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01화
38. 그림 그리는 사람(9)
작은 식당을 찾았다.
공모전 기간이라 그런지 관광객으로 가득하다.
차례를 기다리며 투표 현황을 확인하니, 결국 데미안 카터의 <이별>이 <미>를 추월하고 말았다.
투표는 내일 밤 10시에 종료.
아무래도 판세를 뒤집긴 어려울 듯싶다.
작품 자체의 아름다움을 추구한 아르누보 공모전의 정신을 지지하지만 누구의 작품인지 역시 중요한 요소.
다음을 기약해 본다.
“말도 안 돼. 네 그림이 훨씬. 훨씬 멋진데.”
차시현이 위로한다.
“이것도 선택이니까. 그래도 130만 명이나 응원해 주었잖아.”
아르누보 공모전에 참가하기로 했을 때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이야기다.
순위보단 많은 사람과 만나고 얼마나 깊은 대화를 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결과는 겸허히 받아들이고 다음에는 어떤 방식으로 무슨 대화를 나눌지 생각하자.
할아버지가 기특하다는 듯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니야. 정말 대단한 거야.”
방태호가 나섰다.
“무슨 작품인지 알리지 않았는데도 득표수는 비슷하잖아. 사실상 마르소랑 훈이 네가 이긴 거지.”
“그렇죠?”
<이별>에 추월당한 게 속상한지 방태호의 위로에 차시현이 기다렸다는 듯이 호응한다.
“그럼. 결과 발표되면 다들 부끄러워할 거야. 그리고 아마 훈이는 더 주목받을 테고.”
끝까지 공모전 정신을 지켰다는 쪽으로 포장되려나.
그런 일은 어떻게 되어도 관심 없다. <이별>에게 밀린 일도 아쉬울 뿐 크게 와닿지 않는다.
페이스노트나 인스타, 뉴튜브 등에서 <여름 너울>에 대한 감상을 잔뜩 볼 수 있고.
<여름 너울>을 직접 본 사람들을 눈에 담을 수 있었으니까.
“꼭 그럴 거예요. 꼭 그럴 거야.”
차시현이 똘망똘망한 눈으로 거듭 응원했다.
“괜찮다니까.”
“아닌데? 삐진 거 같은데?”
“뭘 삐져.”
말해주지 않으면 계속 보고 있을 것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그래. 미보다 표가 적은 건 좀 속상해.”
“무서운 아저씨 그림?”
고개를 끄덕이자 방태호가 정색했다.
“아니야, 훈아. 정말 잘했어. 앙리 마르소랑 경쟁하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대단한 거야.”
“같은 조건인데 조금 밀렸으니까요. 속상하죠.”
“…….”
마르소가 이번 일로 나를 완전히 넘어섰다고 생각하게 되면 어찌 될지 모르겠다.
그게 싫다.
앙리 마르소란 매력적인 예술가와의 관계가 고작 경쟁 관계로 규정되는 것이 싫고.
또한 그렇기 때문에 지고 싶지 않다.
다음에는 기필코 더 멋진 작품을 보여줄 거다.
“마르소를 그렇게 여기는 사람은 너뿐일 거야.”
방태호가 다른 사람에게도 자주 듣던 말을 반복했다.
평범하게 대할 뿐인데 아무래도 여러 의미로 대단한 인간이라 신기해하는 듯하다.
“들어오세요.”
차례가 되어 안으로 들어섰다.
간단히 점심을 먹고 거리로 나서자마자 누군가 할아버지를 불렀다.
“고수열 경.”
“오오. 카터.”
할아버지가 풍성한 갈색 수염을 잘 정돈한 남자를 기꺼이 안았다.
서글서글한 인상이다.
“사진으로 봤어. 데미안 카터야.”
차시현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 또한 매체를 통해 본 적 있어서 금방 알아볼 수 있었지만 일행으로 보이는 남자는 누군지 모르겠다.
“몸이 더 좋아지신 것 같습니다.”
“그래 보이나?”
“젊은 사람 못지않습니다.”
“껄껄. 남는 시간에 달리 할 일도 없으니 말일세. 훈아, 인사해라. 누군지 알지?”
“네. 안녕하세요.”
“오늘 아침에 기분이 좋더니, 어린 반 고흐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반가워.”
데미안 카터와 악수했다.
“이쪽은 선플라워 방태호 대표일세.”
“방태호입니다.”
“반가워요.”
“내 정신 좀 봐. 맷, 인사하게.”
“사치 갤러리의 맷 브라운입니다.”
갤러리 직원으로 보이는 마른 남자가 할아버지와 방태호에게 인사했다.
어디 몸이라도 안 좋은지 표정이 다소 굳어 있다.
차시현이 귓속말했다.
“저 아저씨 모르나 봐.”
“뭘?”
“너 그 말 싫어하잖아.”
어린 반 고흐란 말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
내가 정말 아무 발전이 없었더라면 스스로 부끄러워 화를 냈을지도 모르지만 정색할 일은 아니다.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기도 하고.
<가면> 이후 빈센트로 살 적의 그림과 전혀 다른 그림을 그린다는 건 누구나 인정하는 일이다.
“그래. 어디 가는 길인가?”
“약속 전에 둘러보고 있었지요. 고훈 군 작품은 어디에 있나 찾아도 볼 겸.”
데미안 카터가 호탕하게 웃곤 나를 보았다.
“어쩌다 보니 일이 이렇게 되어 부끄럽네. 어떤 작품인지 몰라도 꼭 좋은 결과 있길 바랄게.”
“고마워요.”
데미안 카터가 할아버지와 인사를 나누고 가던 길로 향했다.
“저 아저씨 좀 싫어.”
오늘따라 차시현이 깐깐하다.
“왜?”
“이미 자기가 이긴 것처럼 말하잖아. 듣기 싫은 말도 하고. 작품도 이상하고.”
잔뜩 성이 났다고 알리려는 듯 입술을 내민다.
“나쁜 뜻은 없을 거야. 보기 드물게 좋은 사람이란다.”
할아버지도 나서서 데미안 카터를 두둔했다.
“어떻게 알게 되셨습니까?”
“영국에서 활동할 때 몇 번 만났었지. 한동안은 꽤 가깝게 지냈었네.”
“영국에 계셨을 때라 하시면 꽤 예전 일이네요.”
“음. 그때는 카터 저 친구도 무명이라 힘들었어. 예민했었는데 지금은 얼굴도 보기 좋고. 여유가 생겼구만.”
“무명 시절이 상당히 길었다고 들었습니다.”
“음. 워낙 독특하니 말일세. 그래도 알아봐 주는 사람이 생겨서 다행이지.”
“대박이었죠. 5,000만 파운드였나요? 첫 낙찰가가.”
“처음은 아니고. 드문드문 팔다가 그렇게 되었지. 한 번 물꼬가 트이더니 이후로는 쭉쭉 잘 나가더군.”
오랜 무명 시절을 극복해내고 지금은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예술가가 되었다니 그야말로 인간 승리다.
지금으로서는 데미안 카터의 예술세계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언젠가 페르디난도 곤잘레스처럼 가슴 깊이 받아들이는 날이 오길 바란다.
“이상해.”
“또 뭐가?”
“그렇게 유명하지 않던 사람이 어떻게 5,000만 파운드나 받아?”
“작품이 좋았나 보지.”
차시현이 데미안 카터를 검색했다.
당시에는 꽤 유명한 일이었던지 곧장 관련 기사가 나왔다.
영국 소더비에서 5,000만 파운드에 낙찰된 <영원>.
“이게 뭐야?”
차시현도 나도 놀랐다.
실제 사람 두개골을 두고 한쪽에는 사파이어 1만 개를 붙이고 다른 한쪽에는 죽은 파리를 붙인 작품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징그러워.”
확실히 독특한 감성이다.
의도적으로 기괴한 느낌을 주고자 한 듯한데 실제 사람 머리라는 점도, 파리 사체를 붙인 점도 거부감이 든다.
보석과 사체라는 극단적인 상징물을 활용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확실한 건 작품 가격 5,000만 파운드는 사파이어값이 반영된 가격이라는 점이다.
무명이라고 해서 가난하진 않았던지 용케 사파이어 1만 개를 가공했다.
“그 친구 참 가난해서 감자도 제대로 못 먹었네. 참 딱했는데. 지금은 저렇게 살이 오른 걸 보니 참 다행이야.”
“멋진 성공기죠. 일전에 자서전을 읽은 적 있는데 성공을 뽐내지 않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더라고요.”
“음. 좋은 일이지.”
“……?”
가난해서 감자도 제대로 못 먹던 사람이 사파이어 1만 개를 어떻게 구했지?
“이상하지 않아?”
차시현도 같은 생각인 듯.
할아버지를 불렀다.
“할아버지.”
“응?”
“가난하다고 하셨는데 이건 어떻게 만들었어요?”
<영원>을 보여드리며 물으니 고개를 끄덕이신다.
“후원자를 만났다고 들었단다. 작품 활동을 계속할 수 있게 도와주는 사람이야.”
예전이야 왕가나 귀족에게 기대어 활동하는 예술가가 많았지만, 지금도 그런 관계가 있을 줄은 몰랐다.
역시 완전히 독립하는 일은 쉽지 않나.
“돈 주는 거예요?”
차시현이 물었다.
“쉽게 말하면 그렇지. 팬으로서 일방적으로 돕기도 하고, 재능 있는 사람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대신 작품으로 돌려받기도 해.”
“매달 주는 거예요?”
“방식이 워낙 다양해서. 후원자랑 예술가의 수만큼 많을 거야.”
과거와 달리 완전히 예속된 관계가 아니라는 점이 그나마 위안이다.
“미술관이나 갤러리도 마찬가지야. 입장료로는 감당하기 힘든 점은 광고나 스폰서를 통해 충당하는 곳이 대부분이야.”
“나쁘게만 볼 필요는 없단다. 그들 덕에 미술 시장이 유지되는 면도 없지 않아 있으니.”
미술 작품에 투자하는 사람이 없으면 이마저도 유지될 수 없었을 거라는 말씀이다.
할아버지는 언제나 어느 한쪽에 치우쳐 생각하지 않으신다.
“그래도 신기해요. 아무리 돈이 많아도 무명 작가에게 이렇게 많은 돈 못 줄 것 같은데.”
차시현의 말에 백 번 공감한다.
후원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데미안 카터에게 확신을 가졌으니 그 큰돈을 투자했을 터.
적어도 그에게는 데미안 카터의 진심이 전해진 거다.
* * *
데미안 카터는 본인에게 붙은 수많은 수식어 중에서도 가장 비싼 남자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다.
5,000만 파운드에 낙찰된 <영원>을 시작으로, 데미안 카터는 2020년, <백 년과 죽음>을 1억 1,500달러에 판매하기에 이르렀다.
가난하여 끼니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했던 그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럴수록 그는 겸양하여 이미지를 쌓아나갔다.
거만을 경계하고 술과 도박, 약 등 자신을 망칠 수 있는 것들을 멀리하였다.
여성을 만나는 일조차 꺼렸다.
오직 어떤 작품을 만들지 구상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낸 작품의 가치를 높이는 일에 노련했다.
아르누보 공모전에 출품한 <이별>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퇴한다고?”
데미안 카터의 후원자 제이 조플링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천만 명 이상이 주목하는 아르누보 공모전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상황을 걷어차겠다는 말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겨우 100만 유로나 먹자고 이런 일을 벌인 줄 알았는데, 역시 나의 데미안이야.”
제이 조플링이 두 팔을 벌려 그를 안으려 했다.
데미안 카터는 피식 웃으며 제이 조플링의 등을 툭툭 다독였다.
“오늘 발표하는 게 좋겠어.”
“마지막까지 기다리는 게 좋지 않을까? 아니면 시상식 무대에서 하는 건 어때.”
“지나치면 오히려 독이야. 홍보는 충분히 했으니 접을 줄도 알아야지.”
“완벽해.”
제이 조플링이 경의를 담아 손뼉을 쳤다.
공모전 투표에서 1위를 하고 있으니 <이별>의 작품성과 인기는 충분히 증명된 셈.
여기서 대회 참가 자격을 포기하고 물러선다면, 공정성을 주장하는 이들에게도 좋은 이미지를 남길 테고.
무엇보다 <이별>을 SNBA에게 넘기지 않아도 되었다.
100만 유로를 받고 프랑스 국립 예술 협회에 <이별>을 넘기는 것보다는 수집가에게 직접 판매하는 쪽이 더 큰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참가한 아르누보 공모전에서 1위 한 작품이니 사려는 사람은 넘쳐날 터였다.
“마르소와 SNBA가 정말 좋은 자리를 마련해 주었어. 한 번밖에 못 써먹을 일이라는 게 아쉽구만.”
“기회는 언제나 있어. 그걸 누가 먼저 찾아내느냐의 싸움이지.”
데미안 카터가 머리를 써야 한다는 의미로 본인 머리를 툭툭 건들었다.
제이 조플링이 고개를 저었다.
“난 가끔 너의 이런 모습에서 예술성을 느껴. 어때. 은퇴할 때 영화로 찍어 내보내는 게.”
“정신 나간 소리. 어떻게 쌓아 온 이미지인데 그걸 버려. 사려는 사람들이나 모아 봐.”
경매에 넘기면 경매장에 수수료를 내야 했고.
데미안 카터와 제이 조플링은 이를 줄이기 위해 후원 파티 등을 활용해 작품 구매자를 직접 모으고 있었다.
“그런 일은 걱정을 마.”
말을 마친 제이 조플링이 혀를 찼다.
어제 앙리 마르소와 연을 만들고자 마르소 갤러리의 미셸 플라티니 대표에게 연락했거늘 받아들여지지 않은 일이 떠올랐다.
“앙리 마르소가 한 번 정도는 사 줘야 하는데 말이야. 그래야 좀 더 말이 나올 테고.”
“그 친구는 자기만의 취향이 있으니 괜히 무리하지 마. 적당히 비싼 작품 사고 싶은 사람에게만 팔면 돼.”
데미안 카터가 거울을 보며 옷매무시를 단정히 했다.
“아, 그리고. 폐막식 이후 파티 때 고수열 경도 초대하자고. 손자도. 여러모로 도움이 많이 되는 사람들이니까.”
“그래야지.”
두 사람이 일어나 서로의 어깨를 툭 치고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