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03화
39. 왕과 영웅 그리고 펭귄(1)
2028년 12월 6일 오전 10시.
미술 공모전 역사상 가장 많은 상금이 걸린 아르누보 공모전이 종료를 앞두었다.
심사위원 제도 폐지, 투표제 도입, 총 방문자 1,300만 명(가상 전시회 방문객 포함) 기록 등으로 개막 전부터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아르누보 공모전은 2020년대 가장 흥행한 미술 축제였다.
호사다마라고 좋은 일만 있진 않았다.
개인당 최대 열 작품을 투표할 수 있었기에, 좋아하는 작품을 선택하고 남은 표가 일부 유명 작가에게 쏠리는 경향이 생겨났다.
덕분에 익명 참가를 기반으로 했던 대회 취지는 다소 옅어졌고.
4일 연속 1, 2위를 지키던 <미>와 <여름 너울>을 제치고 1위를 기록한 <이별>의 데미안 카터는 이에 책임감을 느낀다며 사퇴를 선언하는 데 이르렀다.
└폐막식 언제 시작함?
└밤 8시.
└아직 한참 남았네 ㅠㅠ
└결국 우승은 미가 하는구만.
└여름 너울 좀 아쉽다. 마지막에 꽤 많이 따라잡았는데.
└미랑 여름 너울은 진짜 인정받아야지. 추측은 있어도 결국 누군지 확실히 알려지진 않았잖아.
└데미안 카터가 정말 멋진 일 했지. 모른 척했으면 우승했을 텐데 사퇴하면서 미랑 여름 너울이 1, 2등 했잖아.
└ㅇㅇ 그 사람들은 데미안 카터한테 고마워하고 있을 듯.
└근데 이건 뭐임?
└뭐가?
└[앙리 마르소, 기자회견장을 찾아 난동 부리다]
└[데미안 카터 사퇴 발언에 앙리 마르소 발끈. “데미안 카터는 아르누보 공모전과 관련한 모든 이를 무시했다.”]
└우리 형 왜 저러지.
└무시한 건 아니지 않나?
└앙리 입장에선 대회 잘 준비했는데, 도중에 사퇴한다고 하니까 서운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저렇게 난리 부리는 건 좀……. 데미안 카터 덕분에 대회 취지도 어느 정도 맞게 되었잖아.
└ㅇㅇ 작가가 알려지지 않은 미랑 여름 너울이 1, 2위 차지하게 되었으니 도리어 앙리가 데미안에게 고마워할 일이지.
“이게 무슨 상황이야?”
폐막식을 취재하고자 아침 일찍 거리로 나선 김지우가 여론 반응을 확인하던 중에 욕설을 내뱉었다.
상위권 작품 중에선 <미>와 <여름 너울> 단 두 작품만이 익명성을 유지했거늘.
앙리 마르소와 고훈이 우승과 준우승을 거둔 일이 데미안 카터의 배려 덕분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어이없어.”
김지우는 만약 고훈과 앙리 마르소가 본인들의 작품을 밝혔더라면 다른 작품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많은 표를 얻었으리라 확신했다.
“이건 좀 심하네요.”
곁에 있던 이인호 기자도 고개를 저었다.
“미랑 여름 너울이 데미안 카터 덕분에 성공했다는 건 말이 안 되죠.”
이인호 기자의 말대로였다.
첫날부터 화제를 모은 <미>와 <여름 너울>은 공모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찾은 작품이었다.
그것은 아르누보 공모전 공식 애플리케이션 이벤트 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미셸 플라티니가 도입한 작품 찾기 이벤트 덕에 작품마다 몇 사람이 방문했는지가 기록되어 있었다.
<미>와 <여름 너울>을 본 사람은 총방문자의 99.8%에 해당하는 13,002,955명.
데미안 카터의 <이별>이 기록한 7,947,698명을 크게 앞서 있었다.
검색량, 방문객 심지어는 6일 차와 7일 차에 쏠린 표까지 <미>와 <여름 너울>이 모든 수치에서 압도적이었다.
“저 잠시만요.”
김지우가 노트북을 꺼내 오늘 게시하려던 특집 기사 외에 다른 파일을 하나 더 생성했다.
폐간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할 잡지사의 평범한 기자였지만 왜곡된 상황을 지켜만 보고 있을 순 없었다.
이인호는 시끄러운 주변 환경에도 금방 집중하여 원고를 작성하는 김지우를 보며 따뜻한 커피를 마셨다.
* * *
미셸 플라티니가 마르소 저택을 방문했다.
“……앙리?”
오늘 저녁에 있을 폐막식에 함께 참가하기 위함이었는데, 앙리 마르소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가 반쯤 빈 코냑을 집어 들기에 만류했다.
“어쩌려고 이러고 있어. 많이도 마셨네.”
미셸은 앙리가 잔뜩 취해 있을 거라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앙리 마르소의 눈은 조금도 처지지 않았다.
분노로 가득하여 당장에라도 무슨 짓을 저지를 것 같았다.
“왜 그래.”
앙리 마르소는 대답은 하지 않고 빼앗긴 코냑을 낚아채려 했다.
미셸도 그가 왜 이러는지 대충 짐작했다.
그녀의 사랑스러운 멍청이는 자존심을 지킬 줄 알았다.
패배하더라도 본인을 더욱 발전시키는 원동력으로 삼아 기어이 상대를 넘어서는 남자였다.
데미안 카터의 <이별>에 밀려 <미>가 우승하지 못했다면, 다음 기회에 더 나은 결과를 이뤄낼 터.
패배는 그의 자존심을 짓뭉갤 수 없었다.
그가 화난 이유는 데미안 카터가 사퇴함으로 인해 <미>가 우승할 수 있었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자존심 강한 앙리 마르소로서는 견딜 수 없이 치욕적인 일이었다.
“따라줄게.”
미셸이 잔을 채워주었다.
앙리가 고개를 들었다.
“마시지 말라 해도 마실 거잖아.”
미셸이 어깨를 으쓱였다.
외골수적인 면 때문에 가끔 이상해 보여도, 고작 이런 일로 자신을 망칠 만큼 한심한 사람은 아니라고 믿었다.
혼자서도 해낼 사람이었다.
그렇게 그를 신뢰하고 사랑하기에 조언은 하지 않았다.
그저 위로할 뿐이었다.
앙리 마르소가 술을 들이켰다. 향을 깊이 음미하곤 숨을 내쉬었다.
“100만 유로.”
공모전 우승 상금이었다.
“그러게. 이대로면 100만 유로 벌겠네?”
100만 유로는 그에게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었다.
그러나 고훈과의 경쟁에서 이기고 싶었던 그에겐 남다른 의미가 있을 터였다.
“그 정도면 하나 살 수 있어.”
“뭘?”
미셸은 앙리가 자신에게 무엇을 선물할지 궁금했다.
가지고 싶은 건 언제든지 얼마든지 가질 수 있는 그가, 고훈과의 경합에서 이긴 본인에게 무엇을 선물할지 쉽게 예측할 수 없었다.
“미사일.”
“……어?”
“토마호크 미사일 하나가 130만 달러 정도 해.”
미셸이 눈을 깜빡였다.
앙리가 독특한 취향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민간이 그런 걸 살 수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그놈 집 정돈 박살 내겠지.”
미셸이 어이가 없어 헛웃음 지었다. 둘만 있을 때 아주 가끔 이런 농담을 꺼내곤 했다.
“네가 하면 진담 같으니까 농담이라도 그런 말 하지 마.”
앙리 마르소가 코냑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진심이야?”
앙리가 테이블을 세 번 두드렸다. 유리로 된 테이블에 인터넷 창이 떠올랐다.
“읽어 봐.”
미셸이 화면을 앞으로 끌어와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자레드 사치, 예술가를 위한 재단 설립]
사치 갤러리 소유주 자레드 사치가 영국 현대 예술의 부흥을 후원하는 재단 다이몬을 설립했다.1)
[데미안 카터, 사치 갤러리에서 생에 첫 개인전]
영국의 예술가 데미안 카터가 생에 첫 개인전을 열었다.
삶과 죽음에 관한 깊은 철학이 담긴 데미안 카터의 작품은 19일부터 2주간 사치 갤러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
두 기사의 날짜는 일주일을 간격으로 두고 있었다.
“그전까지 아무런 성과가 없었던 데미안 카터의 영원이 5,000만 파운드에 낙찰됐어.”
“기억나.”
데미안 카터의 첫 개인전은 미셸 플라티니도 잘 알고 있었다.
그곳에 전시되었던 데미안 카터의 <영원>은 이후 영국 소더비에서 무려 5,000만 파운드에 낙찰되어 그해 최고가를 갱신했었다.
당시 어렸던 미셸도 기억할 정도로 화제였다.
“정황상 다이몬 재단이 데미안 카터를 후원했고, 사치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어줬다고 봐야겠지.”
“그러네.”
미셸이 고개를 끄덕였다.
몇몇 기사만 봐도 다이몬 재단이 무명이었던 데미안 카터를 높이 평가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들의 판단은 정확했고 첫 개인전에서 발표된 <영원>은 크게 주목받았었다.
영국을 대표하는 현대 예술가장 데미안 카터의 시작이었다.
“이게 왜?”
미셸이 물었다.
놀라운 일이긴 하지만 근 20년 전 옛일에 주목한 이유를 알고 싶었다.
“이 다이몬 재단에 제이 조플링이란 인간이 있었어. 지금은 탈퇴한 것 같지만.”
앙리가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과거 다이몬 재단의 창설식 사진이었다.
“첫 번째 줄 가운데. 자레드 사치 옆에 있는 남자. 알아보겠어?”
미셸이 시선을 옮겼다.
꽤 오래전 사진이나 사진 속 남자가 제이 조플링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의 외모는 지금이나 18년 전이나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아.”
미셸이 어제 앙리 마르소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앙리는 제이 조플링이 데미안 카터와의 관계를 부정하며 그와의 연락을 방해했던 걸 분해했었다.
“그러네. 이상하네. 후원 단체 이사였으면 모를 리가 없는데.”
“그게 아니야.”
앙리 마르소가 또 하나의 기사를 보였다.
[영원 5,000만 파운드에 낙찰]
영국 소더비에서 데미안 카터의 <영원>이 5,000만 파운드에 낙찰되었다.
구매자는 블랙 큐브 갤러리 소유자이자 런던 시의원 제이 조플링이다.
제이 조플링은 삶은 죽음으로 향하고 있기에 가치가 있다며, <영원>은 특별한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어?”
<영원>을 산 사람이 데미안 카터를 후원한 다이몬 재단에 소속되어 있던 제이 조플링이었다.
“이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해?”
상식적으로 허용될 리 없었다.
법적으로 후원자의 작품을 사들이는 일이 금지되지는 않았지만, 좁은 미술계에 소문이라도 난다면 큰 문제로 번질 수 있었다.
“가능했어.”
앙리 마르소가 다이몬 재단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어느 곳을 살펴도 제이 조플링에 관한 내용은 없었다.
다이몬 재단과 제이 조플링을 함께 검색해도 연관성을 찾을 수 있는 글은 어디에도 없었다.
“제이 조플링이 다이몬 재단과 관련 있다는 건 분명해. 그러지 않고서야 창설식 기념사진을 찍는데, 이사장 바로 옆에 서 있을 리 없지.”
“응.”
“그런데 이 사진 외에는 다이몬 재단과 제이 조플링이 관련되어 있단 기록이 어디에도 없어.”
“의도적으로 숨겼을지도 모르겠네.”
“그래.”
미셸이 사진을 한 번 더 살폈다.
“왜 그랬을까?”
“그걸 알아내야지.”
“구설에 휘말리지 않고 싶어서?”
“가능성 있어.”
앙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제이 조플링이 본인의 입장 때문에 <영원>을 구입하길 망설였다면 관련 내용을 숨겼을 가능성이 있었다.
당시 런던 시의원을 맡고 있기도 했고 몇 년 전에는 하원의원이기도 했으니 정치인인 그로서는 불필요한 루머를 피하고 싶었을지도 몰랐다.
“이 사진은 어떻게 구했어?”
“셰바송 영감. 첫 줄 제일 왼쪽.”
미셸이 시선을 옮겼다.
배불뚝이 멜빵 노인은 온데간데없이 젊고 마른 이지적인 중년이 서 있었다.
“어머.”
“축하하러 갔었대. 제이 조플링이랑 악수도 했다고 했어.”
“음.”
미셸이 한 번 더 고민했다.
크게 문제 될 일은 없는 듯하나 데미안 카터와 연관된 일을 숨기려는 제이 조플링이 의심스러웠다.
앙리 마르소가 또 하나의 기사를 보였다.
“영원이 5,000만 파운드에 낙찰되었을 때 다른 작품은 얼마에 팔렸는지 알아봤어.”
미셸이 눈을 의심했다.
기록적인 액수로 작품이 거래되었던 전시회에 다른 작품은 거래된 바가 없었다.
“하나도 안 팔렸다고?”
앙리 마르소가 잔을 들었다.
“모든 일이 단순히 우연이라면 큰 문제는 없겠지.”
“……만약 누군가의 의도였으면?”
“그래.”
앙리 마르소가 잔을 놓으며 말했다.
“연극이야.”
* * *
1)Daemon: 다이몬. 고대 그리스 신화 속에 나오는 반신반인.
출처: 옥스퍼드 영한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