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12화
40. 마찰(5)
“금방 돌아올 테니.”
“싫어요.”
할아버지가 눈썹을 내렸다.
“내일부터 딱 이틀만 있으면 금방 데리러 갈게.”
“다녀오셔도 돼요. 호텔에 있을게요.”
“할아버지가 널 어떻게 혼자 두고 가니. 음?”
할아버지가 어떤 마음인지 충분히 이해한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할아버지에겐 10살 먹은 손자일 뿐이다. 하나밖에 없는 손자를 타국에 홀로 둘 순 없다.
나라도 그럴 거다.
“음? 할아버지가 미안해.”
할아버지가 나를 안고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어떻게 해야 이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밖에 안 나갈게요. 밥은 룸서비스로 먹으면 되잖아요.”
할아버지를 밀어내며 눈을 마주하자 틀렸다 싶다. 절대로 안 된다는 표정이다.
“후우.”
방태호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책임감 강한 그로서는 이 상황마저 자책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내가 할아버지의 바람을 거부할수록 할아버지와 방태호가 괴로워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약해진다.
“마틴 할아버지랑 같이 있을게요.”
꼭 마르소네 집에 갈 필요는 없다.
할아버지는 나를 믿고 맡길 사람이 필요한 거고, 그런 조건이라면 할아버지와 오랜 친분을 나눈 마틴 얀센이 훨씬 나은 선택지일 거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라면 여기서 그다지 멀지 않고, 나도 편히 있을 수 있으니까.
“어제 전화했더니 아를에 가 있다고 하더구나.”
“……그럼 피에르 말로.”
“오늘부터 휴가래.”
“휴가라도 이틀 정돈 신세질 수 있잖아요.”
“뉴질랜드로 서핑하러 간다니까 집에 혼자 있을 순 없잖으냐.”
이건 음모다.
누군가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조성한 게 분명하다.
일이 어떻게 이리도 딱 떨어지지.
“훈아. 마르소네에서 이틀만 자면 할아버지가 사 달라는 거 다 사 줄게.”
할아버지가 간절히 말씀하시니 더는 어쩔 수 없다.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 있는 법.
“제 나이가 몇인데 그런 말씀을 하세요.”
“훈아.”
더는 방법이 없다.
“……알겠어요.”
당장 오늘 아침에 절대로 같이 안 산다고 했거늘.
며칠 신세 지겠다고 하면 그 인간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눈앞에 훤하다.
* * *
저 봐.
할아버지와 함께 마르소 저택에 들르니 의기양양한 얼굴로 내려다본다.
예상보다 훨씬 얄밉다.
저 얼굴을 계속 볼 자신이 없어 시선을 피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고 싶지만, 할아버지와 방태호의 사정을 익히 아는지라 대놓고 거부하진 못하고 바닥을 차며 화를 삭였다.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그럼 내 믿고 가겠네.”
“걱정 마시죠.”
걱정하지 말라고 대답하는 것도 꼴보기 싫다.
“훈아.”
할아버지가 쪼그려 앉았다.
어쩔 수 없이 눈을 마주하니 할아버지가 얼마나 애가 타는지 알 것 같다.
“무슨 일 있으면 꼭 전화해. 언제든지 받을 테니까. 응?”
“그럴게요.”
무슨 일은 이미 벌어지고 말았다.
이틀 동안 최대한 부딪치지 않고 버티는 수밖에 없다.
“밥 꼭꼭 잘 씹어 먹고. 로션 꼭 바르고. 양치질도 잊지 말고.”
“늦겠어요.”
평소라면 순순히 알겠다고 할 텐데 마르소 앞에서 아이 취급을 받으니 낯이 뜨겁다.
비행기 시간을 핑계로 할아버지를 빨리 보냈다.
“그럼 다녀오마.”
“네. 조심히 다녀오세요.”
손을 흔들어 배웅하고 돌아서자 마르소가 능글맞게 웃고 있다.
“오고 싶어서 온 거 아니에요.”
“그렇겠지.”
모든 걸 다 이해한다는 듯한 관용적인 태도를 취한 앙리 마르소는 평소의 네 배는 밉상이다.
“아니라고요.”
마르소가 피식 웃었다.
“너도 자존심이 있겠지.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고 싶을 테고.”
“아니라니까?”
“그만해. 부정할수록 추해지니까.”
진짜 콱 한 대 쥐어박고 싶다.
“할아버지가 걱정하시니까 어쩔 수 없이 온 거예요. 호텔에 있어도 됐어요.”
“그걸로는 굳이 내 집에 온 이유를 설명할 수 없지. 파리 내 고수열 경이 친분을 나누는 사람이 한둘이 아닌 건 네가 더 잘 알 텐데.”
파리에 아는 사람이 많은데 굳이 자길 찾아왔으니, 자기 집에 머물고 싶었던 것 아니냐는 추론이다.
“마틴 얀센은 아를에 가 있고. 피에르 말로는 휴가 갔어요.”
앙리 마르소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젓는다.
“매니저는 집안 사정. 고수열 경은 일정 때문에. 얀센은 출장으로, 말로는 휴가라.”
“그래요.”
“일이 그렇게까지 잘 들어맞는다고? 네가 생각해도 추하지 않아?”
“…….”
지금이라도 이 녀석의 정강이를 냅다 후리고 머물던 호텔로 돌아가는 편이 낫겠다.
벌써 이렇게 답답한데 이틀이나 함께하면 화병이 날 것이다.
“택시 좀 불러줘요.”
“택시?”
“여기 못 있겠어요. 돌아갈 거예요.”
요즘 보는 드라마에서 허락보다 용서가 쉬운 법이라는 대사가 있었다.
호텔에서 머물다가 할아버지께는 나중에 천천히 사정을 설명하면 이해해 주실 거다.
“그럴 수 있을까?”
“그럴 수 있긴 뭐가 있어요. 내가 앤 줄 알아요?”
어깨를 으쓱이는 앙리 마르소 뒤로 익숙한 사람이 다가왔다.
미셸 플라티니의 모친이자 마르소의 유모, 셰리 가도다.
“어머. 훈이 왔구나. 왜 여기 있어. 어서 들어오지.”
“셰리.”
여전히 정다운 사람이다.
“배고프지? 맛있는 거 준비했으니까 어서 올라가서 좀 쉬고 있으렴.”
“…….”
“왜 그러고 있어? 참. 내 정신 좀 봐. 축하해. 어쩜 둘이 나란히 우승, 준우승을 했어, 그래?”
“감사합니다.”
“장하다. 장해. 축하 선물로 네가 좋아하는 블루베리 타르트도 구웠단다.”
바삭한 타르트와 신선한 블루베리 과육이 떠오르며 나도 모르게 군침이 돌았다.
“저번에 레이몬드가 만든 피자가 그렇게 맛있었다고?”
일전에 마르소가 ‘개벽’을 보여주려고 초대했을 때 먹었던 포테이토 피자가 떠올라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더 맛있게 해줄게. 어서 올라가서 쉬어. 다 되면 부를게.”
“네.”
어쩌면 나쁜 일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 * *
고훈은 셰리 가도가 정성스레 준비한 저녁을 즐기고 황홀경에 빠져 있었다.
안락의자에 앉아 아직 입 안을 남은 향미를 셰리 가도의 블루베리 타르트와 함께 음미하며, 베를린 필하모닉이 연주한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듣고 있자니 없던 피로도 날아가는 듯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앙리 마르소가 행복에 취한 고훈을 불렀다.
“조금만 더요.”
“일어나. 씻어.”
“조금만 이따가요. 합.”
고훈이 블루베리 타르트를 한 입 크게 물었다.
버터향이 그윽한 파이는 탱글탱글한 과육과 어울려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식감을 선보였고.
고훈은 잔뜩 고조된 기분을 어찌 표현해야 좋을지 몰랐다.
앙리 마르소가 음악을 껐다.
한창 휴식을 즐기던 고훈이 인상을 쓰며 몸을 일으켰다.
“왜 그래요.”
“씻어.”
집주인의 강요에 못 이긴 고훈이 어쩔 수 없이 게스트룸의 거실을 벗어나 침실 옆 세면대로 향했다.
칫솔에 치약을 짜면서 오늘 저녁의 행복을 어떻게 그릴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림 도구를 챙겨오지 않은 탓에 태블릿으로 스케치하며 생각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내일 아침 8시까지 작업실로 나와.”
앙리의 말에 고훈이 고개를 돌렸다.
“시험 테스트 해야 할 거 아니야.”
고훈이 입안을 급히 헹구고 물었다.
“벌써요? 내년에 파리로 오면 하기로 했잖아요.”
“시간 있을 때 조금이라도 해놔야 완벽하게 출시하지.”
모든 상품이 그랬지만 ‘개벽’과 같은 신기술은 특히나 테스터의 역할이 중요했다.
화가들의 예민한 감각을 뒤따를 수 있도록 감도 조절은 필수였고, 보다 다양한 상황을 반복 확인해 오류가 없는지 확인해야 했다.
“열심히 하네요.”
고훈이 솔직한 감상을 풀어냈다.
저녁을 먹으면서 공학자도 아닌 앙리 마르소가 직접 관련 지식을 쌓으며 개발을 진행한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당연하지.”
앙리 마르소가 팔짱을 꼈다.
“뒤따르는 사람은 앞사람만 보면 되지만, 앞서가는 사람은 달라.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지 모르니까 매일 최선을 다해야 해.”
고훈이 눈을 깜빡이며 칫솔질을 했다.
“너도 마찬가지야.”
“나요?”
“그래.”
잇몸과 이 사이를 긁어내던 고훈이 치약을 뱉어냈다.
“남보다 잘할 생각 없어요. 즐기면 되지.”
“넌 그렇게 생각해도 남들은 널 그렇게 안 봐.”
앙리 마르소는 고훈이 아직 본인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 것처럼 느꼈다.
“첫 전시회 이후 1년도 안 되어서 휘트니 비엔날레에 참가했고. 이제는 빌어먹을 노친네들을 제치고 아르누보에서 우승했어.”
“주누숭이라니까요.”
“뭐?”
“주누숭이라고!”
“양치나 똑바로 해.”
“…….”
“네가 어떤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든 남들은 널 넘어서야 할 목표로 두고 있어.”
“그 정도는 아니에요.”
치약을 뱉어낸 고훈이 앙리의 말을 부정하곤 다시 이를 닦았다.
최근 들어 전보다 더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지만 여전히 대단한 예술가가 많았다.
아르누보 공모전을 통해 그것을 새삼 깨달았었다.
“너만 모르고 있어.”
앙리가 한 번 더 강조했다.
“활동한 지 2년도 안 된 너에 관한 논문이 50개가 넘게 제출되었어.”
“……그걸 어떻게 알아요?”
앙리 마르소가 잠시 말을 멈췄다가 고훈의 질문을 무시했다.
“활동하는 작가 중에는 아홉 번째로 많은 기사가 났고. 아직도 모르겠어?”
고훈이 입에 물을 머금었다.
“넌 이미 미술계 중심에 있다고.”
고훈은 앙리와 눈을 마주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 말은 널 짓밟고 넘어서고 싶은 놈들, 고깝게 보는 놈들. 해하고 싶은 놈들이 먼지만큼 많다는 뜻이야.”
고훈이 입 안을 헹군 물을 뱉어냈다.
모든 사람이 선하지 않은 사실은 전생과 현생을 겪으며 수도 없이 반복해 인지했다.
같은 상황에서도 남을 시기하는 사람도 있고 그걸 넘어서 부정한 방법으로 해를 끼치는 이도 있었다.
“지금이야 네 조부가 그놈들을 가만두지 않겠지. 나 또한 그렇고.”
고훈이 세수를 했다.
“물만 묻히지 말고 클렌징폼을 써.”
“이래도 닦여요.”
“내일 아침은 기대되지 않나 봐?”
고훈이 조용히 클렌징폼을 손바닥에 짜냈다.
“넌 그런 놈들에게서 스스로를 지킬 줄 알아야 해. 아직 어리니까 법 문제나 벌주는 법은 알 필요 없어.”
“뭐라고요?”
“그놈들이 엄두도 못 낼 만큼 대단한 일을 해. 격의 차이를 보이라고.”
고훈이 얼굴을 문지르던 행위를 멈추었다.
“너를 욕하고 끌어내리고 싶은 놈들마저 널 따를 수밖에 없도록 앞서나가는 게 최선이야.”
앙리 마르소의 말을 모두 들은 고훈은 대답 없이 거품을 씻어냈다.
그러고는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난 그럴 생각 없어요.”
앙리 마르소는 고훈이 세상 물정 모르는 말만 한다고 생각하다가, 이어지는 말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할아버지하고. 미래 이모하고. 또 당신하고 서로 좋은 그림 그리면서 사는 게 좋아요. 1등 하고 싶은 사람 있으면 하라고 해요. 작품을 누구보다 비싸게 파는 일은 관심 없어요.”
“…….”
“마르소 같이 내 그림을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걸로 충분해요. 그건 마르소도 같은 생각이잖아요.”
고훈이 세면대에서 벗어나려고 하자 앙리 마르소가 문을 가로막았다.
벽면을 큰 소리가 나도록 짚은 탓에 고훈이 다소 놀랐다.
“또 뭐요.”
“그게 다야?”
고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앙리 마르소가 어떻게 생각하든 고훈이 바라는 바는 확고했다.
“더럽게.”
앙리의 말에 고훈이 발끈했다.
“더럽긴 뭐가 더러워요! 다른 생각을 존중할 줄도 알아야지!”
“발은.”
“……네?”
“발은 왜 안 닦아. 애초에 왜 샤워를 안 하고 얼굴만 깔짝대? 로션은 왜 안 바르고.”
고훈이 눈을 깜빡였다.
“제대로 씻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