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202화 (157/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02화

38. 그림 그리는 사람(10)

아르누보 공모전 6일 차 저녁.

거장 데미안 카터가 기자회견을 열었다.

우승을 하루 앞둔 시기였기에 언론과 대중은 그가 무슨 말을 꺼낼지 관심을 모았다.

수많은 눈이 지켜보는 가운데, 데미안 카터는 차마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뭐야. 무슨 일이지?”

“분위기가 무거운데.”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은 기자들이 질문하고 나섰다.

그러나 데미안 카터는 답이 없었고 사회자가 대신 나서서 주변을 진정시켰다.

회장이 조용해진 뒤에야 데미안 카터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어제 한 기자의 지적과 팬들의 반응을 보곤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거장은 다소 잠긴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아르누보 공모전은 많은 작가에게 혜택을 주었습니다. 주최 측의 노력으로 다양한 작품이 사랑받을 수 있었지요. 다만 제 마음과는 달리 저는 공모전 의도와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SNBA도 저도 그리고 아르누보 공모전을 사랑하신 분들도 원하는 길이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줄곧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던 데미안 카터는 고개를 들고 결의에 찬 눈빛으로 기자들을 보았다.

“저는 이 시간 이후로 공모전 참가 자격을 내려놓겠습니다.”

카메라 셔터 소리와 함께 기자들이 앞다투어 일어섰다.

“공모전을 포기한단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어떤 경위로 그만두시는지 정확히 말씀해 주십시오!”

“익명을 전제로 한 공모전인 만큼 제 작품이 사랑받을 수 있을지 스스로 시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진행되어서 다른 작가들의 기회를 박탈하게 될 거라곤 생각지 못했습니다. 더 늦기 전에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 응원해 온 팬들에게는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저를 알아봐 주신 팬 덕분에 가장 많은 표를 얻었습니다. 그 점은 잊지 못할 겁니다. 다만,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이번 공모전이 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가길 바랄 뿐입니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 * *

쩍-

TV를 보고 있던 앙리 마르소가 들고 있던 잔을 던졌다.

유리잔은 모니터에 반쯤 박혔고 산산이 조각난 유리 조각은 바닥에 비산했다.

아르센은 깜짝 놀라 신경질적인 고용주를 살폈다.

평소 화가 많은 사람이긴 하나 이렇게까지 흥분한 모습은 드물었다.

“감히. 감히.”

앙리 마르소는 데미안 카터를 용서할 수 없었다.

아르누보 공모전은 예술계 부흥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미셸 플라티니가 악조건 속에서도 몇 달간 고생하여 최선의 결과를 도출해낸 공모전이었다.

현재를 대표하는 본인과 미래를 상징하는 고훈이 경합하는 신성한 무대였다.

앞으로 자신이 예술계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알리는 장소이기도 했다.

데미안 카터는 그러한 아르누보 공모전을 고작 광고판으로 치부했다.

<이별>을 주목받게 하고 본인의 가치를 올리기 위한 수단으로 여겼다.

용서할 수 없었다.

앙리 마르소는 곧장 차고로 향했다.

“작가님, 어디 가시려고?”

아르센의 질문을 들은 척도 안 한 그는 데미안 카터가 기자회견을 연 장소로 차를 몰았다.

한편.

고훈 또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데미안 카터의 선택에 크게 충격받은 고수열과 방태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차시현이 물었다.

“왜 사퇴하는 거예요?”

“……공모전 취지에 어긋난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서라고는 하는데.”

“아니에요.”

고훈이 방태호의 말을 끊었다.

“그럴 생각이었으면 애초에 그런 작품을 내지 않았을 거예요.”

<이별>은 데미안 카터를 잘 모르는 사람이 봐도 금방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개성적이었다.

동물을 박제하는 방식이나 삶과 죽음이란 주제 의식은 데미안 카터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상황을 예측하지 못할 리 없었다.

“그래. 몰랐을 리 없지.”

방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말을 가져다 붙였지만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았다.

“SNS에서는 다들 좋아하는데?”

차시현이 스마트폰을 펼쳤다.

└1등 하는 상황에서 이런 결정하기 진짜 힘들었을 텐데. 생각이 진짜 깊다.

└이런 사람이 예술가지.

└데미안 카터 정말 대단하다. 인기 투표로 진행되니까 곧장 포기하네.

└여론이 워낙 부정적이었으니까. 데미안 카터도 의도한 거 아니냐고 지적 나왔었잖아.

└저걸 봐라. 의도했으면 사퇴하겠냐? 어떻게든 까내리고 싶은 것들이 데미안 카터 욕하는데, 이제 속시원한지 묻고 싶네.

└진짜 위인은 위인임.

└다른 참가자들은 어때?

└당연히 좋아하겠지. 자기 순위 한 단계씩 올라가는데.

고훈이 이를 꽉 물었다.

좋은 사람인 척, 의로운 척하지만 데미안 카터는 최선을 다해 공모전에 임한 1,788명의 예술가를 조롱했다.

공모전을 준비한 수많은 이를 이용했다.

“시기가 이상해.”

방태호가 나섰다.

“이런 이유였으면 진즉에 그만두었어야지. 1위를 찍자마자 이러는 건 다른 의도가 있다고밖에 안 보여.”

“어떤 의도요?”

“……작품 가격 때문이겠지.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고훈이 눈썹을 찌푸렸다.

우승 상금 100만 유로는 아르누보 공모전 출품작의 거래액이나 마찬가지였다.

저작권과 소유권은 작가에게 있지만 5년간 독점적 사용권을 SNBA에 넘기는 조건이기에, 입상작은 루브르 박물관 및 여러 전시회에 걸릴 예정이었다.

“5년 뒤에는 팔 수 있잖아요.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요?”

“굳이라.”

방태호가 숨을 길게 내쉬고 생각을 정리했다.

“작품 가격은 언제 파느냐도 중요해. 만약 데미안 카터가 정말 내 생각대로 행동했다면, 아르누보 공모전을 통해 이별이 가장 주목받고 있을 때 팔고 싶을 거야.”

고훈은 방태호의 설명을 믿고 싶지 않았다.

이 시대 최고의 예술가 중 한 사람이 그런 짓을 저지르리라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데미안 카터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그럴듯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여론을 잘 모으는 사람이야. 어쩌면 이인호 기자 기사를 기회로 여겼는지도 모르지. 기사 내용을 지지한 덕에 표를 얻었으니까.”

이인호 기자가 용기를 내 지적한 아르누보 공모전의 문제점.

데미안 카터는 그에 응하며 화제를 모았고 덕분에 근소한 차이를 보이던 <미>를 추월할 수 있었다.

고훈은 사람을 의심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며 애써 부정했지만.

데미안 카터가 본인을 제외한 1,788명의 참가자를 능욕했단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지난 몇 달간 일상을 포기하고 달려들었던 공모전.

참가자들이 그토록 쟁취하고 싶었던 자리를 포기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모욕이었다.

데미안 카터가 무슨 의도로 사퇴하는지, 어디서부터 계획된 일인지는 몰라도 그것만큼은 진실이었다.

“할아버지.”

고훈이 고수열을 불렀다.

큰 충격을 받았던 고수열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내일 초대받으신 거. 전 안 갈래요. 그 사람이랑 어울리고 싶지 않아요.”

데미안 카터가 보내온 초대장을 떠올린 고수열은 숨을 길게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자꾸나.”

고수열은 지난날 기억 속의 데미안 카터를 떠올리며 탄식했다.

* * *

쾅!

앙리 마르소가 파리 시내의 한 호텔 세미나실을 박차고 들어섰다.

“…….”

기자회견은 끝난 터라 내부를 정리하는 직원과 일부 기자, 몇몇 관계자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기자들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인터뷰 대상에게 몰려들었다.

“마르소 씨! 데미안 카터의 용단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용단?”

앙리 마르소가 질문한 기자의 멱살을 잡았다.

“어딨어.”

“예, 예?”

“데미안 카터 어딨어!”

앙리 마르소가 평소 안하무인처럼 행동하긴 하나, 물리적으로 행패를 부린 적은 드물었기에 기자들은 당황했다.

그러는 한편, 잔뜩 흥분한 그를 촬영하는 걸 잊지 않았다.

“오. 마르소 군 아닌가.”

그때 한 남자가 앙리 마르소에게 다가갔다.

억만장자 제이 조플링이었다.

“무슨 일로 이렇게 흥분하셨나.”

앙리 마르소가 손에 힘을 풀어 기자를 놓았다. 그러고는 제이 조플링에게 성큼 다가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데미안 카터 어디 있어.”

“카터? 글쎄. 팬이긴 하지만 사적으로 만나는 관계는 아니라서.”

앙리 마르소가 얼굴을 들이밀어 위협했다.

“개소리 집어치워.”

데미안 카터의 작품을 5,000만 파운드나 주고 산 제이 조플링이 그에 대해서 모를 리 없었다.

일반적으로 수집가와 예술가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수집가는 양질의 작품을, 예술가는 거액을 바라였기에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자, 자. 흥분하지 말고. 무슨 일인지 몰라도 안쪽에서 천천히 이야기하지.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지 않나.”

제이 조플링이 웃었다.

그 능글맞은 미소가 앙리 마르소를 더욱 자극했다.

“당장 내 앞에 데려와.”

“으음. 무리한 부탁일세.”

순순히 말을 들어줄 것 같지 않았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데미안 카터와의 관계를 부정하는 것을 보니 감춰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 터.

앙리 마르소가 고개를 돌렸다.

“데미안 카터의 사퇴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지.”

앙리 마르소가 왜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기자들이 녹음기를 켰다.

“공모전에 참가한 이들을 개무시한 개새끼라는 게 첫째.”

기자, 호텔 직원 등 세미나실에 있던 모든 사람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감히 나 앙리 마르소를 조롱한 멍청한 인간이 있어서 놀랍다는 게 둘째.”

앙리 마르소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여 제이 조플링을 노려보았다.

“이별인지 개똥인지 뭔지가 어떤 경매장에 올라올지 궁금한 게 셋째.”

앙리 마르소가 제이 조플링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돈 좀 벌고 싶은 것 같은데, 상대를 잘못 골랐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만?”

“그래. 모르겠지. 알면 그럴 리가 없지.”

“그러니까 설명을 좀 해주지 않겠나? 갑자기 찾아와 화만 내니 당황스럽군그래.”

제이 조플링은 기자들을 의식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제아무리 앙리 마르소라 할지라도 언론이 지켜보는 가운데 해코지를 할 순 없었다.

더욱이 공모전을 사퇴하는 일은 명분이 명확했다. 문제 삼는 쪽이 역풍을 맞이할 터였다.

앙리 마르소가 으르렁댔다.

“늦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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