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10화
40. 마찰(3)
“그런 말 자주 듣는데 전 잘 모르겠어요.”
“하핫. 좋습니다. 계속해 보지요. 식도락가라는 건 알겠으니 다른 취미가 있는지 궁금하네요.”
“그림 그리거나 전시회를 보러 다니는 걸 좋아해요.”
“직업과 관련된 일이라 이해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듭니다.”
고훈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취미가 직업이 되면 불행하다고들 하잖아요. 작업 시간이 길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 외 시간도 그림과 관련되어 있으면 힘들지 않나요?”
“힘들 때도 있고 지칠 때도 있죠.”
알퐁스가 계속 이야기해 주길 바라며 눈을 빛냈다.
“그래도 점심에 맛있는 걸 먹으면 힘이 나요. 저녁도 그렇고. 야간작업하고 나면 다음 날 아침도 있고요.”
“하하핫. 이거 또 음식 이야기로 돌아오네요. 스트레스를 먹는 걸로 푼다고 볼 수 있겠어요.”
“네. 사실 딱히 다른 걸 할 시간이 많지 않아요. 그리고 싶은 것도 많은데 배워야 할 게 너무 많아서 다른 일을 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요.”
“대신 식사는 해야 하니까 최대한 맛있는 걸 먹는다?”
“굳이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는데 그랬나 봐요.”
알퐁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일을 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말만으로도 소년이 얼마나 그림을 사랑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림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짐작이 됩니다.”
“아.”
고훈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뭔가 생각났나요?”
“네. 드라마 보는 걸 좋아해요. 소설도.”
“멋진 취미네요. 제게 추천해 줄 수 있나요?”
“피의 낙인이라는 소설인데 최근에 웹드라마로 만들어졌거든요.”
“피의 낙인?”
“한국 소설이에요. 애인을 괴롭힌 남자에게 복수하려고 했다가 그 사람의 손자랑 사랑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돼요.”
“……다시 해보죠.”
알퐁스는 고훈의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일단 손자도 성인이긴 한 거죠?”
“대학생이에요.”
“그렇다면 애인을 괴롭힌 남자가 나이가 많다는 건데.”
“네. 애인의 시아버지였어요.”
“……애인의 시아버지?”
고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너무나 천진난만하여 알퐁스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혹시 불륜이었나요?”
“따지고 보면 남편과의 결혼이 위장이었죠. 동성 커플이었거든요. 그런데 막상 결혼하고 나니까 시아버지랑 사랑에 빠지게 된 거예요.”
“거기까지.”
고훈이 한창 재밌어지는 순간에 말을 끊은 알퐁스를 의아히 바라보았다.
“소설 내용이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까요. 거기까지 하는 게 좋겠어요.”
“그렇네요.”
불륜과 바람에 관대한 프랑스인이었지만 만 10세 아이가 말하기에는 애먼 내용이었다.
알퐁스가 화제를 바꾸었다.
“다른 취미는 없나요?”
“생각해 보니 많네요. 음악 듣는 걸 좋아해요.”
“음악. 그거라면 확실히 작업하면서도 들을 수 있으니까요.”
“네.”
“어떤 음악을 들으시나요?”
“클래식을 좋아해요. 가사가 없는 쪽이 집중을 방해하지도 않고.”
알퐁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클래식 음악이 다시금 열풍이 불고 있죠. 좋아하는 음악가가 따로 있나요?”
“배도빈이요.”
“The B. 베를린 필하모닉의 지휘자는 누구나 좋아할 수밖에 없죠.”
“대단한 사람이에요.”
“화가와 음악가라. 말러와 클림트처럼 밀접한 관계를 나눈 사람이 많다고 들었는데, 개인적인 친분도 있나요?”
“전혀요. 그냥 팬이에요.”
“그렇군요. 혹시나 해서 여쭤봤습니다.”
알퐁스가 작게 웃곤 화제를 넘겼다.
“미술 이야기로 넘어와서. 최근에 좋게 봤던 작품이 있다면?”
“가장 최근에는.”
고훈이 잠시 고민하다가 솔직히 털어놓았다.
“마르소의 미요.”
방청객과 알퐁스가 기다렸던 대답을 들은 듯 반가워했다.
“아르누보 공모전 우승작이었죠.”
“네. 그가 색을 사용하는 방법은 정말 인상적이에요.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보이니까요.”
“저는 미술을 잘 모르지만 어려운 일인가 보네요.”
“보통은 그렇게 채색하는 일이 특별하진 않아요. 인식이라는 게 있으니까.”
“예를 들자면?”
“잘 익은 사과는 빨갛다고들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사과에는 빨간색만 있는 건 아니거든요. 녹색도 노란색도. 또 그 사이에 정말 많은 색이 있어요.”
알퐁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걸 찾아내는 게 화가라지만 앙리 마르소는 그중에서도 특별해요. 그 모든 색에 그곳에 있어야 하는 의미를 부여하죠. 많은 사람이 그의 장점으로 묘사력을 꼽지만 그는 색채만으로도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마크 로스코가 떠오르네요.”1)
고훈은 고개를 끄덕일 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알퐁스도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던진 말이라 질문을 계속 이어나갔다.
“발표 전에 앙리 마르소의 작품이란 걸 알고 계셨나요?”
“네. 마르소의 작업실에서 연작을 본 적 있었거든요.”
“연작. 시상식 때 나눈 대화로 알려졌죠. 살롱전에서 공개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럴 생각인가 봐요.”
“정말 기대됩니다.”
앙리 마르소의 <미>를 SNBA 살롱전에서 모두 감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짚은 알퐁스는 고훈이 이야기를 계속할 수 있도록 눈을 깜빡였다.
“처음에는 누군가 마르소를 따라 그린 거라 생각했어요.”
알퐁스가 미간을 좁혔다.
“따라 그렸다고요?”
“설마 자기가 연 공모전에 참가할 거라곤 생각 못 했으니까요.”
“하핫하. 그런 이야기도 있었죠.”
“네. 마르소에게 전화해서 당신을 따라 한 사람이 있다고 얘기했어요.”
“마르소 씨의 반응이 궁금하네요.”
“자기 그림을 어떻게 따라 그리냐고 하더라고요.”
방청객들이 웃었다.
앙리 마르소라면 응당 그럴 것만 같았다.
“마르소 씨는 줄곧 고훈 군을 의식해 왔습니다. 최근에 보면 고훈 군도 그런 것 같은데.”
“좀 귀찮은 사람이에요. 멀리서 보면 괜찮고 좋은 사람인데 이상하게 만나기만 하면 싸우게 돼요.”
“흐음. 어떤 일이 있었나요?”
“앵테르미탕이나 아르누보 공모전 보면 정말 미술을 좋아하는구나. 한 사람이 이렇게까지 큰일을 할 수 있구나 싶기도 한데.”
“한데?”
“잔소리가 너무 많아요.”
“하하핫하. 잔소리요?”
“네. 방송할 때 들어와서 뭐 해라. 뭐 하지 마라. 밥 먹을 때도 이거 먹어라. 저거 먹어라. 돼지냐. 하는데 스트레스 받아요.”
알퐁스가 입을 가리고 한참을 웃었다.
“하하핳하. 돼지냐는 심한데요?”
“많이 먹는 편이긴 해도 너무 하잖아요.”
“한창 자랄 때니까요.”
알퐁스가 고훈을 달래며 질문을 계속했다.
“마르소 씨 이야기가 나왔으니, 두 분이 함께하는 신기술 개발에 대해서도 물어보죠.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게 되나요?”
“편의성과 UI 관련한 테스터예요. 사용해 보고 뭐가 불편하고 보충되면 좋은지 확인하는 일이에요.”
“중요한 일이네요.”
“네. 내년부터는 유학을 와서 지낼 것 같아요.”
“반가운 일이네요. 파리에서 고훈 군의 작품을 더 자주 볼 수 있겠군요. 파리에서 잠깐 살았던 적도 있으니 적응도 빠르겠고.”
“네. 어렸을 때 부모님하고 지냈어요.”
알퐁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했다.
“그때 살았던 집은 지금 세를 주고 있어서 할아버지가 집을 알아보고 있어요.”
부우웅- 부우웅-
어디선가 진동 소리가 들렸다.
고훈이 주머니에 손을 넣어 전원 버튼을 꾹 눌렀다.
“죄송합니다.”
“전혀 문제 되지 않아요.”
알퐁스가 손을 흔들어 고훈을 안심시켰다.
‘슬슬 이야기해도 되겠지.’
그는 고훈의 일상과 근황을 파악한 알퐁스는 슬슬 중요한 화제를 언급해도 될 시기라고 판단했다.
“휘트니 비엔날레와 아르누보 공모전 그리고 다음주에 예정된 SNBA 살롱전까지. 1년 만에 최고의 위치에 올랐습니다.”
고훈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구태의연한 기존 미술시장을 개혁한다고 밝힌 앙리 마르소는 새로운 시대의 주역으로 본인과 고훈 군을 손꼽았는데요.”
“네.”
“고훈 군은 현재 미술 시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민감한 질문이었다.
프랑스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앙리 마르소조차 기존 미술계를 강하게 비판한 탓에, 반발을 사는 중이었다.
고훈이 잠시 고민하다가 입술을 뗐다.
“휘트니 비엔날레도 그랬고 아르누보 공모전도 그러했고 많은 예술가가 노력하고 있어요. 좋은 작품을 만들고 있고요.”
“네.”
“그래서 더 안타까워요. 이권을 잡은 몇몇 사람에 의해서 수상자가 결정된다든지 하는 일들은 개선되어야 해요.”
“마르소 씨의 견해와 닿아 있는 점도 다른 점도 있네요.”
“네. 마르소가 말하는 구태한 예술가가 누군지는 모르겠어요. 아직 많은 작품을 접하지 않아서 그런 걸 수도 있고, 마르소의 고집일 수도 있죠.”
알퐁스가 흥미롭다는 듯 고훈을 응시했다.
“저는 아직 판단할 때가 아닌 것 같아요. 그 일은 다른 작품을 충분히 알고 난 뒤에 생각해 봐야겠어요.”
고훈이 속마음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조금 전에 마크 로스코 이야기를 하셨는데. 처음에 마크 로스코의 작품을 봤을 땐 많이 당황했어요.”
“색만 칠해져 있으니까요.”
“네. 그런데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세 번째는 한 시간 정도 지켜봤던 것 같아요. 그러고 나니까 마음이 움직이더라고요.”
“흠.”
“사실 많은 사람이 공감할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쉬운데, 쉽지 않다는 표현이 어색하긴 한데.”
“알 것 같아요.”
“네. 예시를 마크 로스코로 들어서 이상하지만 그렇게 새로운 시도를 한 작품 중에 이해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렇죠.”
“그렇다고 해서 의미가 없다곤 생각하지 않아요.”
고훈은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다.
기억을 잃은 직후에는 빈센트 반 고흐로 살았을 적의 기억이 강렬하여, 다시는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작업에 임했다.
그러나 여러 작품을 만나고.
다시 기억을 되찾는 과정에서 그것이 정말 의미 없는 행동이었는지 새삼 다시금 고민하였다.
‘빈센트 반 고흐’가 남긴 작품은 이후 구스타프 클림트, 앙리 마티스 등에 영향을 주었고 그들은 또 다른 이들에게 자극을 주었다.
“대중에게 사랑받는 일도 중요해요. 소통이 원활하다는 뜻이고 무엇보다 건강하게 작품 활동을 하려면 그래야만 하고요.”
“네.”
“하지만 당장 이해받지 못한다고 해서 영원히 그러리란 보장도 없어요. 빈센트가 그랬던 것처럼요.”
“마크 로스코가 있었기에 색을 더욱 깊이 있게 다루게 된 점도 그렇겠네요.”
“네.”
“아마 마르소도 그런 행위를 구태하다고 생각하진 않을 거예요. 그 사람 마음에 들면 이름 없는 화가의 작품도 사니까.”
“그렇다고 알고 있습니다.”
“네. 마르소는 그런 사람들이 적어도 굶지 않고 노력과 결과에 정당한 보상을 받는 환경을 조성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 관점에서 저도 그를 지지하고요.”
알퐁스는 눈앞의 어린 소년을 다시 보게 되었다.
일부러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던졌다.
어떤 대답을 해도 현재 미술 시장을 옹호하는 이들이나 앙리 마르소를 지지하는 이들 양쪽에서 공격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고훈은 이야기를 합리적으로 풀어 균형을 맞추고 있었다.
‘그림만 잘 그리는 애가 아니야.’
알퐁스는 고훈이 앙리 마르소처럼 시대를 보는 눈을 갖췄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계획은 무엇인가요?”
고훈이 고민 없이 말했다.
“더 많은 사람과 더 깊이 알게 되는 거요.”
단순하고 막연한 말이.
알퐁스의 귀에는 마치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 미술계를 이끌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 * *
1)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년 출생 1970년 사망.
인간 본연의 감정을 그리고자 했던 화가.
형태 없이 색으로 된 면으로 감정을 표현했으며 관람객 개개인이 본인만의 경험을 비추어 공명하길 바랐다.
미국의 내셔널 갤러리에서 ‘미술 작품을 보고 눈물을 흘린 적 있는가?’라는 설문 조사를 진행했고 이에 그렇다고 답한 사람 중 70%가 마크 로스코의 작품을 보고 울었다고 한다.
“나는 추상화가가 아니다. 색채나 형태 그밖에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 나는 비극, 황홀경, 운명 같은 근본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일을 추구한다.”
-마크 로스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