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11화
40. 마찰(4)
“집을 왜 구해?”
알퐁스 멘디 쇼를 보던 앙리 마르소가 고훈이 집을 구하고 있단 말에 반응했다.
“구해야지.”
미셸 플라티니가 하품하며 대꾸했다.
“왜.”
“왜긴 왜야. 잠깐 있는 것도 아닌데 호텔에서 계속 지내는 것보단 낫지.”
“여기서 살면 되잖아.”
미셸 플라티니는 귀를 의심했다.
앙리 마르소가 타인을 집에 들이려 하다니, 쉬이 믿을 수 없었다.
그녀는 상체를 일으켜 옆에 누운 앙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너 혹시.”
TV를 보며 스마트폰을 만지던 앙리 마르소가 고개를 돌렸다.
“아니다.”
시선이 마주치자 미셸은 의심을 떨쳐버리고자 고개를 흔들었다.
“훈이가 왜 여기서 살아. 너랑 지지고 볶는 것보단 고수열 경이랑 오순도순 사는 게 훨씬 좋지.”
“방은 많아.”
고수열도 함께 들어오면 된다는 말에 기가 찼다.
“훈이랑 언제부터 친했다고? 걔가 너랑 같은 집에 산다고 하겠어?”
앙리 마르소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뭘 믿고?”
“그런 사이니까.”
“……나 아까부터 이상한 생각하게 되니까 헷갈리게 말하지 마. 그런 사이는 무슨 놈의 그런 사이야!”
“오해 안 하는 사이.”
앙리 마르소가 의기양양하게 TV를 가리켰다.
-아마 마르소도 그런 행위를 구태하다고 생각하진 않을 거예요.
알퐁스 멘디 쇼에 출연한 고훈이 앙리 마르소의 뜻을 정확히 짚고 있었다.
* * *
이 미친놈이 뭐라는 거지.
“마땅치 않으면 들어오라고.”
이상한 말을 자주 하는 편이지만 오늘은 정도가 심하다.
트로피를 돌려주려고 왔더니 여기서 살란다.
“내가 여기서 왜 살아요.”
“설비가 여기 있으니까.”
앙리 마르소가 그답지 않게 순진무구한 눈을 하곤 답했다.
너무나 당당해서 이 저택에서 머무는 일이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다.
“필요할 때 들르면 되지 왜 굳이 여기서 살아야 하냐고요.”
“시간 낭비해서 뭐 하게.”
마르소 저택이 파리 중심부에서 꽤 떨어져 있다고는 하지만 같이 사는 것보단 훨씬 나을 거다.
“그리고.”
“그리고?”
“너 돈도 없잖아.”
“내가 왜 돈이 없어요.”
“저번에 카페도 돈 없다고 안 빌렸잖아. 국제 전화 요금도 아깝다며.”
“그건 쓸데없는 데 낭비하지 않으려고 했던 거고! 자꾸 이상하게 몰아가지 말아요. 지금 누가 이상한데?”
이 인간하고 이야기하다 보면 가끔 내가 이상한 건가 싶다.
“그리고 돈은 충분히 많아요.”
“그래?”
“그래!”
“얼마나 있는데.”
“알아서 뭐 하게요.”
“있다며. 있으면 강요하지 않을게.”
이 인간이 아무리 떠들어도 귓등으로도 들을 생각은 없다. 더군다나 내 재산을 알려줄 필요도 없고.
그러나 지금 설득하지 않으면 앞으로 귀찮게 굴 게 뻔하다.
“……대충 370억?”
“유로?”
“370억 유로를 어떻게 가지고 있어요! 당신은 있어요?”
어깨를 얄밉게도 으쓱인다.
“아무튼 그래서 얼마나 가지고 있는데?”
“원.”
“알아듣게 얘기해.”
“한화로 370억 원 정도 있다고요.”
앙리 마르소가 귀찮은 기색을 내보이며 스마트폰을 꺼내 환율을 계산했다.
그러고는 피식 웃는다.
“들어와.”
마치 아량을 베풀 때 들어와 살라는 듯한 태도가 너무 열받는다.
“웃기지 마!”
테이블을 치고 일어났다.
이 인간이 부자인 건 알고 있지만, 돈이 너무 많아서 경제 관념은 없는 게 분명하다.
“그 돈으로 파리 중심부에 갤러리 세우면 남는 돈이 없을 텐데?”
돌아보자 마르소가 고개를 기울이며 도발했다.
분하게도 틀린 말은 아니다.
파리는 문화 유지 및 경관 훼손 방지를 근거로 개발이 제한된 구역이 많다.
개발 가능한 지역은 땅값이 매우 높은데, 그 때문에 낡은 집에 들어가는 것도 고려하고 있었다.
혹은 중심가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살아도 되고 말이다.
다만 갤러리만은 중심가에 두는 게 유리하니 문제.
피에르 말로가 알려준 바에 따르면 마르소 갤러리가 있는 땅의 공시지가는 1㎡당 15만 유로.
한화로 2억 원이 넘는다.
300억 원을 들여도 300㎡(90.7평)밖에 못 산다.
“낭비하면 안 되잖아?”
“신경 쓰지 마요!”
* * *
“그 녀석이 널 어지간히 좋아하는 모양이구나.”
돌아와 할아버지와 방태호에게 오전에 있었던 일을 전하자 두 사람 모두 웃어넘겼다.
“말이 안 되잖아요. 전 같이 못 살아요.”
“그래. 할아버지랑 같이 살아야지.”
할아버지가 간식을 조절하고 양치질과 로션 바르는 일을 강조하시는 건 조금 불만이기도 하지만, 그런 불편함을 감수하고도 할아버지와 함께하는 시간은 소중하다.
반대로 금전적으로 아무리 이득이라도 앙리 마르소와 함께 살 순 없으니 고민할 가치도 없다.
“학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방태호가 궁금하던 학교 이야기를 꺼냈다.
나도 궁금하던 차에 잘 되었다.
한국 초등학교의 비정상적인 교육 수준이 부담된다고 해서, 할아버지도 예술 특화 학교를 찾아본다고 하셨다.
프랑스는 국공립 교육이 잘 되어 있지만, 사립 중학교도 좋은 곳이 많다고 한다.1)
“CM1 과정에 들어가야 하는데. 아니면 바로 중학교로 들어가도 될 테고. 이 학교가 괜찮다고 하더구나.”
“말로가요?”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카탈로그를 보여주셨다.
피에르 말로의 추천이라면 한 번쯤 고려해 볼 일인데, 앙리 4세 고등학교(Lycée Henri-IV)의 부속 중학교라니.
불길한 이름이다.
“기본 과목 세 가지만 듣고 전공과목을 배울 수 있대. 미술 교사도 현직 예술가를 초빙한다고 하고.”
한국 초등학교가 좀 과한 면이 있지만, 내겐 미술 강사보단 인문학적 지식을 넓혀줄 사람이 필요하다.
“전에도 말씀드렸는데 따로 배울 생각은 없어요. 할아버지랑 미래 이모가 있는데 뭐 하러 그래요.”
널리고 널린 전시관과 박물관이 모두 내 스승이다.
“흐음.”
“더 넓은 지식을 배우고 싶어요. 다양하게.”
“그러려면 대학에 들어가야지. 교양 과목도 원하는 대로 골라 들을 수 있고.”
아직은 힘들다는 건가.
스스로 할 수밖에 없으면 그나마 시간을 덜 잡아먹는 쪽이 좋겠다.
“일주일에 수업은 4일 한다고 하더구나. 월화목금.”2)
“네?”
“5교시로 운영한다고 하고. 2시 30분에 끝난대.”
끝나는 시간은 한국 초등학교와 비슷하나 하루를 덜 가도 되니 훨씬 여유롭다.
“3학기제로 운영하죠?”
방태호가 물었다.
“음. 9월 1일에 새 학년이 시작된다고 하니까 내년 그즈음 해서 들어가면 될 것 같은데.”
아무래도 좋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방학도 많이 하던데?”
할아버지가 1년 일정표를 보여주셨다.
9월에 입학하면 10월에 만성절 방학(2주)을 하고, 12월 크리스마스 방학(2주).
2월 겨울 방학(3주)에 4월 부활절 방학(2주), 여름 방학(2개월)이 있다.
……천국인가?
“흫흐흐. 이 녀석, 방학 많다고 좋은 모양이구나.”
할아버지가 웃었다.
“정말 엄청 길잖아요. 넉 달이 넘어요.”
“그래. 할아버지랑 방학 때 여행 다니면서 그림 그리면 되겠네.”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일정이라면 작업 활동에도 크게 신경 쓰이지 않고, 여러 미술관을 구경하기에도 수월하다.
사실 한국 초등학교 때문에 부담을 느낀 적은 없지만 출석일을 계속 신경 써야 하는 게 번거롭긴 했다.
띠리루리리-
웹드라마 <피의 낙인> 오프닝이다.
방태호가 전화를 받았다.
“응. ……뭐? 그래서. 어.”
반갑게 전화를 받은 방태호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눈을 지그시 감고 슬퍼하는 모습을 보니 어떤 비보일지 감이 온다.
“그래. 알았어. ……가봐야지. 응.”
통화를 마친 방태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인가.”
할아버지가 걱정스레 물었다.
방태호는 나와 할아버지를 번갈아 보곤 한 번 더 한숨을 내쉰다.
“어머니께서 쓰러지셨다고 합니다. 가봐야 하는데.”
“뭘 망설이세요. 빨리 가야죠.”
SNBA 살롱전에 함께하지 못해서 미안해하는 것 같은데,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래. 내가 있는데 뭘 걱정하나. 어서 비행기부터 알아보게.”
“빨리요.”
“미안해. 고맙다.”
방태호가 스마트폰으로 비행기 표를 알아보았다.
사실 SNBA 살롱전은 나도 크게 할 일이 없어서 방태호가 자리를 비운다고 해서 문제 될 것도 없다.
더군다나 할아버지가 계시기도 하고.
부우웅- 부우웅-
핸드폰이 울려서 확인해 보니 장미래다.
전시회 준비로 한창 바쁠 텐데 저번 주에는 축하 전화도 해주고, 이렇게 가끔 안부도 물어준다.
“네, 이모.”
-안녕! 잘 지내?
“그럼요. 이모는요?”
-하나도 못 지내. 훈손실 나서 외로워어.
훈손실이 뭐지.
“전시회로 바쁘죠?”
-그렇지, 뭐. 아무래도 전 세계 동시 준비다 보니 이것저것 확인할 게 많은데 다 돌아다닐 수 없으니까.
듣기로는 전 세계 60개 미술관에서 동시에 전시한다고 한다.
엄청난 규모다.
앙리 마르소와 함께 이 시대가 가장 사랑하는 화가니 가능한 일이겠지만.
“응원하고 있어요.”
페르디난도 곤잘레스보다도 일찍 준비한 일인 만큼 잘 되길 바란다.
-고마워. 참, 선생님은 언제 도착하신대? 너도 같이 오지?
“네?”
-비행기 도착 시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
“할아버지 바꿔드릴게요.”
-응.
스마트폰을 할아버지께 향했다.
“미래 이모예요.”
“미래?”
“네. 비행기 도착 시간 언제냐고 물었는데 무슨 얘긴지 모르겠어요.”
“비행기?”
할아버지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가 눈을 화등잔만 하게 떴다.
“미래야. 그래. 아…….”
전화를 받은 할아버지가 드물게 내 눈치를 보신다.
“그래. 그럼 당연히 가야지. 잊다니. 아니다. 아니야. 그래. 그래 모레 보자.”
할아버지가 스마트폰을 돌려주시곤 이마를 짚었다. 장미래와 뭔가 약속했는데 깜빡하신 모양이다.
“약속한 거 있으세요?”
“흠. 미래 이모 전시회 하는데 축사를 해주기로 했는데 깜빡했구나.”
“늦었어요?”
“내일 출발하면 되는데.”
말을 차마 끝까지 못 하신다.
“가면 되잖아요.”
“그럼 살롱전은 어쩌고.”
“혼자 가도 돼요.”
“안 되지. 널 어떻게 혼자 두고 가. 허어. 이걸 어쩐다. 내일 갔다가 축사하고 첫 비행기를 타고 오면 되려나?”
고개를 저었다.
말이 안 되는 일정이다.
“선생님, 여기 가장 빠른 비행기 있는데. 어쩔까요?”
할아버지가 방태호가 보여준 비행기 표를 확인하더니 고민하신다.
나 때문에 걱정이신 것 같은데 하루나 이틀 정도 혼자 있는다고 문제 될 건 조금도 없다.
할아버지가 나를 그저 10살 먹은 아이로만 생각하는 게 유일한 문제다.
“훈아.”
할아버지가 내 손을 꼭 잡았다.
“마르소네 집에서 며칠만 있으면 안 될까?”
“……네?”
* * *
1)1881년에 도입된 쥘 페리 법 이후 프랑스 공립 교육은 모든 국민에게 동등한 수준의 교육을 무료, 종교로부터 자유롭게 제공했다.
그러나 프랑스 사회의 엘리트 집단은 가톨릭 재단이 운영하는 학교, 즉 사립 학교에 보내는 추세고 2010년부터 이러한 경향이 중산층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좋은 사립 중학교를 졸업해야만 좋은 고등학교로 진학할 수 있기 때문.
프랑스에서는 국공립 교육을 위협하는 사립 학교 문제가 심화되고 있다.
프랑스의 학부모들은 자녀가 CM1(한국의 초등학교 4학년 과정) 과정에 들어갈 때 이와 같은 문제로 고민한다.
2)2020년 기준 프랑스 내 대다수 초등학교는 수요일 수업이 없고. 중학교는 수요일에 오전 수업만 받는 주 4.5일 제도를 시행 중이다.
1교시는 8시에 시작하여 각 수업 시간은 55분이며 하루에 6~7교시 정도를 듣는다.
점심시간은 1시간 25분이며 3학기제로 방학은 대략 4달 정도다.
<다시 태어난 반 고흐>에서는 일부 기간이 변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