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197화
38. 그림 그리는 사람(5)
앙리 마르소가 조잘대는 두 꼬맹이를 응시했다.
차시현은 움찔했고 블랑쉬 파브르는 당장에라도 달려들 듯이 노려보았다.
그러나 이내 앙리 마르소의 관심을 얻진 못했고, 그는 고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미술관이 완공되면 전혀 다른 세상이 열릴 거야.”
포테이토 피자를 입 안 가득 채우고 있던 고훈이 눈을 깜빡였다.
“기술적 문제 때문에 당장은 여기서밖에 못 해.”
고훈이 음식을 급히 씹어 삼키곤 물었다.
“그런데요?”
“그러니까 파리에 있으라고.”
고훈이 고민하다가 우선 한 입 더 먹었다.
앙리 마르소가 말하는 전혀 다른 세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으니, 파리에 있으라는 권유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앙리 마르소는 인내심을 가지고 고훈이 식사를 다 하길 기다렸다.
그 어떤 예술가도 거부할 수 없는 일이라고 확신했기에, 준비해 온 결과물을 보이면 고훈도 어쩔 수 없으리라 예상했다.
그는 고훈이 피자 조각을 일곱 개째 먹고 마지막 한 조각을 들 즈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현아, 그거 더 안 먹어?”
“그만 먹어!”
기다리던 앙리 마르소가 버럭 소리쳤다.
한 판을 다 먹은 것만으로도 과식이거늘 설마 더 먹으려 할 줄은 몰랐다.
고훈에게 조금이라도 빨리 ‘결과’를 보여주고 싶었던 그는 무척 안달이 나 있었다.
“두 조각만 더.”
“굶었어? 굶어도 그렇겐 안 먹어!”
“그럼 한 조각만.”
“배 터져! 세상 어떤 꼬맹이가 너처럼 먹어?”
고훈이 고개를 돌렸다.
블랑쉬 파브르 몫으로 나온 피자도 온데간데없었다.
앙리 마르소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가져가.”
두 조각을 먹은 차시현만이 더는 못 먹겠다는 얼굴로 말했다.
앙리 마르소는 턱을 괴고 친구 몫에서 한 조각씩 덜어내 식사를 이어가는 두 꼬맹이를 관찰했다.
‘사람인가?’
어쩌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잠시나마 했다.
얼마 후.
“잘 먹었습니다.”
고훈과 블랑쉬 파브르가 입 주변을 닦아냈다.
앙리 마르소는 결국 준비한 음식을 모조리 해치운 두 꼬맹이를 사람이 아니라고 결론 지었다.
“따라 와.”
앙리 마르소가 일어났다.
식사를 만족스럽게 마친 고훈은 기분이 좋게 그를 따랐고 차시현과 블랑쉬 파브르도 함께하려 했다.
“두 분은 여기서 기다려 주세요.”
직원이 차시현과 블랑쉬를 가로막았다.
고훈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같이 가면 안 돼요?”
앙리 마르소가 뒤돌았다.
“혼자 와.”
“뭔데 그래요?”
“말했잖아.”
전혀 다른 세상이 될 거라는 ‘무엇’을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나도 보고 싶어.”
블랑쉬 파브르가 나섰다.
반마르소파임을 주장하는 그녀로서는 앙리 마르소가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 알아야만 했다.
그러나 앙리 마르소는 거절조차 하지 않았다.
그에게 차시현과 블랑쉬 파브르는 고훈이 데려온 꼬맹이일 뿐이었다.
“뭐 그리 대단하다고 꽁꽁 싸매고 있어요. 같이 보면 어떻다고.”
“대단한 일이니까. 공개하기 전에 외부로 발설되면 안 돼.”
“그럼 난 왜 보여줘요.”
“시끄러워.”
“같이 봐요. 비밀 지킬 거지?”
고훈이 고개를 돌려 묻자 차시현과 블랑쉬 파브르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앙리 마르소가 눈살을 찌푸리더니 직원에게 손짓했다.
직원이 두 아이에게 다가가 촬영이나 녹음 등이 가능한 기기가 있는지 확인했다.
“대체 뭔데 이렇게까지 해요?”
“보면 알아.”
앙리 마르소는 작업실로 향했다.
앙리 마르소의 아틀리에에 들어선 블랑쉬 파블로는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기둥 하나 없는 광활한 공간 한쪽 면이 스케치로 가득했고, 곳곳에 작업 중인 작품이 놓여 있었다.
구석에는 조각 난 대리석이 쌓여 있어 평소 앙리 마르소의 작업량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앙리 마르소가 안쪽 문 앞에 다가가 손바닥을 댔다.
지문과 혈관을 인식한 잠금장치가 문을 열었고, 고훈과 차시현, 블랑쉬 파블로는 고개를 갸웃했다.
작업실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들이 들어선 방은 여러 전자 기기로 가득하여 일종의 연구실처럼 보였다.
앙리 마르소가 세 아이에게 VR(virtual reality) 헤드셋과 핸드 컨트롤러를 나눠 주었다.
“써.”
고훈과 블랑쉬 파블로가 고개를 갸웃하자 차시현이 나섰다.
“이렇게 쓰는 거야.”
“이게 뭔데?”
“VR.”
“VR?”
“게임할 때 쓰는 거. 영화도 보잖아.”
고훈과 블랑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예술 이외의 활동에 크게 관심이 없던 터라 게임과 영화 등에 널리 사용되는 VR 기기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
차시현의 도움으로 세 사람 모두 VR 헤드셋을 착용하자 앙리 마르소가 기기를 가동했다.
곧 어두웠던 시야에 빛이 들었다.
“움직여 봐.”
고훈과 블랑쉬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때, 차시현이 핸드 컨트롤러를 움직였다.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붓 자국이 났다.
고훈과 블랑쉬 파브르가 깜짝 놀라 입을 벌렸다.
“어떻게 했어?”
“이거 버튼 누르고 휘두르니까 됐어. 색도 바꿀 수 있나 봐.”
“어떻게?”
고훈이 차시현의 설명을 듣고 핸드 컨트롤러를 조작했다.
방아쇠 같은 버튼을 당기니 색상을 고를 수 있는 창이 눈앞에 펼쳐졌다.
“붓 모양도 바꿀 수 있어.”
블랑쉬 파브르는 붓의 굵기, 모양 등을 살폈다.
두 천재 화가는 우선 눈에 들어오는 붓 모양을 선택하고 팔을 휘둘렀다.
동시에 허공에 붓 자국이 남으며 그대로 고정되었다.
“2016년 고글이 개발한 틸트 캔버스야.”1)
앙리 마르소가 설명을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훈과 차시현, 블랑쉬 파브르는 손을 움직이는 대로 그림이 그대로 구현되는 상황을 즐겼다.
고훈은 노란색 물감을 선택해 허공에 해바라기 꽃잎을 그렸다가 붓을 더 깊이 넣는 것으로 입체 표현이 가능함을 깨달아 기뻐했다.
“이거 뒤에도 그려야 해.”
캔버스 위에 그리던 기존 방식으로 그리면 옆면과 뒤, 상하는 전혀 표현되지 않았다.
그림을 볼 수 있는 시야가 전방위였기에, 그려야 하는 면적이 넓어졌으며 동시에 도저히 표현할 수 없었던 일도 그려낼 수 있었다.
“정말.”
차시현은 고훈에게 붓을 툭툭 찍어 나뭇잎을 표현하는 방식이 통하지 않음을 알고, 좌우, 상하, 앞뒤 여러 방향에서 시도했고.
블랑쉬 파브르는 질감을 표현할 수 있는 기능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앙리 마르소는 헤드셋을 착용한 채 허우적대는 아이들을 지켜보다가 이내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의류나 산업 디자인 쪽에서는 이걸 토대로 현실에서 작업해 나가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상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이야.”
고전적인 방식으로 이뤄지는 미술 시장에서 파일을 판매할 순 없었다.
전시 용도로는 충분히 활용할 수 있지만 얼마든지 똑같은 파일을 복사할 수 있는 틸트 작품은 수집가들에게 매력적인 상품이 아니었다.
평면으로부터의 해방이 가능하나, 동시에 비현실에 묶여버린 기술.
앙리 마르소는 그것에 만족할 수 없었다.
“이건 내가 그린 자화상이다.”
앙리 마르소가 세 아이에게 ‘틸트’로 그린 자화상을 보여주었다.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앙리 마르소에 아이들이 깜짝 놀랐다.
완벽하진 않았지만 마치 앙리 마르소가 가상현실에 들어온 것처럼 현실적이었다.
“이거였어요?”
고훈이 물었다.
이러한 기술이라면 감추고 싶은 마음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2021년에 오픈소스화되었어. 지금은 누구나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지.”
앙리 마르소는 오픈소스가 안 되었다면 기술을 사들였을 거라 덧붙였다.
“그런데 왜 감춰요?”
“이게 끝이 아니니까.”
앙리 마르소가 VR 헤드셋을 벗으라고 했다.
“이건 앞으로 내가 뭘 할지 보여주기 위한 거야. 비켜 봐.”
새로운 경험으로 가슴이 벅차오른 아이들이 후다닥 자리를 비켜주었다.
앙리 마르소가 눈짓했다.
직원 두 사람이 구석에 놓인 무엇인가를 작업실 가운데로 옮겼다. 흰 천으로 덮인 그것은 높이가 2m가 넘었다.
“벗겨.”
직원들이 천을 벗겨내자 고훈과 차시현, 블랑쉬 파브르의 눈이 거의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조금 전 가상현실 기기로 봤던 앙리 마르소의 자화상이 실제 눈앞에 나타난 탓이었다.
받침대 위에 또 한 명의 앙리 마르소가 서 있는 기이한 광경에, 고훈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흥.”
“어떻게 했어요?”
고훈이 앙리 마르소의 옷을 붙잡고 흔들었다.
“틸트 캔버스로 그린 걸 그대로 출력해냈지.”
“3D 프린터?”
차시현의 말에 앙리 마르소가 눈살을 찌푸렸다.
“평범한 3D 프린터가 아니야. 색상, 질감 모든 걸 표현할 수 있어.”
고훈과 블랑쉬가 앙리 마르소의 자화상에 다가갔다.
자화상이라고 해야 할지, 자각상이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그것에는 <앙리 마르소 001>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그가 직접 조각하고 채색한 <마르소의 보석>만큼 사실적이진 않았지만, 회화적 기법이 그대로 표현된 <앙리 마르소 001>에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고훈은 그가 ‘전혀 다른 세상이 올 거다’라고 말했던 걸 떠올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가져 와.”
앙리 마르소가 또 한 번 직원들에게 무엇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또 뭐가 있어요?”
놀란 고훈이 물었다.
“지금은 여기까지지만 미술관 개관에 맞춰 준비하고 있는 게 있어.”
직원이 하와이안 블루 색상의 액체가 든 유리 상자를 가지고 왔다.
앙리 마르소가 붓에 액체를 묻혀 아크릴판에 발랐다.
그리고 잠시 후.
아크릴 판을 떼어내자 물감이 발렸던 상태 그대로 고정되어 있었다.
앙리 마르소는 그것을 손으로 집어 들어 고훈에게 보였다.
체온으로 하와이안 블루 물감이 녹아내렸다.
“개선할 점은 남아 있지만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무너뜨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
고훈은 앙리 마르소가 보여준 놀라운 광경에 가슴이 뛰었다.
붓을 건네받아 새로운 물감을 묻혀 아크릴 판에 발랐다.
물감을 덧발라 질감과 양감을 표현하길 즐겼던 고훈에겐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더 이상 회화는 캔버스 위에 한정되지 않아. 네 손으로 해바라기를 꽃 피울 수 있어. 원한다면 해바라기밭이든 밀밭이든.”
“…….”
“파리로 와라.”
앙리가 본심을 꺼냈다.
언젠가는 그리는 행위가 곧 실체를 만드는 창조 행위가 가능해지길 바라여 시작한 프로젝트 ‘개벽’.
앙리 마르소는 고훈이 신소재를 활용해 개선점과 활용법을 찾아내길 바랐다.
자신이 열어둔 세상에서 어떤 작품을 만들어낼지 알고 싶었다.
20세기, 색과 형태로부터의 해방되었던 회화는 이제 다시 새로운 변혁을 맞이할 테고.
본인과 고훈처럼 새로운 것을 잘 소화하는 예술가가 그 중심에 설 거라 생각했다.
“좋아요.”
고훈이 답했다.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 * *
1)2016년, 구글은 HTC사의 가상현실 헤드셋 바이브(Vive)에서 구동하는 틸트 브러시(Tilt Brush)를 발표했다.
X, Y, Z축 3D 공간을 자유롭게 활용한 틸트 브러시는 현실에서는 표현이 불가능한 표현을 가능하게 하여 회화의 영역을 확장시켰다.
또한 질감을 표현할 수 있어 패션 디자인 산업에도 영향을 미쳤다.
구글은 틸트 브러시를 소개할 때 “당신의 방이 곧 캔버스이고, 당신의 팔레트가 곧 당신의 상상력”이란 문구를 사용했다.
출처: 서울TV, “구글이 공개한 가상현실 그림판 ‘틸트 브러시’, 2016.05.13, 김형우 기자.
관련 영상: Tilt Brush: Painting from a new perspect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