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07화
39. 왕과 영웅 그리고 펭귄(5)
‘정말 해냈어.’
이인호는 열렬히 환호하는 인파 속에서 무대로 오르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비록 편집장의 지시로 어쩔 수 없이 시작된 만남이었지만.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에서 관람객에게 반 고흐와 본인의 그림을 소개하던 고훈을 잊을 수 없었다.
고훈이 말하는 내용을 이해할 순 없었다.
단지 그것을 말할 때 빛나는 눈빛이, 들뜬 목소리가 좋았다.
고훈이 반 고흐와 미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었다.
미술은 몰랐지만 큰 상처를 입고도 밝게 웃는 모습을 보니 응원하고 싶어졌다.
<마르소의 보석>에 눈을 그려 넣거나 반 고흐의 마지막 작업 장소를 찾는 걸 보고서야 비로소 고훈이 평범한 아이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서리 밀밭>을 봤을 땐 고훈이 얼마나 대단한 그림을 그렸는지 설명할 수 없어서 안타까웠다.
휘트니 비엔날레에서 <가면>을 공개했을 때의 충격을 온전히 기사로 전해지 못해 분했다.
부족한 지식을 채우길 근 1년.
아르누보 공모전에 참가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번에야말로 고훈이 어떤 아인지 알리고 싶어 파리를 찾았다.
그동안 조금은 미술을 접한 덕인지 아르누보 공모전에 참가한 이들이 얼마나 쟁쟁한지 알 수 있었다.
데미안 카터를 비롯한 수많은 예술인이 최선의 작품을 선보였다.
이런 곳에서 과연 고훈이 자기 뜻을 제대로 펼칠 수 있을까.
입상할 수 있을까.
일주일간 누구보다도 많은 작품을 둘러보며 고훈을 찾아다녔지만, 고훈이 그렸다고 생각되는 그림은 없었다.
유명 작가의 작품들이 속속들이 밝혀지면서 불안했다.
공모전 취지를 지키는 고훈이 기특하면서도, 워낙 많은 작품이 알려지고 표를 얻으니 초조해졌다.
고훈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할 것이 두려워 다소 공격적인 기사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걱정을 뒤로하고 고훈은 최고의 자리에 당당히 올라섰다.
프랑스 예술계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앙리 마르소와 나란히 섰다.
“고훈! 고훈! 고훈!”
이인호는 앙리 마르소를 연호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목이 터져라 외쳤다.
* * *
“Oh my…….”
한편 폐막식을 중계하던 알렉스 우드는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도랐넼ㅋㅋㅋㅋㅋㅋ
└형이 왜 거기서 나왘ㅋㅋㅋ
└앙리 마르소 진짜 찐관종이다 어떻게 자기가 연 대회에 나왘ㅋㅋㅋ
└게다가 우승함ㅋㅋㅋㅋㅋ
멍하니 채팅창을 보던 알렉스가 정색했다.
“아니. 여러분들 이거 그냥 그렇게 웃을 일이 아니야.”
오랜 시간 예술 전문 뉴튜브 채널을 운영했던 그는 앙리 마르소를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앙리 마르소가 누구야. 세계에서 가장 자기중심적인 그림을 그렸던 사람이야. 그 미친 나르시시스트가 휘트니 비엔날레에서는 남의 그림을 그렸고. 이젠 화풍마저 바꾸었어.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시청자들이 물음표를 연달아 올렸다.
“앙리가 자주 하는 말 있지. 동시대가 아니라 앙리 마르소의 시대라고. 자기가 지금을 대표한다고. 그거 솔직히 웃음거리밖에 안 됐다고.”
알렉스의 말이 빨라졌다.
“그래. 잘 그려. 멋있어. 독특하고 지금 회화 그리는 사람 중에 마르소만큼 뛰어난 사람도 몇 없어. 오죽하면 뷔페 이후 최고의 화가라고 하겠어. 근데 그게 다가 아니잖아.”
목소리는 점점 더 고조되었다.
“자화상만 800점 넘게 그리면서 자기 안에만 갇혀 있던 천재였다고. 너무나 뛰어나서 사랑받지만, 결코 시대를 대표할 순 없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해 봐. 앙리 마르소의 화풍이 그전에 있었어? 이후에는 있을 것 같아? 미술사에서 완전히 동떨어진 외딴 섬 같은 사람이었어.”
알렉스가 침을 삼켰다.
“그런 앙리 마르소가 세상 밖으로 나선 거야.”
대중에게 사랑받는 것과 달리.
미술계 인사들에게 앙리 마르소는 돌연변이였다.
“고훈이란 새로운 천재를 만나서 비로소 남을 받아들인 거라고. 난 이거 되게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
알렉스가 급히 앙리 마르소의 과거 기록을 검색했다.
파리역을 가득 메운 앙리 마르소의 자화상을 찾아내곤 화면에 띄웠다.
“이거. 이게 앙리의 발목을 붙잡았잖아. 돈지랄로 주목받았다는 그 아킬레스건 말이야. 근데 이번에 말끔히 해결했어. 그 기라성 같은 선배 작가들 사이에서 이름 하나 밝히지 않고.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이야.”
알렉스 우드의 역설에 시청자들도 수긍했다.
└그러게.
└듣고 보니 그렇네. 쟤 저런 짓 안 해도 되잖아. 주류에서 좀 떨어져 있어도 작품 거래는 제일 잘되지 않나?
└앙리만큼 파는 사람 거의 없음.
└ㄹㅇ 그 가격대에 그만큼 거래되는 사람 없지. 총거래액으로 따지면 마르소가 제일 많을걸?
└관종이 아니라 진짜 도전이었나?
└앙리 마르소가 이상한 짓 하고 다니니까 웃긴 해도 솔직히 우습게 보는 사람은 없지.
└고훈은?
알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이 사람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 우승해서가 아니라 이미 최고 위치에 있으면서 자기를 한 번 더 발전시켰다는 게 너무 놀라워.”
앙리 마르소를 찬양하던 그의 눈에 고훈에 관한 질문이 들어왔다.
“그치. 여름 너울이 고훈 작품이라니. 나 정말 꿈에도 몰랐어.”
시청자들도 그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
알렉스는 콜라를 한 모금 들이켠 뒤 천천히 입을 뗐다.
“아까 여름 너울이 고훈 거라면 정말 무서울 것 같다고 했잖아. 진짜 그래. 이걸 뭐라고 말해야지?”
그는 손을 마주하고 한 번 더 고민했다.
“신기해. 그전까지는 고훈이 그렸다고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는데, 알고 보니까 아, 고훈 그림이구나 싶어.”
원래 알고 나면 쉽다는 채팅이 올라왔다.
“그런 느낌이 아니야. 저 그림은 고훈이 아니고선 못 그려. 해바라기랑 손님, 서리 밀밭에서 보여주었던 특유의 애잔함이 있어. 이렇게 말하면 위험하려나. 상처가 있는 애잖아. 저거 보면 막 가슴에서 뭔가 울컥하지 않아?”
알렉스가 손뼉을 쳤다.
“그래. 왜 그런지 알겠어. 지금까지 고훈 정말 다양한 화풍을 보여주었어. 근데 결국 자기 것으로 다 만들었단 말이야. 그 짧은 시간에. 이제 겨우 10살인 애가 자기 세계가 있다는 거야. 단순히 발상이 좋다든지 색감이 좋다든지 기술이 좋다든지 그런 영역이 아니야.”
어리다는 수식도 천재라는 표현도 그에게는 실례였다.
“고훈은 정말 멋진 화가야. 회화의 역사와 현재를 아우를 수 있는 진짜 화가.”
-2028년 제1회 아르누보 공모전 우승! 앙리 마르소!
-앙리! 앙리!
-고훈! 고훈!
앙리 마르소와 고훈을 연호하는 소리가 알렉스 우드의 중계방을 비롯하여 36개국 공영 방송사와 9개 OTT 플랫폼을 통해 전 세계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알렉스는 그 소리를 들으며 새로운 미술(아르누보)을 저 두 사람이 열어젖혔다고 직감했다.
“저 두 사람이 왜 친하게 지내는지 알 것 같아. 예전에는 약간 앙리 마르소가 고훈한테 집착하는 느낌이었는데, 지금 보니까 서로에게 좋은 경쟁자네.”
채팅창에 누군가 마티스와 피카소를 언급했다.
알렉스 우드는 세기의 라이벌이지만 누구보다도 서로를 잘 알고 인정했던 두 거장의 관계를 떠올리며 손가락을 튕겼다.
“딱이네.”
* * *
“자, 오늘의 두 주인공을 모셨습니다. 먼저 고훈 군. 축하드립니다.”
사회자 우진이 축하와 함께 마이크를 넘겼다.
“저, 꽃다발은 잠시 내려두셔도.”
고수열, 방태호, 차시현, 김지우, 피에르 말로, 마틴 얀센, 케빈 맥컬리 등에게 꽃을 가득 받아 고훈이 비틀거리고 있었다.
시청자들은 고훈이 꽃다발을 조심스레 내려놓은 뒤에야 소년을 볼 수 있었다.
“8,666,898표. 정말 많은 분이 지지해 주셨습니다. 소감이 어떠신가요?”
고훈이 입을 오므렸다.
눈앞에 수백 명의 사람이 모두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담긴 사랑을 충분히 느낀 터라 목이 메었다.
“상을…….”
고훈이 말을 잇지 못하자 초청객들이 박수를 보냈다.
“상을 받는 건 처음이에요. 그것도 찾아와 주신 분들이 주신 거니까.”
자꾸만 목이 잠겼다.
고훈은 마이크와 잠시 거리를 두었고 벅차오르는 감정을 애써 달랬다.
“얼마 전에. 버뱅크에 있는 옛날 집에 갔었어요. 문에. 어머니, 아버지랑 같이 그렸던 해바라기가 있더라고요.”
고수열이 눈을 감았다.
“두 분이 오랜만에 휴가를 받아서. ……그래서 한국에 놀러 갔는데. 마지막 날에는 꼭 할아버지 보러 가기로 했거든요.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낚시 좋아하니까 동해 바다로 놀러 가면 되겠다고.”
고훈이 다시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데. 할아버지랑 둘만 보게 됐어요. 일 년이나 지나서. 좋더라고요.”
초청객들은 차마 박수를 보내지 못했다.
고훈이 어떤 심경이었을지 <여름 너울>을 통해 깊이 이해하고 있기에, 소년이 하고 싶은 말을 계속할 수 있도록 기다려 줄 뿐이었다.
고훈이 침을 삼키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할아버지랑 부모님 덕분에 많은 걸 배웠어요. 그리고 이번 공모전을 통해서도요.”
소년은 작게 미소 지었다.
“순위에 연연하진 않을 거예요. 할아버지가 말씀하셨어요. 더 많은 사람과 얼마나 깊은 대화를 나누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다만.”
화가는 고개를 돌려 또 한 명의 화가를 보았다.
고훈은 하려던 말을 삼키고 다른 말을 꺼냈다.
“마르소는 대단해요. 이미 완성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나 봐요.”
“…….”
“나도 멈추지 않을 거예요.”
고훈이 못을 박았다.
비록 이번에 밀렸다고 해도 자신을 무시하지 말라고.
한 번 앞서나갔다고 해서 마음 놓고 있지 말라고,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본인을 의식하라고 했다.
짝- 짝-
짝짝짝짝-
<여름 너울>이 어떻게 그려졌는지, 고훈이 앞으로 어떤 목표를 가졌는지 확인한 사람들은 소년의 앞날에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다.
“고훈! 고훈!”
환호성이 이어지는 가운데 상패가 전달되었다.
제1회 아르누보 공모전 준우승이란 문구가 적힌 트로피와 함께 고훈은 50만 유로의 상금을 획득하게 되었다.
고훈이 한손에는 트로피를, 다른 한손에는 꽃다발을 들고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자 고수열이 참았던 눈물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하나밖에 없는 친구가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했음에 기뻐하던 차시현도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고.
방태호는 엉뚱하기도 어른스럽기도 하던 고훈의 일면을 본 듯해 새삼 책임감을 느꼈다.
“고훈 군에게 다시 한번 축하의 뜻을 전합니다.”
우진이 행사를 계속 이어나갔다.
“다음은 이 또한 정말 놀라운 일이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앙리 마르소 씨, 소감이 어떠십니까.”
우진은 고개를 돌리자마자 당황했다.
가장 기뻐해야 할 사람이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다.
앙리 마르소는 마이크에 눈길을 주곤 숨을 길게 내쉬었다.
2028 제1회 아르누보 공모전은 흥행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성공한 행사였지만, 그에게는 최악으로 남았다.
속이 시커먼 늙은 뱀이 심기를 건든 것으로도 모자라 경합 결과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앙리 마르소가 사회자에게서 마이크를 빼앗았다.
“며칠 전에 내 작품이 저 꼬맹이 그림이라는 이야기가 퍼졌다.”
우승한 사람의 소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싸늘한 목소리였다.
“마음에 안 들어.”
앙리 마르소의 태도는 당황스러웠지만 모두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있었다.
고훈의 작품이라는 소문이 돈 이후에 <미>를 찍는 사람이 소폭 늘어났기에 257표 차이로는 깨끗한 승부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지독하기까지 한 철저함.
스스로 부끄러울 수 없는 고결함.
앙리 마르소를 잘 아는 사람일수록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고훈이 나섰다.
“그것 때문에 표를 얼마나 얻었는지는 아무도 모르잖아요. 마르소가 우승했어요.”
“시끄러워.”
앙리 마르소가 곁에 있던 직원에게서 우승 트로피를 빼앗아 고훈에게 향했다.
“네 거다.”
“마르소 거라니까요.”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앙리 마르소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감정을 다스렸다. 다소 누그러진 목소리로 다시 한번 우승 트로피를 권했다.
“가져가.”
“내 것도 아닌데 왜 자꾸 받으라고 해요?”
“네 거라니까!”
“당신 거라고!”
갑자기 싸우기 시작한 두 사람 사이에서 우진이 프로 의식을 발휘했다.
“하하. 이거 정말 멋진 장면 아닌가요?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는 이 모습이야말로 진정.”
“닥쳐!”
“가만있어 봐요!”
앙리 마르소와 고훈이 동시에 소리치자 우진이 눈치를 보며 뒤로 물러섰다.
“가져가라니까 무슨 말이 많아?”
“싫다니까 왜 이래요? 자꾸?”
“말하잖아! 공평하지 않았다고!”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렇게 따지면 정체 숨기려고 연작 중에 하나만 공개한 건 어쩌고.”
“그건 내가 감수했던 일이야!”
“왜!”
“뭐?”
“왜 그랬냐고! 그래도 이길 수 있어서? 안 그래도 져서 열받는데 지금 나 놀려요? 놀리냐고!”
조금 전까지 눈물을 흘리던 고수열과 차시현이 입을 벌린 채 굳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