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08화
40. 마찰(1)
시상식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여름 너울>이 어떻게 그려졌는지 알게 되며 마음이 동했던 이들은 두 천재 화가의 말싸움을 지켜볼 뿐이었다.
└아니 뭐 햌ㅋㅋㅋㅋㅋㅋ
└훈이 순위에 연연하지 않겠다면서 왜 저렇게 화났어 ㅋㅋㅋㅋ
└나 좀 이해가 안 돼
└<미>가 고훈 덕을 봤으니까 우승 트로피 주려는 거 아냐?
└이야기 들어보니까 <미>가 연작인가 봐. 훈이는 하나만 출품해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냐고 화내는 거고 ㅋㅋㅋ
└자존심 싸움이네.
└그렇긴 한데 왤케 웃기짘ㅋㅋㅋ
“자, 두 분 우애는 잘 알겠으니 이제 마무리를.”
우진이 시상식을 마무리하고자 나섰지만 앙리 마르소와 고훈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당신이 그딴 거 신경 안 써줘도 다음에는 이길 거라니까!”
“날 부끄럽게 할 작정이야!”
“내가 더 부끄러워! 그걸 어떻게 받아!”
“뭣들 하고 있어! 데리고 나가!”
시상식 이후 공개할 일이 있었기에 앙리 마르소가 보안 직원을 무대로 불러들였다.
“잠깐. 잠깐만요. 할 말 남았어요.”
“일단 내려가시죠. 나중에.”
고훈은 어떻게든 설득하려 했지만, 앙리 마르소에게 고액의 연봉을 받는 이들은 소년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씨익. 씨익.”
강제로 우승 트로피를 챙기고 자리로 돌아온 고훈이 분한 마음에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차마 수많은 사람이 준비해 성공시킨 아르누보 공모전 우승 트로피를 던질 수 없었던 게 천추의 한이었다.
그런 친구를 빤히 보던 차시현이 입을 열었다.
“있잖아.”
우승 트로피를 받는 건 부끄럽고 수백만 명이 보는 자리에서 싸우는 건 안 부끄러운지 궁금했다.
“이거 전 세계에 생방송 되는 거 알고 있지?”
흥분했던 고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닠ㅋㅋㅋㅋㅋ 뭐야ㅋㅋㅋ
└그래서 우승 누가 한 건뎈ㅋㅋㅋ
└씩씩거리는 것 좀 봐 ㅠㅠ 넘 귀엽다 ㅠㅠ
└어쨌든 우승은 앙리지. 변수가 있긴 해도 결과가 명확하니까.
상황이 대충 정리되자 앙리 마르소가 옷매무시를 다듬고 앞으로 나섰다.
“언제부턴가 전시회를 찾는 사람들이 줄기 시작했다.”
그는 폐막식장을 찾은 이들을 둘러보며 분명히 말했다.
“스포츠, 영화, 음악 등 즐길 거리가 너무 많아서 자연스레 도태된다고. 이제는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머저리들이 있다.”
중앙 스크린에 13,092,271이 떠올랐다.
아르누보 공모전에 직‧간접적으로 방문한 사람의 숫자였다.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진 게 아니야.”
앙리 마르소의 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아무런 감흥도 없는 작품을 굳이 볼 필요가 없었던 거다. 모처럼 전시회를 찾아도 즐겁지도 슬프지도 않으니까. 화나거나 기쁘거나 하다못해 무섭기라도 하면 찾았을 거다.”
앙리 마르소의 말에 맞춰 중앙 스크린에 ‘Création(개벽)’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아르누보 공모전을 통해 확인했다. 사람들은 미술에 관심이 없는 게 아니야. 머저리들의 구태한 철학, 무의미한 표현에 지쳤을 뿐이다.”
프로젝트 개벽을 통해 만들어진 <앙리 마르소 001>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그림이 캔버스에서 일어난 듯한 조각상에 사람들이 감탄했다.
과연 회화뿐만 아니라 조각가로서도 크게 사랑받는 앙리 마르소다운 수작이었다.
“역시 앙리네요.”
이인호 기자의 말에 김지우 기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앙리 마르소가 공개한 자각상은 그림을 현실로 옮겨놓은 듯 붓 자국 하나까지 표현되어 있었다.
그녀는 언론인 출입증을 가진 덕에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걸 다행으로 생각할 만큼 <앙리 마르소 001>에 매료되었다.
“……어?”
그러나 그것도 잠시. 김지우는 물론 객석 전체가 술렁거렸다.
중앙 스크린에 앙리 마르소가 허공에 그림을 그리는 영상이 출력되고 있었다.
“뭐야?”
“틸트 캔버스?”
“저걸로 디자인한 건가?”
카메라가 천천히 움직여 바로 옆 공간에서 앙리 마르소가 VR을 착용하고 허공에 그린 그림을 실시간으로 출력하는 모습이 공개되었다.
시간 차이는 있었지만, 사람들이 처음 보는 기계는 분명 앙리 마르소와 똑같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영상이 빠르게 감겨 마침내 <앙리 마르소 001>이 탄생하는 과정이 밝혀지자.
“우오오오오오!”
모든 사람이 일어나 폐막식장이 떠나갈 것 같은 함성을 내질렀다.
└저게 뭐야;;;
└어떻게 했어?
└머, 머선 일이고?
└틸트 캔버스 아닌가?
└저게 어떻게 가능해 ㅁㅊ;;;
전 세계 사람들이 모인 OTT 플랫폼 채팅창도 마찬가지.
그림이 그대로 입체가 되어 출력된 점에 놀란 시청자들이 저마다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앙리 마르소가 나섰다.
“더 이상 미술은 캔버스 위에 한정된 행위가 아니야.”
앙리 마르소는 그간 대중과 동떨어져 있던 순수 미술이 더는 고립되어 있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내가.”
앙리 마르소는 앞줄에 앉아 있는 고훈을 응시하며 말했다.
“네가 그리는 모든 것이 이 세상의 일부가 될 거다.”
영웅은 시선을 옮겨 초청된 이들과 하나하나 눈을 마주했다.
“과거에 집착하고 예술로 장난질하는 쓰레기는 필요 없다.”
단호히 말했다.
“도전해.”
독려했다.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나? 동물 박제가 수천만 유로에 거래되는 게 이상하지 않아? 거기에 담긴 철학에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나?”
앙리 마르소의 의도를 알아챈 몇몇 사람이 입을 벌렸다.
동물 박제라고 하면 데미안 카터가 주로 활용하는 작업 방식이었다.
현재 가장 비싼 작품을 판매하는 그를 지목하며 그의 작품이 비싸게 거래되는 걸 정면으로 비판한 것이었다.
영웅은 계속해서 선동했다.
“예술을 투기의 대상으로 여기는 비정상적인 세계는 끝났다.”
앙리 마르소는 예술이 투기 대상이 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이 형성한 카르텔 때문에 순수한 목적으로 예술 하는 이들이 설 자리가 없어지는 것 또한 보고 싶지 않았다.
앙리 마르소의 시대가 그렇게 추악하고 비참하게 남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예술의 역사는 다시금 기록될 것이다.”
중앙 스크린에 틸트 캔버스와 그 출력 기기의 라이선스가 전면 무료화됨이 명시되었다.
그의 말대로 예술의 역사를 바꿀 만한 신기술이 공공재가 된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기함했다.
“앙리! 앙리!”
“앙리! 앙리!”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아르누보 공모전에 참가했던 예술가 대다수가 앙리 마르소를 연호했다.
제법 이름을 알렸음에도 안정된 생활을 꿈꾸기 힘들었던 상황.
그들은 분명 부조리함을 느끼고 있었다.
본인들이 알지 못하는 어떤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여러 공모전은 협회에 연이 닿은 이들만 조명했고.
흔히 거장이라고 알려진 사람들의 작품은 그럴 만한 가격을 한참 웃돌았다.
대중은 그런 작품을 보며 그것이 현대 미술의 전부인 줄 알고 욕했으며 그렇게 점점 좁아지는 미술 시장.
그렇게 쌓이고 쌓인 불만과 한이 터져 나온 순간이었다.
앵테르미탕과 아르누보 공모전 그리고 개벽이란 이름의 신기술 무료화까지.
폭군이 지배하는 사회에 있던 이들에게 앙리 마르소는 영웅이었다.
* * *
[그림이 현실이 되는 기술 ‘개벽’]
[아르누보 공모전 우승, 앙리 마르소]
[천재 화가 고훈, 아르누보 공모전 준우승!]
[앙리 마르소, “예술이 예술로 향유되는 사회를 만들 것.”]
6일. 프랑스의 대표적인 화가, 조각가 앙리 마르소가 예술 환경 조성의 뜻을 밝혔다.
프랑스 국립 예술 협회가 개최한 아르누보 공모전은 기존 공모전과 달리 작가명이 비공개된 채 관람객이 직접 선택하는 방식을 취하여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앙리 마르소는 폐막식장에서 거액의 미술 작품 거래가 음성화되고 투기를 목적으로 이뤄지는 경향을 비판하며, 사람들이 예술을 즐길 환경을 만들고 예술가들이 그에 응하는 건전한 시장을 만들 계획이다.]
[앙리 마르소, 새로운 시대의 주역으로 본인과 고훈을 손꼽아]
[고훈, “트로피 가져가!”]
아르누보 공모전 시상식에서 두 천재 화가가 우정을 과시했다.
앙리 마르소는 <미>가 고훈의 작품이라는 루머가 돌았기에 우승 트로피를 양보했고, 이에 고훈은 앙리 마르소에게도 패널티가 있었다면서 이를 거절하였다.
앙리 마르소는 연설 이후 프로젝트 개벽은 아직 진행 중에 있고 베타 테스터로 고훈을 선정하여 상용화를 준비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개벽에 관련한 질문을 받은 고훈은 쑥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우승 트로피를 휘둘러 웃음을 자아냈다.
뉴스 기사를 읽던 데미안 카터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미술계는 <여름 너울>과 <미>, 고훈과 앙리 마르소에 관한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무섭구만.’
21세기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예술가는 아르누보 공모전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림을 보고 감동한 적이 얼마 만인가.
데미안 카터는 진심으로 <여름 너울>과 <미>에 감격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작품을 그려낼 수 있는 앙리 마르소와 고훈이 부러웠다.
자기 할 일만 해도 대중으로부터 사랑받는 점이 그러했다.
도중에 사퇴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공모전 후반부 <여름 너울>과 <미>는 다른 작품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많은 표를 얻었다.
전체 표의 19~20% 정도를 유지하던 것만으로도 대단한데, 막바지에는 두 작품 모두 28%대를 기록하고 말았다.
그것도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채.
데미안 카터는 서둘러 사퇴했음을 다행으로 여겼다.
재기발랄한 두 예술가를 상대했다면 아주 좋은 발판이 되었을 터.
뉴스 사이트의 생활‧문화면은 온통 앙리 마르소와 고훈 그리고 새로운 미술이란 단어로 가득했다.
‘새로운 미술이라.’
데미안 카터는 뜨거운 커피잔을 쥐곤 고민에 빠졌다.
지난 수십 년과 마찬가지로 다음에는 어떤 작품을 보여야 할지 좀처럼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그는 본인의 은밀한 작업실 구석을 장식한 두 개의 해골을 보았다.
푸르게 빛나는 사파이어와 같은 삶을 포기할 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