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05화
39. 왕과 영웅 그리고 펭귄(3)
아르누보 공모전 종료를 두 시간 앞두고 시작된 폐막식은 8개 언어로 36개국 공영 방송사와 뉴튜브, JH시네마 등을 포함한 9개 플랫폼을 통해 중계되었다.
카메라는 야외 스튜디오 위로 밤하늘을 밝히는 폭죽을 잡았고 이내 센강 위에 떠 있는 펭귄과 오리 모양 배를 잡았다.
파리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축하 공연이 끝나자 공모전 참가작품들을 소개하는 영상 나가고, 루브르 박물관 내 폐막식장으로 전환되었다.
여러 매체에서 사회를 맡았던 우진이 인사했다.
“미술사의 새로운 장을 연 아르누보 공모전. 앞으로 남은 두 시간 동안 어떤 작품이 있었는지 어떤 이야기가 있었는지 되짚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준비된 화면에 아르누보 공모전에 관련한 통계자료가 출력되었다.
“시대가 선택한 미술이란 주제로 시작된 아르누보 공모전은 1,789명의 예술가가 참가하였습니다.”
우진이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첫날 시테섬을 직접 방문한 관람객은 47만 197명. 정말 발 디딜 틈도 없었죠.”
사람들은 아르누보 공모전의 첫날을 떠올렸다. 인파로 가득한 좁은 섬은 미술을 사랑하는 이들의 가슴을 뛰게 했다.
프랑스 국립 예술 협회와 앙리 마르소가 제창한 대로 정말 미술계에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것만 같아서 가슴이 벅찼다.
“가상 전시장을 방문해 주신 분들은 약 1,200만 명. 21세기 최대 규모의 미술 축제였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폐막식장에 모인 초청객들이 박수로 자축했다.
“그럼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그간 힘쓴 분들을 모시고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사회자 우진이 셰바송 씨몽 협회장을 무대로 초대했다.
근사하게 차려입은 셰바송 회장이 인사했다.
“아르누보 공모전에 참가하신 예술인 여러분 그리고 방문해 주신 관람객 여러분. 프랑스 국립 예술 협회를 대표해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셰바송 회장이 손수건으로 땀을 닦곤 말을 이어나갔다.
“아르누보 공모전이 오늘과 같이 성공할 수 있었던 건 여러분 덕분입니다. 각자의 미학을 열정적으로 추구한 예술인과 그것을 즐겨주신 여러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 자리를 마련했다는 이유로 연설을 맡게 되니 민망하기도 합니다.”
초청객들이 손뼉을 쳐 셰바송 씨몽에게 경의를 표했다.
“사실 제가 회장으로 있기에 이 자리에 섰지만 아르누보 공모전을 준비하기까지 정말 많은 분이 노력해 주셨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모든 작품을 공평히 전시하고자 노력해 준 큐레이터들께 특히 미셸 플라티니 마르소 갤러리 대표에게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카메라가 미셸 플라티니를 잡았다.
갑작스레 이목을 받은 그녀는 미소로 어색함을 감추었다.
셰바송 씨몽이 초청객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제가 계속 이야기하는 것보단 실무를 맡았던 플라티니 대표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어떻습니까?”
공모전을 준비한 사람들이 미셸 플라티니를 연호했다.
처음에는 난색을 표하던 미셸은 진행자까지 나서자 어쩔 수 없이 무대로 올라섰다.
동시 시청자가 170만 명에 육박한 자리에 서니 아무리 대담한 사람이라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미셸이 어색하게 한번 웃곤 이야기를 시작했다.
“갑자기 올라오게 되어서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미셸이 숨을 골랐다.
“아르누보 공모전은 정말 특별합니다. 이런 축제가 가능할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않았거든요. 누가 그 많은 작품을 한 지역에 전시하고, 그 많은 상금을 걸고, 모든 걸 관람객의 손에 넘겼을까요. 대책 없는 누군가가 아니라면 상상하기 힘들 거예요.”
미셸의 말에 카메라가 앙리 마르소를 잡았다.
좌중에 웃음이 작게 흘렀다.
“생각해 보면 예술은 이런 게 아닌가 싶어요. 한 사람의 무모함이 누군가에게 의미로 다가가고. 그렇게 나눈 대화 자체가 소중해지는. 아르누보 공모전은 제게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작품을 어떻게 전시할지 고민하면서 참가하신 분들을 이해하게 되고. 관람객 여러분이 공모전을 어떻게 즐기는지 보면서 기뻤습니다. 그 덕분에 힘낼 수 있었어요. 우리, 정말 힘들었거든요.”
“미셸! 미셸!”
미셸 플라티니와 함께 공모전을 준비한 직원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소중한 작품을 조금이라도 더 잘 전시하고, 소외된 작품이 없도록 잠도 줄여가며 일했어요. 그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해주신 참가자와 관람객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미셸 플라티니는 준비 과정을 생략했지만 많은 이들이 그녀의 표정과 태도, 직원들의 반응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역사상 최대 규모의 공모전을 단기간에 준비하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을지는 뻔했다.
└그러게. 이거 준비 기간 반년도 안 되었잖아.
└진짜 갈아 넣은 거지.
└유럽 사람들이 강요한다고 일하겠냐? 열정이 있으니까 한 거임.
└예술 하는 사람들은 정말 저 사람들한테 고마워해야 함.
시청자들도 아르누보 공모전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땀 흘렸는지 상기했다.
미셸 플라티니가 박수를 받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우진이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다음 순서는 많이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방금 멋진 연설을 해주신 미셸 플라티니 대표의 아이디어이기도 한데요.”
초청객들이 크게 환호했다.
“그렇습니다. 현상금 이벤트. 공모전 기간에 백 작품 이상 발견하신 분 중 천 명에게 천 유로를 드립니다.”
우진이 사회를 보는 사이 중앙 스크린에 이벤트 대상자 숫자가 나타났다.
“총 380만 명께서 이벤트에 참가해 주셨습니다. 과연 천 유로의 행운은 누구에게 돌아갈지. 준비되셨나요?”
우진의 신호에 따라 스크린에 수많은 아이디가 떠올랐다.
“추첨이 시작되고 당첨되신 분들은 아르누보 공모전 공식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메시지를 받으실 겁니다. 알림 설정은 당연히 해제해 두셔야겠죠?”
시간을 둔 우진이 일주일 안에 응답하지 않으면 무효 처리가 된다는 등의 주의사항을 언급하며 시간을 끌었다.
사람들이 애가 타 원성을 내놓기 직전에야 추첨이 시작되었고 곧 천 개의 닉네임이 순차적으로 화면에 떠올랐다.
“히잉.”
공모전을 열심히 참가했던 차시현이 모든 닉네임이 발표되자 낙담했다.
“천 개나 찾았는데.”
“아직 남았잖아.”
고훈이 작가를 맞히는 이벤트가 남아 있다며 친구를 위로했다.
“그건 백 명밖에 안 주잖아.”
이벤트 참가자가 얼마나 될지 몰라도 확실히 확률이 낮았다.
“근데 상금 타서 뭐 하게? 돈 많잖아.”
“용돈 많이 안 받아.”
고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집이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어렸을 적부터 너무 많은 돈을 받으면 경제 관념이 잘못 잡힐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뭐 할 건데? 물감 살 거야?”
차시현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아버지가 다 사주니까 주식 살 거야. JH시네마 주는 계속 오를 테니까 어른 되면 훨씬 비싸게 팔 수 있어.”
고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는 사이 공모전 종료 시점인 밤 10시가 되었다.
한 시간 전부터 투표 현황이 비공개된 터라 누구도 우승작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조금 전 오후 10시를 기점으로 아르누보 공모전이 마감되었습니다. 이제 총방문객 1,300만 명의 선택을 받은 작품이 무엇인지 공개해야 할 텐데요.”
우진이 분위기를 잡자 차시현이 고훈의 소매를 붙잡고 흔들었다.
“상위 열 작품은 올해 말 루브르 박물관 특별 전시회를 장식하게 되며, 이후로도 5년간 프랑스 국립 예술 협회의 지원을 받아 전시될 예정입니다.”
참가자들은 루브르 박물관 및 SNBA가 주최하는 여러 전시회에 작품을 전시할 기회를 상금보다 더 가치 있게 여겼다.
단발성 수익보단 작가로서의 인지도와 가치를 높이는 쪽이 향후 활동에 도움이 되었다.
“그렇다면 대망의 10위부터 알아보겠습니다. 총투표수 30,954,127표. 새로운 시대를 선도할 작품은 과연 무엇일지!”
우진이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초청객과 시청자 모두 잔뜩 기대를 모았다.
아르누보 공모전을 통해 진정 새로운 주류로 거듭날 작품과 그 작가가 누구인지 조금이라도 빨리 알고 싶었다.
“광고 후에 공개됩니다!”
* * *
“총 650,036표를 얻은 10위는! 가장 아름다운입니다!”
진행자 우진의 말과 함께 중앙 스크린에 번데기에서 막 벗어나는 나비가 나타났다.
파브르의 <가장 아름다운>이다.
10위권에 들었다가 벗어나길 반복했지만, 저 순수한 열정이 관람객의 마음을 움직인 듯하다.
객석 저편에서 파브르가 벌떡 일어났다.
얼떨떨한지 눈을 크게 뜨고 화면만 보고 있다.
딸이 큰 상을 받아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아버지를 보니 괜히 흐뭇해진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살아계셨더라면 분명 저렇게 기뻐해 주셨을 거다.
“대단하네요. 느낌이 있다곤 생각했는데 저 어린 나이에.”
방태호가 감탄했다.
확실히 이제 고작 열다섯 먹은 아이가 내로라하는 예술가가 모두 모인 이곳에서 10위 안에 들 거라고 예상하긴 힘들다.
“자기 이야기가 확실하니까. 앞으로 어떤 그림을 그릴지 기대되더군.”
할아버지도 파브르를 좋게 보신 모양이다.
“좀 이상해도 그림은 예뻤어.”
차시현도 호감을 가진 듯.
그러고 보니 곤충 도감을 교환하자고 했는데 어떻게 연락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파브르가 무대에 올라 상패와 꽃을 들고 마이크 앞에 섰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앞에 두면 긴장할 만도 한데, 다부진 눈과 당당한 태도는 여전하다.
“자, 블랑쉬 파브르 작가님. 정말 기쁘실 텐데 입상 소감 부탁드립니다.”
진행자 우진이 소감을 물었다.
“…….”
생각이 많은지 소감은 말하지 않고 앞만 보고 있다.
“하하. 너무 기뻐서 말이 잘 안 나오는 것 같네요. 축하의 박수 부탁드립니다.”
우진의 요청에 초청객들이 어린 화가의 결실을 다시 한번 축하하고 나섰다.
나와 차시현도 마음을 담아 손뼉을 쳤다.
“저는.”
할 말을 정리했는지 파브르가 입을 열었다.
“제 목표는 앙리 마르소예요. 그 사람보다 멋진 그림을 그릴 때까지 멈추지 않을 거예요.”
뜬금없이 마르소에게 선전포고한 블랑쉬 파브르가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말을 마쳤다.
콧김을 뿜고 입을 앙다문 모습이 당차다.
“하하. 이거 재밌네요. 최고의 화가로 알려진 앙리 마르소보다 멋진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당찬 포부였습니다. 앙리 마르소를 목표로 삼는 이유가 따로 있을까요?”
역시 프로인가.
파브르가 자기 생각을 좀 더 풀 수 있을 것 같다.
당찬 화가가 우진에게 시선을 한번 주었다가 고개를 돌렸다.
“제일 멋지니까.”
본인을 깊게 들여다보는 아이라 자신에게 당당한 마르소를 좋게 본 모양.
마르소를 이기겠다, 넘어서겠다, 타도하겠다는 말들이 어쩌면 동경의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이건 마르소 작가의 대답을 안 들을 수 없겠네요. 마이크 좀 넘겨주시겠습니까?”
직원 중 한 사람이 바쁘게 뛰어 마르소에게 마이크를 넘겨주었다.
“마르소 작가님, 유망한 화가에게 제일 멋지단 말을 들으셨는데, 답변을 해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진이 마르소에게 답변을 요구했다. 주변에서도 그가 어린 화가에게 무슨 말을 꺼낼지 기대하는 눈치다.
“이상한 말 하지 않을까?”
차시현이 걱정스레 귓속말했다.
“아닐 거야.”
이러니저러니 해도 예술에는 진지한 사람이니까 좋은 말을 해줄 거다.
앙리 마르소가 마이크를 들었다.
“예술가는 당연한 말을 하는 게 아니야.”
갑자기 찬 바람이 분 듯하다.
훈훈한 장면을 기대했던 사람들이 당황하는 사이 파브르가 중얼거린 말이 마이크를 탔다.
“진짜 싫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