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198화
38. 그림 그리는 사람(6)
“진짜, 진짜 대단했어요!”
돌아와 할아버지와 방태호에게 앙리 마르소가 준비하고 있는 ‘개벽’을 알렸다.
흥분한 차시현이 손짓과 발짓 다 써가며 설명했다.
“틸트 캔버스를 실제로 구현하다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지?”
방태호가 중얼거렸다.
미술계에 오래 종사했던 만큼 틸트 캔버스에 대해선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다만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젓는 걸 보니 나와 차시현, 파브르가 놀란 만큼 그에게도 믿기지 않는 일인 듯싶다.
“완성되진 않았대요. 그래서 지금은 마르소의 작업실에서만 어느 정도 가능하고.”
“흠.”
“여기서 살면서 피드백 달래요. 개발진에게 필요한 기능 같은 걸 알려주면 반영한다고.”
할아버지는 고민에 잠기셨다.
그동안 내가 미술을 하기에 더 좋은 환경을 찾아오셨고 파리 또한 후보지였다.
기억을 잃었을 때는 내가 좀 더 안정적인 환경에서 적응하길 기다리셨지만, 기억을 되찾았으니 큰 문제는 없을 거다.
“성급히 결정할 일은 아닌 것 같아.”
할아버지 대신 방태호가 입을 열었다. 고개를 돌리니 생각을 풀어낸다.
“정말 대단한 일이긴 하지만 미술 시장에 먹힐지에 대해선 확실치 않아.”
“왜요?”
차시현이 물었다.
“수입을 올리는 방식은 여럿이야. 그중에 판매 대금은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체온만으로도 녹는다며?”
“네.”
“온도 말고도 보관 방법에 제약이 따를 거야. 수집가가 까다로운 보관 방식을 감수하고서라도 그 작품을 살 만큼 매력을 느낄까?”
큰 규모의 미술관이 아니라면 확실히 부담스러울 수 있다.
‘개벽’으로 그린 물체가 아니라도 작품은 넘쳐나니까.
소장할 이유는 지금까지 없던 방식이라는 점과 앙리 마르소의 작품이라는 사실뿐.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더라도 다른 작가의 작품도 가치를 얻을 수 있을까?
‘개벽’을 활용한 다른 작가의 작품은 큰 가치가 없을 수 있다.
‘개벽’을 사용한 작품이라면 앙리 마르소의 것이 있으니 ‘지금까지 없던 방식’이란 강점이 사라진다.
혁신이나 새로움은 없고 ‘캔버스’와 달라질 것이 없는데, 보관이 힘든 그것을 굳이 사야 할 이유가 없어지는 거다.
앙리 마르소의 ‘개벽’만이 가치 있을 가능성이 높다.
“나는 과학 지식은 없으니까 잘 모르지만 실제로 가능한 일인가 싶기도 하고. 아직 개발 단계에 있다며?”
처음에는 마르소가 명명한 대로 개벽이 일어날 거라 생각했는데, 방태호의 말을 듣고 보니 고려할 일이 많다.
“휘트니 비엔날레랑 아르누보 공모전 효과를 봤을 때 지금은 신기술보단 네 이미지를 확고히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
앙리 마르소라면 어떻게든 해낼 것 같지만, 방태호는 그것만 바라보고 그와 함께하는 건 위험하다고 판단한 듯하다.
그의 말대로 내 화풍이 보다 확고했다면 아르누보 공모전 진행 양상이 달라질 수 있었을 거다.
“TV가 처음 나왔을 때 다들 바보상자라고 했단다.”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종일 TV 앞에 앉아 있기만 하니까 TV에 익숙하지 않았던 어른들은 아이들이 바보가 될까 봐 걱정했지.”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아직은 모르겠다.
“그런데 10년, 20년이 흐르니까 다들 TV에 출연하고 싶어 하더구나. TV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도 생겼고 그렇게 자기 꿈을 이룬 사람이 많아졌어.”
“네.”
“컴퓨터가 나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단다. 지금은 그런 사람이 많이 줄었지만, 처음 나왔을 땐 단순한 문서도 컴퓨터로 만드는 걸 꺼렸단다.”
“편하잖아요.”
“그렇지. 편리한 기술이 나왔는데, 그걸 받아들이지 못한 거야. 예전처럼 수기로 보고하면 알아보기 쉬운데 왜 어려운 엑셀 같은 걸 쓰냐는 사람도 있었단다. 하지만 지금 봐라. 대학에서도 엑셀이 없으면 일이 안 돼.”
방태호와 나, 차시현 모두 할아버지 이야기에 집중했다.
“게임도 마찬가지란다. 게임을 하면 사람이 폭력적으로 변한다, 뇌세포가 죽는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도리어 뇌 발달에 도움이 된다더라.”
할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조금 알 것 같다.
“프로게이머도 이제는 완전히 직업으로 자리 잡지 않았느냐. 할아버지는 잘 모르지만 게임을 분석하고 게임팀을 관리하는 전문가도 있다며. 그걸로 꿈을 찾고 삶을 영위한다면 그걸 나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네.”
“새로운 기술이나 문화는 언제나 반대에 부딪힌단다. 그것이 없던 세상에 익숙한 사람들 눈에는 정말 해괴한 일처럼 보이지. 훈이 증조할아버지에게 TV가 그랬고, 할아버지에겐 스마트폰이 그랬던 것처럼.”
할아버지가 스마트폰을 꺼내 보였다.
“그런데 결국엔 증조할아버지도 죽기 전엔 TV만 보셨고, 할아버지도 이렇게 스마트폰 쓰고 있지. 알고 나면 그렇게 편리한 것도 없는데, 모르니까 거부하게 되는 거야. 그렇게 세대 갈등이 생기고.”
“…….”
“할아버지는 훈이가 그걸 활용해서 그림을 그리고 싶으면 얼마든지 그래도 된다고 생각해. 또 모르지. 지금은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10년 뒤에는 당연한 일처럼 될지.”
“네.”
“그렇게 되면 누구보다도 빨리 적응한 네게 아주 작은 좋은 일이라도 생기지 않을까 싶구나.”
할아버지가 이렇게 열린 생각을 할 수 있는 건 아마 아버지와의 일 때문일 것이다.
아주 작은 바람으로.
아들이 자신과 같은 길을 걷길 바라는 소망이 잘못 발현되어 다투었던 그 날 이후 두 분은 결국 더는 만날 수 없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알고 계실까.
아버지가 비록 할아버지가 바라던 한국화를 하진 않았지만, 할아버지의 작업 방식을 그대로 따르셨던 것을.
그 사실을 알든 모르든 할아버지는 분명 아들과 그렇게 싸웠던 자신을 탓하고 계시다.
“훈이 생각은 어때?”
할아버지가 물으셨다.
“재밌어요.”
“음.”
“사실 그렇게 거창하게 생각하진 않았어요. 제가 보기엔 피카소 그림이나 개벽이나 똑같거든요.”
둘 다 지금껏 상상하지 못했던, 생각지 않았던 부분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같다.
로트렉이나 클림트, 피카소처럼 ‘개벽’ 역시 영감을 주는 새로운 것일 뿐이다.
할아버지가 씩 웃었다.
“살 집은 천천히 알아보자꾸나. 아니면 엄마 아빠랑 살던 집을 빼서 거기서 살아도 되고.”
“네.”
* * *
“어땠어?”
“…….”
“왜. 재미없었어?”
한편.
블랑쉬 파브르는 앙리 마르소가 보여준 새로운 기술에 큰 충격을 받고 고민에 빠졌다.
그와의 만남을 고대했던 만큼 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 같았는데, 막상 그를 눈앞에 두니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어 준비했던 말을 하나도 꺼낼 수 없었다.
더욱이 프로젝트 ‘개벽’을 경험하고 난 이후로는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
오랜 시간 따돌림당했던 블랑쉬는 독선적이며 외골수인 주제에 만인에게 사랑받는 그가 부러웠다.
그와 같이 될 수 없다면, 그에게만이라도 인정받고 싶었다.
한시도 낭비하지 않았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노력했다고 자부했다.
평단이 주목하고, 언론을 타고 여러 공모전에서 상을 타면서 조금씩 그에게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 몇몇 일로 어쩌면 앙리 마르소를 따라잡는 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싹텄다.
앵테르미탕 제도 개혁과 ‘개벽’은 그가 평범한 예술가가 아님을 알리고 있었다.
그는 본인이 천명한 대로 시대를 대표하고 새로운 세상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가 처음, 파리역 역사를 자화상으로 가득 채웠을 때만 해도 평단과 대중은 그를 미친놈 취급했다.
하나 지금은 프랑스 예술계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근미래 안에 회화의 역사를 다시금 쓸 예정이었다.
오늘도 그는 고훈하고만 대화를 나눴다.
처음 몇 번 눈을 마주하긴 했으나 그의 시선에서는 어떠한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여러 대가가 모인 아르누보 공모전에서 선전하는 것으로는 그의 시야에도 들 수 없음을 깨달았다.
블랑쉬 파브르가 주먹을 쥐었다.
분했다.
그토록 오래 준비했으면서 그 앞에서 말도 제대로 못 하고, 그의 관심거리조차 안 된다는 현실이 참을 수 없이 괴로웠다.
“아빠.”
“응?”
“나 열심히 할 거야.”
블랑쉬 파브르가 입을 꾹 다물어 울음을 참았다.
부친 레옹 파브르는 마음 여린 딸을 보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
“정말 열심히 할 거야.”
상처 입기 싫어서 더욱 가시를 세우는 딸이 안타깝기도 하고 그래서 더 응원하고 싶었다.
“지금도 잘하고 있어.”
레옹 파브르는 딸을 꼭 안아주고 싶었지만, 자존심 강한 딸이 위로받기 싫어함을 알기에 미소 지었다.
“고훈은 어땠어?”
화제를 돌리자 블랑쉬 파브르가 눈물을 닦고 말했다.
잠긴 목소리를 애써 풀어냈다.
“귀여워.”
“귀여워?”
“나비 이야기했는데 애벌레가 어떻게 나비가 되는지 잘 알았어.”
“평소에도 관심이 있었나 보네.”
“응. 나중에 도감 바꿔 보기로 했어.”
“도감도 썼대?”
블랑쉬 파브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옹 파브르는 딸이 속상한 일을 겪은 와중에 취미가 같은 친구를 사귄 듯해 그나마 다행으로 여겼다.
“그럼 언제 보기로 했어?”
그는 오늘도 길을 잃은 블랑쉬를 데리고 다녀준 고훈과 김지우란 기자에게 작은 보답이라도 하고 싶었다.
블랑쉬가 눈을 깜빡였다.
“약속 안 했어?”
“응.”
“나중에 물어보면 되겠네.”
“연락처 몰라.”
“핸드폰 번호 안 물어봤어?”
“개인정보잖아.”
“…….”
레옹 파브르는 말없이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 *
“마르소를 만났다고?”
-네.
“언제? 나 돌아가고 나서?”
-바로 연락 왔었어요.
“뭐, 뭐 했는데?”
-피자 먹었어요.
“……맛있었겠네.”
-네. 그리고 마르소가 새로 준비한 것도 봤어요. 기자님도 보셨어야 했는데.
“어? 뭘 준비했는데?”
-비밀이래요. 저 드라마 보던 중이라 끊을게요. 나중에 이야기해요.
“자, 잠깐만. 힌트만 주면 안 될까?”
-안 돼요. 비밀이라고 했어요.
“조금이면 되는데. 응? 훈아, 훈아!”
다급히 외쳤지만 통화가 끊긴 소리만 매정히 울릴 뿐이었다.
“아아아악아앙.”
김지우가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바둥댔다.
블랑쉬 파브르와 함께 있던 그녀는 고훈이 <여름 너울>의 주인공임을 알고 난 뒤로 급히 기사를 작성했다.
피에르 말로가 고훈에게 액자를 만들어 주었단 사실과 현재까지 피에르 말로의 액자를 받은 작품이 <여름 너울>과 <미>뿐이라는 사실로 어느 정도 감은 잡고 있었지만.
피에르 말로가 액자를 만들어 준 사람이 두 사람뿐이라는 것도 명확히 밝혀진 일은 아니었기에 상황을 지켜보던 그녀로서는 더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현재 미술계에서 가장 뜨거운 두 사람.
앙리 마르소와 고훈.
두 작가는 작가명이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최상위권을 다투고 있었으며, 현재까지는 피에르 말로에게 인정받은 유이한 작품이었다.
이 이야기를 알고도 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왜 하필 그때 마르소 저택에 간 거냐고!”
문제는 급히 자리를 옮기고 나서 고훈과 블랑쉬가 앙리 마르소 저택에 초대받았던 것.
시대를 대표하는 거장과 미래를 상징하는 어린 작가의 만남을 놓친 것이 너무나 후회되었다.
절망한 김지우는 한참을 늘어져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앙리 마르소가 새로 준비하는 일이 무엇인지 너무나 신경 쓰였지만 쓰던 원고는 마무리해야 했다.
아르누보 공모전도 이제 이틀 남았을 뿐.
폐막식에 맞추려면 서둘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