 최고 등급으로 준비했습니다.”
하마터면 알면서도 마르소의 간악한 술책에 넘어갈 뻔했는데 다행이다.
제법 날카로운 수였다.
프랑스는 예로부터 광활한 평야 덕분에 축산업이 발달했으나, 아르센은 프랑스인들이 좋아하는 고기와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고기가 다름을 간과하고 있다.
프랑스에서 최고 등급이라고 하면 아마도 기름 하나도 없는, 마블링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살코기만 있는 고기일 거다.
물론 1세기 전에 내가 먹던 고기보다는 품질이 훨씬 좋아졌겠지만, 지방이 없는 소고기는 그리 끌리지 않는다.
“84개월 먹은 소의 고기는 연유처럼 풍미가 함축되어 씹을수록 고소하죠. 육질은 쫀득쫀득한 식감을 즐기기가 무섭게 입 안에서 녹아내리고요.”
“…….”
그래도 기름장이 없으면.
“또한 켈틱 솔트와 알라에아 시 솔트를 준비했습니다.”
“켈틱?”
“프랑스 중서부, 대서양에서 채취한 천일염입니다. 미네랄이 풍부하여 스테이크의 맛을 한껏 끌어올리죠. 알라에아 시 솔트는 하와이 전통 소금으로 감칠맛이 두드러집니다.”
“감칠맛.”
“올리브오일과 함께 스테이크에 찍어 먹으면 그보다 맛있을 수 없죠.”
“…….”
“운동을 하셨으니 그에 걸맞게 영양 공급도 하셔야 합니다. 그럼 푹 쉬십쇼.”
아르센의 언변에 넘어간 느낌이다.
그렇다고 해서 진한 풍미의 소고기를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얌전히 회복 캡슐에 들어갔다.
* * *
집중 회복 코스를 받고 훌륭한 아침 식사를 마치니 억울하게도 몸이 훨씬 개운하다.
이런 상태라면 그림을 두 점은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저기 가서 써.”
마르소가 건넨 VR을 받아들고 테스트 기기 가운데로 갔다.
“익숙해지는 게 먼저야. 마음대로 써 봐.”
붓이 아니라 봉으로 그리니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컨트롤러를 붓 모양으로 만들 순 없어요?”
“버튼 위치 때문에 힘들어.”
“음성으로 동작하게 하면요?”
“고려하지.”
어제 잠들기 전에 구상했던 스케치를 그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평면 위에서만 그리다가 입체 공간을 전부 활용하려고 하니, 생각지 못한 문제가 발생한다.
여태까지의 방식으로는 그저 허공에 떠 있을 뿐이지 개벽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
“너 학교는.”
“앙리 4세 중학교로 가려고요.”
“앙리 4세?”
“왜요?”
물어놓고 보니 순간적으로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설마 거기 이사장이라든가 후원하고 있다든가 하는 건 아니죠?”
“아니야.”
다행이다.
앙리 4세라면 부르봉 왕가 최초의 왕으로, 마르소와 같이 백합 문장을 사용한다.
왕족이었다고 했으니 혹시나 관계가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는데, 예민했던 모양이다.
“시험은.”
“준비해야죠. 내년 9월에 입학이니까 지금부터 해야 할 거예요. 시험이 언제였더라.”
“6월.”
애초에 선을 활용하진 않았지만, 개벽을 활용하면 면을 선처럼 사용해야 한다.
이 개념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개벽을 활용한 그림은 단순히 기존 그림에 부피감을 더할 뿐이게 된다.
“그리 어렵진 않을 거야.”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잘 알지. 트리거 버튼 눌러봐. 브러시 단축키야.”
방아쇠 모양의 버튼을 누르자 붓 모양이 바뀐다. 누를 때마다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붓 모양으로 바뀐다.
“붓 모양 정해둘 수도 있어요?”
“설정 탭에서 바꿀 수 있어.”
이런 편의성은 나쁘지 않지만 기능이 워낙 여럿이라 숙달되기 쉽지 않은 것이 아쉽다.
“기능이 너무 많아서 좀 직관적이게 바꾸는 게 좋겠어요. 말로 하거나.”
“버튼 조작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겠지.”
“처음 하는 사람들은 다 그럴 걸요. 음성으로 하면 이 컨트롤러 모양도 붓처럼 만들 수 있잖아요.”
“흠. 아르센, 기록해 둬.”
“네.”
“다른 불편한 건?”
“없어요. 안경 쓴 사람은 이거 쓰는 게 좀 불편하지 않을까요?”
“액세서리가 따로 있어.”
안경 쓴 사람도 VR 기기를 불편하지 않도록 쓸 수 있게 개발한 모양이다.
게임 같은 건 잘 안 해서 모르지만 상당히 공을 들여 만들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아, 이 브러시 반응이 좀 느려요.”
“그러네. 아르센.”
“네, 기록해 두었습니다.”
방금 사용한 브러시가 빨갛게 표시되었다.
“시험 준비는 어떻게 하게?”
“글쎄요. 문제집 같은 걸 파나?”
“성적도 안 좋으면서 여유롭네.”
“내 성적이 안 좋은지 마르소가 어떻게 알아요.”
“……뻔하지.”
다시 태어난 뒤로, 같은 언어라도 사용하는 단어나 화법이 워낙 많이 달라져서 고생하긴 했다.
지금보다 어렸을 땐 거기에 적응하느라 성적이 안 좋았지만, 지금은 그리 나쁘진 않다.
한국 초등학교 학생들과 시험 난이도가 비정상적일 뿐이다.
“아르센, CM1 과정 시험 문제지 구해 와.”
“네.”
“그걸 왜 사요.”
“너한테 맡겨두면 답답해서 안 되겠어. 오후에는 시험 공부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