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199화
38. 그림 그리는 사람(7)
6일 차를 맞이한 아르누보 공모전은 취지와는 다른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작품 자체를 조명하고자 했던 프랑스 국립 예술 협회의 의도는 사그라지고.
아니쉬 푸어, 피테르 하멜, 루카스 뮐러, 샤라 휴즈, 프랜시스 베이컨, 데미안 카터 등 기존에 명성을 떨친 인물들이 상위권에 올라 있었다.
짧은 시간에 1,700여 점의 작품을 감상해야 하는 부담 탓에 유명 작가의 작품이라도 보고자 하는 경향이 그러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아르누보 공모전을 크게 성공시키고도 미셸 플라티니가 괴로워하는 이유였다.
“하.”
공모전 현황을 살피던 미셸이 한숨을 내쉬었다.
유명 작가 위주로 표가 쏠리는 현상은 어쩔 수 없었으나 누구의 선택도 받지 못한 작품이 있었다.
아르누보 공모전 기획자로서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다.
차라리 작품성이나 없었더라면 덜 괴로웠을 텐데, 인생이 걸린 공모전인 만큼 작품에서 간절함과 깊은 사색을 느낄 수 있었다.
‘뭘 놓쳤지.’
공모전 중간에 소외된 작품을 조명하는 이벤트라도 마련했어야 했나 싶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공모전이라는 특성상 형평성에 어긋나는 일이 될 수 있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났다.
“대표님, 잠깐 괜찮으세요?”
“응. 들어와.”
미셸이 숨을 고르고 답했다.
밝은 얼굴로 들어선 직원이 초대장을 그녀 앞에 두었다.
“저번에 말씀드렸던 제이 조플링 씨의 파티 초대장이에요.”
“오늘이었나?”
“네. 오늘이요.”
직원이 미소 지었다.
억만장자 제이 조플링은 미술계의 큰손으로 이번 아르누보 공모전의 성공을 일찍부터 예견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파티를 열어 SNBA를 후원하고 나선 것이었다.
그는 아르누보 공모전을 크게 성공시킨 주역 미셸 플라티니에게는 꼭 참석해 주길 요청했었다.
“계속 일만 하셨잖아요. 저녁에 약속도 있으니 오늘은 조금 일찍 퇴근하시는 게 어떠세요?”
“그러게.”
“혹시 어디 아프세요?”
미셸 플라티니의 뜨뜻미지근한 태도에 직원이 걱정스레 물었다.
그간 무리해 왔으니 어딘가 탈이 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아니야. 그래. 알았어.”
미셸이 작게 웃어 보이자 직원은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섰다.
마르소 갤러리의 대표는 문이 닫힌 걸 보고 나서야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지 않아도 해야 할 일이 태산처럼 쌓여 있었다.
시상식 날 앙리 마르소의 <미> 연작을 공개하는 절차 또한 철저히 준비하고 있었다.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한 상황에서 돈 많은 이들과 의미 없는 대화로 기운을 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공모전을 지속하기 위해서라도 자금 확보를 게을리할 순 없었다.
“더럽게 하기 싫네.”
미셸 플라티니가 진심을 내뱉는 순간 문이 열렸다.
“하지 마.”
직원이 아니라는 데 안도한 미셸 플라티니가 피식 웃었다.
“뭔 줄 알고 하지 말래.”
“뭐든.”
미셸이 고개를 저었다.
“훈이랑은 잘 말했어?”
“어.”
“집 구하려면 꽤 걸릴 텐데.”
“알아서 하겠지. 옷 챙겨 입어.”
미셸이 고개를 갸웃했다.
“심심해.”
“뭐래. 나 오늘 바빠. 약속도 있고.”
“나랑 드라이브하는 것보다 중요해?”
“어.”
앙리 마르소가 피식 웃었다.
미셸의 말이 제법 재밌었다.
“농담 아니야. 제이 조플링한테 초대받았어.”
“그 늙은이가 왜.”
“SNBA 후원 파티. 연락 안 받았어?”
앙리 마르소가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고 보니 아르센이 능글맞은 영감탱이가 파티에 초대했다고 알렸던 것 같았다.
“가지 마.”
“가야 한다니까?”
“가지 마.”
미셸 플라티니가 펜을 들어 앙리를 가리켰다.
“그 사람이 SNBA에 한두 푼 주는 줄 알아?”
“네가 거길 가든 안 가든 그 변태 늙은이 지갑에는 아무 영향 없어.”
앙리 마르소가 옷걸이에서 미셸의 외투를 집었다.
제이 조플링이 아르누보 공모전을 후원하고 나선 것은 그것이 성공하리란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SNBA와 미셸 플라티니의 능력을 보고 투자한 것이지, 그들이 비위를 맞춰주기 때문은 아니었다.
가망성이 없는 일에는 발등에 키스해도 지갑을 열 사람이 아니었다.
“하기 싫은 일 하지 마.”
앙리 마르소가 미셸에게 외투를 던졌다.
“모든 사람이 너처럼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면 착각이야. 어떻게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아?”
“넌 그래도 돼.”
앙리 마르소가 문을 열었다.
“5분 뒤에 내려와.”
평소와 같이 대책 없이 들이대는 모습에 미셸이 작게 웃었다.
최근 무리하는 모습을 보인 탓에 어떻게 해서든 쉬게 해주려는 의도가 보였다.
평범하게 위로할 줄 모르는 그가 귀엽기도 고맙기도 했다.
미셸이 펜을 들어, 아르누보 공모전를 잘 마무리하고자 자리를 비우게 되었다는 내용을 적었다.
마지막까지 공모전 활성화에 힘쓰겠다는 말을 덧붙인 그녀가 인터폰을 눌렀다.
-네, 대표님.
“응. 잠깐 들어올래?”
-네.
곧장 비서실 직원이 대표실로 들어섰다.
“조플링 후원 파티에 보낼 꽃 좀 알아봐 줘. 이 엽서랑 같이 보내주고.”
“네.”
“지금 나갈 건데. 다른 일은?”
“특이사항은 없습니다. 아, 오전에 지시하신 내용도 라바니에게 전달했습니다. 정말 좋아하던데요?”
아르누보 공모전을 구경하고 싶어 하는 비다 라바니에게 내일 하루 휴가를 주라던 일이었다.
“다행이네. 그럼 내일 봐.”
미셸이 외투를 두르곤 밖으로 나섰다.
* * *
6일 차 오후.
아르누보 공모전에 작은 변화가 찾아왔다.
유명 작가들의 작품에 표가 쏠리는 경향 속에서 일부 평론가와 유명인이 무명 작가 혹은 작가가 알려지지 않은 작품을 조명하고 나선 것이었다.
방태호가 친분이 있는 이들에게 아르누보 공모전의 취지를 호소한 덕이었다.
그동안 고훈이 어떤 작품을 출품했는지 조심스럽게 접근하던 이들도 공모전이 막바지에 이르자 점차 조급해져 있었다.
그들은 <미>가 고훈의 작품이 아니라는 근거를 조심스레 제시하기도 하며, 아직 작가가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을 건들기 시작했다.
익명 참가로 시작한 공모전의 취지를 돌이켜보고자 하는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때마침.
한 외신 기자의 사설이 유럽 미술계에 큰 반향을 가져다주었다.
[우리가 놓친 것들]
지난달 30일에 개막한 아르누보 공모전이 이제 이틀을 남겨두고 있다.
예술계의 새 물길을 트고자 열린 아르누보 공모전은 하루 5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찾으며 큰 관심을 얻고 있다.
데미안 카터의 <이별>, 아니쉬 푸어의 <죽음에 관하여> 등 대가의 작품은 공모전 초반부터 꾸준히 표를 얻어내 현재 각각 2위, 4위 자리를 확고히 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피테르 하멜, 루카스 뮐러, 샤라 휴즈, 프랜시스 베이컨의 경우도 상위 10위 안에 들어 명성을 이어나가고 있다.
각종 미디어는 아르누보 공모전과 관련한 이야기로 가득하니, 프랑스 국립 예술 협회가 도전에 성공했다고 판단하는 것도 시기상조는 아니리라.
다만 축배를 들기 전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지 자문하고자 한다.
아르누보 공모전 공식 애플리케이션에 따르면 1,789점의 작품 중 발견된 작품은 총 1,789점이다.
많은 작품을 보이고자 했던 아르누보 공모전 큐레이터들의 노력이 성과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4일 22시 기준 상위 서른 작품이 총투표수 3,255,127표의 97%에 해당하는 3,157,473표를 차지하고 있다.
일부가 고훈의 작품으로 추정하는 <미>와 작가가 알려지지 않은 <여름 너울> 그리고 신인 작가 블랑쉬 파브르의 <가장 아름다운>을 제외하면 모두 기성 작가의 작품이다.
특히나 유명 작가의 작품으로 알려진 출품작은 금세 많은 표를 얻어, 일부 작가는 자신이 어떤 작품을 냈는지 SNS 등지에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
몇몇 언론은 이미 세계 최대 규모의 공모전의 입상작이 확정된 것처럼 말하고 있다.
이것이 과연 옳은 길일까.
처음 작가명을 감추고 작품을 온전히 바라보겠다는 주최 측의 의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다만 아직 희망은 있다.
프랑스 국립 예술 협회가 추산한 방문객은 현재까지 1,172만 명(가상 전시회 방문객 포함).
한 사람당 열 작품에 투표할 수 있으니 수치상으로는 최대 113,944,873표가 남아 있다.1)
미술을 사랑하는 이들이 어떤 작품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아르누보 공모전이 진정 새로운 예술 세계의 시발점이 될 것이다.
-이인호(대한일보)
이인호 기자의 사설은 유럽 예술계를 향한 도전이었다.
유명 작가에게 표가 쏠리는 이유를 그들의 명성 덕으로 설명하는 태도가 대가들의 예술성을 부정하는 것 같았다.
유럽 언론은 즉시 이인호 기자의 사설을 비난하고 나섰다.
그가 예술에 관해 무지하고, 시민들의 투표를 무시했으며 아르누보 공모전에 참가한 거장들을 욕보였다고 맹공격하였다.
“어쩌자고 그런 글을 썼어요!”
김지우가 이인호를 다그쳤다.
“하하. 예상은 했는데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네요.”
“당연히 싫어하죠! 다들 몰라서 안 썼겠어요?”
“지우 씨는 문제라고 생각 안 하세요?”
“하죠! 저도 잘못됐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그렇게 표현하면 안 되죠. 예술계가 넓어 보여도 엄청 좁아요. 이렇게 무작정 들이박았다간 아무것도 안 남는다고요.”
“그런가 봐요. 편집장님도 짐 싸 들고 돌아오라 하시더라고요.”
김지우가 눈과 입을 크게 벌렸다.
“하핫.”
“지금 웃음이 나와요?”
“그러게요.”
이인호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저들 말처럼 전 이쪽에 관해서 아무것도 몰라요. 그런데, 아르누보 공모전 참가한 사람들은 알아요.”
“네?”
“잘 나가는 작품들이야 저보다 잘 아는 분이 워낙 많으니까. 조명받지 못한 작품을 다루려고 했거든요.”
“…….”
“한 표도 얻지 못한 작품은 왜 그럴까 싶어서 며칠 관찰했는데. 종일 그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김지우가 눈썹을 좁혔다.
“3일째 되는 날에 물어봤죠. 좋아하는 것 같은데 투표하진 않느냐고. 그랬더니 자기 거래요.”
이인호 기자가 고개를 저었다.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는데. 후우. 바보 같은 질문이었어요.”
“……뭐라고 했는데요?”
“실제로 다녀간 사람이 2~300만 명이나 되는데 그중에 한 사람이라도 자기 작품을 좋아해 주지 않겠냐고. 그 사람 표정이라도 보고 싶대요.”
“…….”
“아직은 없는 것 같다고 웃더라고요.”
이인호가 아르누보 공모전 애플리케이션을 실행했다.
단 한 표를 얻은 그림을 보였다.
장 미셸 바스키아의 영향을 받은 듯, 선명한 색상을 활용했고 텍스트와 이미지를 복합적으로 구성한 인물화였다.
작가는 제프리 라이트.
김지우도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
“제가 보기엔 멋진데 말이죠.”
* * *
1)혼란을 피하고자 부연합니다.
모든 방문객이 투표에 참여하지 않고, 모든 투표자가 최대 열 작품에 투표하지 않기에 이인호 기자가 언급한 ‘최대 113,944,873표가 남아 있다’는 어디까지나 최대치입니다.
또한 1,172만 명이란 수치 또한 단순히 애플리케이션을 다운로드한 수치라 과장되어 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