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09화
40. 마찰(2)
“됐다!”
상금 3,000유로에 당첨된 게 그리도 좋은지 차시현이 폴짝폴짝 뛰었다.
미술을 접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그간 열심히 공부한 덕인지 꽤 많은 작품과 작가를 맞혔다.
원래 머리가 좋던 녀석이 작품과 작가를 연결할 줄도 알게 된 모양.
일정 조건만 달성하면 이후에는 운에 따른 추첨 방식이지만 기특하다.
그나저나 이 트로피는 어쩌지.
평소대로 잔뜩 잘난 척한 마르소는 연설을 마치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작가 맞히는 이벤트 추첨도 끝났고 이제 SNBA가 준비한 파티 정도만 남았는데, 거기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따 전화해 봐야겠다.
“미스터 고! 소감 한마디 부탁합니다!”
“앙리 마르소와 무슨 일을 준비하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세요!”
“고수열 경! 손자분이 준우승을 거두었는데 지금 심경이 어떠십니까!”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행사가 끝나자 갑자기 기자들이 몰려들어 깜짝 놀랐다.
“잠시만요! 인터뷰는 따로 자리를 만들 테니 그때 부탁드리겠습니다.”
방태호가 나서서 기자들을 막아주었다.
“어떻게 할래.”
할아버지가 물으셨다.
파티장에 갈 거냐는 말씀이다.
얼마나 우셨는지 눈 주변이 붉다.
“오늘은 좀 쉬고 싶어요.”
파티장에 있을 맛있는 음식은 아쉽지만 긴장이 풀린 탓인지 아니면 마르소와 한바탕 싸운 탓인지 피곤하다.
“그래. 이제 바빠질 테니 시간 있을 때 쉬는 게 좋아.”
“들어갈 때 피자 사서 가도 돼요?”
야식은 건강에 안 좋다고 하시지만 오늘처럼 기쁜 날은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여쭸더니 고민하신다.
“시간이 늦어서 있는지 모르겠구나.”
“아.”
할아버지가 피식 웃었다.
“찾아보면 있겠지.”
기쁜 마음에 웃으니 할아버지가 날 꼭 안았다.
“축하한다.”
나도 꽉 안아드렸다.
* * *
아르누보 공모전이 끝나고 일주일.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대로 정말 바쁜 날을 보냈다.
나름대로 각오는 했지만 상상 이상으로 큰 관심을 받는 바람에 몸이 세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오늘도 두 시간 정도 사인을 하고 나니 진이 빠졌다.
팬을 만나는 기쁨이 없었더라면 돈을 아무리 많이 받아도 거절했을 터다.
“힘들지?”
방태호가 걱정스레 물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워낙 많은 언론사와 인터뷰하고 프랑스 국립 예술 협회가 주관하는 행사, 라디오, TV 프로그램에 정신없이 불려 다녔다.
돈도 벌 수 있고, 내 이야기를 충분히 할 수 있는 점은 좋지만 피곤해서 드라마도 못 챙겨봤으니 말 다 했다.
방태호가 중요한 일만 선별해 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버티질 못했을 거다.
“오늘까지만 하고 좀 쉬자.”
“네.”
다음 주부터는 또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아르누보 공모전 준우승 자격으로 참가할 2028 SNBA 살롱전은 자리만 채우면 되지만, 이후에 마틴 얀센을 도와 다큐멘터리도 찍어야 한다.
게다가 내년부터는 유학 올 계획이라 입학 관련 시험도 봐야 한다.
작년과 올해 학교도 제대로 안 다녔던 내가 시험에 합격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넉넉히 석 달 정도 시간이 있으면 어떻게든 준비할 수 있을 텐데, 시간이 허락될지 모르겠다.
“할아버지는요?”
“말로 씨 연락받고 가셨어.”
피에르 말로가 학교와 집을 추천해 준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파리에 사는 사람이니 나나 할아버지가 모르는 부분을 잘 알려줄 거다.
“다음 방송 끝나기 전에는 돌아오신대.”
고개를 끄덕이고 차에 올랐다.
TF1(Télévision française 1: 떼에프엉)라는 방송국으로 향하는데 프랑스에서는 가장 규모가 크다고 한다.
스튜디오와 본사가 파리 근교의 불로뉴비양쿠르란 도시에 있다고 해서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운전하는 방태호를 옆에서 보고 있으니 그도 조금 지친 느낌이다.
파리에 온 지도 벌써 2주나 되었으니 무리도 아니다.
신경 쓸 것 없이 편히 놀았던 차시현도 돌아갈 때는 빨리 집에 가고 싶다고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괜찮아요?”
“뭐가?”
“파리에서 살게 되면 힘들 수 있잖아요.”
나야 좀 더 넓은 곳에서 활동하고 싶어 유학을 온다지만 방태호는 가족을 두고 파리에서 활동하긴 힘들 거다.
출장도 한두 번이라야지 계속되면 지칠 테니까.
방태호가 씩 웃는다.
“처음부터 생각하고 있었어. 파리일지 런던일지 뉴욕일지는 몰랐지만. 이렇게 빠를 줄도.”
나와 함께하기 위해 안정적인 직장도 그만두었던 사람이라 마음이 편치 않다.
“좋은 일이야. 반짝 주목받고 사라지는 작가도 많거든. 어린 작가는 특히 더 그렇고.”
어리다는 것 때문에 잠시 주목받다가 나이를 먹으면서 잊히는 사람이 많다.
개인의 역량이나 부담감 등도 문제가 되지만, 이쪽에서는 작가와 작품 가치의 변동성 때문에 그렇다.
미래가 불명확한 작가는 작품을 투자 대상으로 여기는 이들에게 관심을 얻을 수 없다.
앙리 마르소는 그런 환경을 바꾸려고 하고, 나 또한 언젠가는 그런 환경이 개선되길 바란다.
“너무 걱정하지 마. 아무 문제 없을 거야. 또 너랑 같이 일하려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할아버지는 방태호가 수익이 적은 걸 걱정했다.
아무리 열정이 넘쳐도 가정이 있으니 어느 정도는 수입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계산해 보니 올해 그에게 떨어지는 돈은 대충 3,400만 원.
거기서 세금도, 사무실 관리비도 내야 할 테고 이렇게 파리에서 오래 머물 때는 왕복 교통비와 숙소, 식비 등 돈 나갈 데 천지다.
혼자라면 모를까 3인 가족이 생활하기엔 무리가 있다.
전시회를 자주 하면 되지만 전시할 만한 작품을 찍어낼 순 없다.
그렇다고 외부 활동을 늘리자니 피곤해지고 되레 작업할 시간이 부족해져서 장기적으로는 손해.
역시 따로 챙겨주는 수밖에 없다.
“길이 막히네. 조금이라도 자.”
그러지 않아도 졸음이 몰려든다.
“그럼 조금만 잘게요.”
“그래.”
눈을 감았다.
“훈아, 도착했어.”
“……?”
잠깐 눈을 붙인 것 같은데 일어나 보니 정말 얼마 안 지났다. 길이 막힌 것치곤 30분밖에 안 걸렸다.
오늘 방송이 끝나면 근사한 저녁을 먹고 내일 점심까지 잠만 자야겠다.
“수고하십니다. 알퐁스 멘디 쇼 출연 약속되어 있는데요.”
방태호가 안내원에게 말을 걸기가 무섭게 한 남자가 급히 달려왔다.
“헉헉. 죄송합니다. 시간 맞춰서 기다렸어야 했는데.”
느낌 탓인지 요즘에는 어디를 갈 때마다 이렇게 부담스럽게 대우받는다.
“방금 도착했어요.”
웃으며 손을 건넸다.
* * *
TF1은 세계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국으로 1인 미디어가 방송 시장을 장악한 2028년에도 공격적인 마케팅, 탄탄한 콘텐츠로 위상을 지켜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인기 연예인 알퐁스 멘디가 진행하는 토크쇼는 매회 시청률 30%를 넘기는 인기 프로그램이었다.
오늘은 특별한 손님을 맞이해 평소보다도 많은 사람이 주목하였다.
“모두 얼마 전 파리를 떠들썩하게 했던 아르누보 공모전을 기억하실 겁니다.”
사인이 떨어지자 진행자 알퐁스 멘디가 편안한 말투로 쇼를 시작하였다.
“공모전 끝까지 작품이 밝혀지지 않아 많이들 궁금하셨을 텐데요. 오늘은 여름 너울의 주인공 고훈을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알퐁스 멘디의 소개와 함께 고훈이 세트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방청객들이 열렬히 환호하였고 알퐁스 멘디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훈을 반겼다.
“시청자 여러분께 인사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고훈입니다. 화가예요.”
“화가. 화가.”
알퐁스 멘디가 고훈의 말을 따라 했다.
고훈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의아함을 표했다.
“직업상 예술 하는 분들을 정말 많이 만나봤거든요. 미술 관련해서도요. 대부분 본인을 예술가로 소개하시는데, 화가라고 밝히는 분은 오랜만이네요.”
고훈이 알퐁스의 말을 이해하곤 입을 열었다.
“미술이 더는 그림을 그리는 것만을 말하진 않으니까요. 설치 행위나 조각, 소리를 포함한 공간 전체를 활용하기도 하니 예술가란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어요.”
중요한 주제를 포착한 알퐁스 멘디가 검지로 허공을 짚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화가라고 하시는 거군요.”
“네. 전 예술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림 그리는 사람이거든요.”
알퐁스 멘디가 작게 웃었다.
“오늘 대화는 아주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광고 보고 시작하겠습니다.”
└고훈 살 좀 찐 것 같더니 오늘은 말라 보이네 ㅠㅠ
└엄청 바빠서 그런가 봐. 요새 안 나오는 데가 없어.
└아직 어린데 너무 혹사하는 거 아닌지 몰라.
└고수열이 같이 있는데 알아서 하겠지. 고훈이라면 끔찍이 여기는 분이신데.
└아, 미치겠네. 너희 이거 다 알아들어? 자막 없음?
└생방송에 무슨 자막이야ㅋㅋㅋㅋ
└나중에 공카에 자막 올라올걸? 요즘 누가 열심히 자막 만들어서 올려주던데.
└화가 덕질하게 될 줄도 모르긴 했는데, 우리나라 애 파면서 프랑스어 고플 줄은 진짜 상상도 못 했다.
└배도빈 때문에 수능 제2외국어 독어 선택한 비율 는 거 생각나네 ㅋㅋㅋㅋ
└다들 어디서 보고 있어?
알퐁스 멘디가 책상에 팔을 걸치고 물었다.
“예술가와 화가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하네요.”
알퐁스의 말투는 과장되지 않았다.
편안한 자세로 일상에서 나누는 대화 같아서 고훈도 편하게 답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와 정리한 이야기인데요. 예술은 하는 게 아니라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된다?”
“제 그림을 누군가 예술이라고 해주면 예술이 되는 거죠. 그래서 예술가가 아니라 화가고요.”
“정말 멋진 말이네요. 평소에도 할아버지와 대화를 많이 나누나요?”
“그럼요. 보통은 먹는 걸로 싸우는 편이지만.”
알퐁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핫. 최고의 화가 두 분이 먹는 걸로 싸운다고요?”
“할아버지는 짠 음식을 좋아하시거든요. 전 기름 지거나 단 걸 좋아하고.”
“두 분 모두 건강식을 하진 않으시네요.”
“맞아요.”
“평소에 즐겨 먹는 음식은요?”
“평소에는 한식을 먹어요. 김치찌개나 나물무침 같은 거에 고기.”
“한식이라. 비빔밥은 먹어본 적 있거든요. 김취찌개? 제 발음이 맞나요?”
“훌륭해요. 김치찌개”
“김치찌개는 무슨 요리죠?”
“익은 김치로 만든 국물 요리예요. 전 돼지 목살을 많이 넣은 걸 좋아해요.”
“아, 김치. 알고 있어요. 저는 그게 샐러드 같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국물 요리에도 쓰나 봐요?”
“네. 조리법이 여러 개가 있어요. 밥이랑 볶아 먹기도 하고 고기랑 같이 쪄서 먹기도 하고. 아무래도 전통 음식이니까.”
“전통 음식을 좋아한다는 말이고. 포테이토 피자를 좋아한다는 기사까지 있던데요?”
“네. 잘 숙성된 도우 위에 마요네즈, 감자, 치즈, 베이컨 조합은 클로드 모네의 구름 같아요.”
“잠시만요. 포테이토 피자가 모네의 구름 같다?”
“평화롭다. 완벽하다는 뜻이에요.”
알퐁스가 고개를 저으며 씩 웃었다.
“오늘 인터뷰는 조금 힘들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