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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반 고흐-196화 (151/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196화

38. 그림 그리는 사람(4)

차시현이 고개를 젓는다.

할아버지 복귀전 때 앙리 마르소에게 겁을 먹어 울었던 일도 있었고 아무래도 꺼리는 것 같다.

할아버지도 저녁식사 이후에 TV 출연이 예정되어 있어서 왕복하는 데 두 시간이나 걸리는 마르소네 집에 들르는 건 무리지 싶다.

“내일 봐요. 선약도 있으니까.”

-피자 있어.

“여기서도 먹을 수 있어요.”

이 인간은 내가 피자만 주면 환장하는 줄 아는 모양이다.

-설명해.

-고훈 군, 아르센입니다.

“안녕하세요.”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몰라도 지금 마르소를 찾아가진 않을 거다.

-영국 저지섬에서 재배한 저지 로열 감자를 듬뿍 올린 포테이토 피자를 준비해 두겠습니다.

저지 로열이라니.

감자 품종 이름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고상하다.

-저지 로열 감자는 분질과 점질이 균형을 이룬 품종입니다. 포슬포슬하면서 쫀득한 식감을 느낄 수 있죠.

“잠시만요.”

-또한 레이몬드 조리장이 만든 베이컨은 진한 육향과 감칠맛을 자랑합니다. 이베리코 베요타 돼지를 재래식 방법으로 훈연했죠.

“그러니까.”

-치즈는 최소 세 가지 이상으로 준비하겠습니다. 엄격한 기준을 통과한 캄파니아 모짜렐라 치즈와 스위스 아펜첼러 치즈는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겁니다.

“…….”

-거기에 마담 셰리가 특별히 만든 마요네즈를 두르겠죠.

“생루이 다리 앞이에요.”

-40분 뒤에 도착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자 할아버지가 고개를 저으신다.

“어쩔 수 없었어요.”

“가려고?”

프랑스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차시현이 물었다.

“응.”

“왜애. 가지 말자.”

“갈 수밖에 없어.”

“뭐라고 했는데?”

“포슬포슬하면서도 쫀득한 감자랑 아펜첼러 치즈, 셰리가 만든 마요네즈를 두른대.”

차시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피자 얘기야?”

“베이컨도 직접 만든 거래.”

입을 쭉 내민다.

“난 안 갈래. 그 아저씨 싫어.”

“문제 있어?”

블랑쉬 파브르가 끼어들었다.

“얘가 안 간다고 해서.”

“왜?”

중간에서 말을 전해주기 번거로워서 영어로 대화하라고 하니 직접 묻는다.

“마르소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아.”

“난 그 아저씨 싫어.”

“너도 싫어?”

블랑쉬 파브르가 눈을 빛낸다.

“그럼 가서 혼내줘야지.”

동료를 찾은 덕분일까.

주먹을 쥐고 얼굴을 내미는 걸 보아 신난 것 같다.

“어떻게?”

“자화상만 그려대는 좁은 정신세계를 비판하고 남을 무시하는 어린 마음을 지적해야 해.”

저 아이를 데려가도 될까.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마르소에게 저런 말을 했다간 일이 곱게 끝날 리 없다.

“난 싸우는 거 싫은데.”

“도망치면 안 돼.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

“굳이 싸우러 갈 필요는 없잖아.”

“앙리 마르소를 만날 기회는 없다니까?”

“그래도 난 그렇게까지 말할 생각 없어. 상처받을 거야.”

“그 정도 말로 상처받는 사람 아니야.”

“누나가 어떻게 알아.”1)

“수만 명이 욕해도 꿈쩍도 안 했어. 80억 명이 비난해도 자기가 옳다고 말하는 사람이야.”

앙리 마르소를 싫어하는 것치고는 그를 잘 아는 것 같기도 하다.

“훈아, 할아버지는 못 갈 것 같은데. 괜찮겠어?”

“괜찮아요. 돌아올 때도 아르센이 데려다줄 거예요.”

“너무 늦게까지 놀진 말고. 내일도 일정이 있으니까.”

“네. 할아버지 저녁은요?”

“근방에서 먹으면 돼.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할아버지가 못 가면 태호 아저씨라도 갈 거니까.”

“그럴게요.”

집주인이 이상하긴 해도 파리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할아버지도 그간 마르소에 대한 생각을 많이 바꾸신 덕에 고개를 끄덕이셨다.

“아빠. 지금 마르소 저택으로 갈 거야. 그렇게 됐으니까 안 와도 돼. 괜찮아. 안 물어.”

“…….”

블랑쉬 파브르가 부친에게 전화를 걸었다.

평소 무슨 짓을 하고 다녔으면 깨물지 말라고 할까.

내 생각엔 쟤도 마르소 못지않게 대책 없는 성격이다.

“합.”

아르센을 기다리며 먹은 베르티옹 젤라또 아이스크림은 추위 속에서도 맛있었다.

* * *

“작가님, 고훈 군 도착했습니다.”

“들어오라 해.”

시건방진 꼬맹이가 드디어 자신을 알아보았다는 기쁨에 만찬을 준비한 앙리 마르소가 미간을 찡그렸다.

회장에 들어선 고훈 뒤에 두 꼬맹이가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어디서 자꾸 데려오는 거야?’

한 녀석은 한국에서 건방진 소릴 한 녀석이었고, 다른 녀석은 처음 보았다.

데려오라고는 했지만 꼬맹이들이 증식하니, 고훈과 차분히 대화하고 싶었던 그로서는 언짢기 그지없었다.

“봐. 무섭잖아.”

“…….”

차시현과 블랑쉬 파브르는 앙리 마르소의 고압적인 태도에 고훈 뒤에 숨었다.

전투 의지를 불태우던 블랑쉬 파브르가 예상 밖으로 얌전하게 굴어 고훈은 안도했다.

“피자는요?”

고훈이 안내받은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앙리 마르소가 눈짓했다.

“뭐 했어.”

“구경하고 다녔죠.”

“개표 결과는.”

“오다가 봤어요. 데미안 카터가 올라갔던데요?”

“그런데 구경하고 다닐 여유를 부려? 정신이 있어, 없어?”

“그럼 어떻게 할까요. 팻말이라도 들고 다녀요?”

“무슨 짓이든 해야 할 거 아니야. 동물 박제 따위한테 밀릴 작정이야?”

“그렇게 잘 알면 마르소가 좀 도와줘 봐요.”

고훈과 앙리가 정답게 담소를 나누던 차에 차시현과 블랑쉬가 속삭이며 대화했다.

“둘이 뭐라고 하는 거야?”

“보자마자 시비 걸고 있어. 둘이 친한 거 맞아?”

“그렇다고 하는데 잘 모르겠어.”

“저런 대화를 하는데 친할 리 없어. 피자부터 찾냐고 화내잖아.”

“난 저 아저씨 무서워.”

“난 싫어.”

“응.”

“잘생겼다.”

“……?”

곧 마르소 저택의 조리장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포테이토 피자가 아이들과 마르소 앞에 놓였다.

고훈이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피자를 살폈다.

‘좋아.’

피자는 샹들리에의 빛을 받아 영롱하게 빛났다.

녹은 치즈 위로 황금빛 감자가 자태를 뽐내고 있었으며, 그 위에는 겉을 바삭하게 익힌 베이컨이 두툼하게 누워 있었다.

크리스피한 겉면 아래에는 지방이 녹아 생긴 육즙이 가득할 터였다.

무엇보다 피자 바깥 원을 따라 뿌린 셰리 가도의 특제 마요네즈는 마이야르 반응이 충분히 일어나 옅은 갈색을 띠고 있었다.

고훈은 군침을 삼키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감자와 치즈, 돼지고기, 마요네즈 그리고 숙성된 반죽으로 구운 빵이 한데 어우러진 향기는 풍요롭기 그지없었다.

고훈이 피자를 한 조각 들어 올렸다.

“합.”

뜨거울 열기와 함께 입안을 찾은 포테이토 피자의 열렬한 사랑에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눈과 코로 서로를 충분히 느꼈으니, 이제는 입술과 혀로 사랑할 뿐이었다.

앙리 마르소는 황홀해하는 고훈을 보며 입꼬리를 들었다.

“공모전 끝나고 어쩔 거야.”

쾌락의 한계에 이르렀던 고훈이 정신을 차렸다.

“10등 안에 들면 좀 더 있고 아니면 돌아가야죠.”

“말이 되는 소릴 해. 2등은 해야 할 거 아니야.”

“1등 하라고는 안 하네요.”

1위 자리는 본인 것이라고 말하려던 앙리 마르소가 차시현과 블랑쉬 파브르를 의식했다.

고훈이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시현이는 저번에 봤죠?”

“관심 없어.”

“쟤는 블랑쉬 파브르. 파브르, 마르소. 인사해요.”

블랑쉬 파브르가 피자를 썰던 자세 그대로 고개만 들어 앙리 마르소를 노려보았다.

마르소는 백금발의 꼬맹이에게도 관심이 없었다.

눈을 마주하곤 얼마 안 되어 고훈에게 묻고 싶던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언제까지 왔다 갔다 할 거야?”

“왜요?”

“모른 척하지 마.”

고훈이 피자를 크게 베어 먹곤 생각을 정리했다.

확실히 대한민국보다 유럽, 북미 시장이 크고 활동하기 용이했다.

특히나 언어‧문화적으로 적응 기간이 필요 없는 고훈에게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러지 않아도 할아버지가 알아보시고 있어요.”

“그래? 어디로.”

앙리 마르소가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버뱅크?”

앙리 마르소는 태연히 피자나 먹는 고훈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캘리포니아?”

“네.”

“거긴 왜!”

“예전에 살던 집 있으니까요. 영화 작업하기에도 좋고.”

“고작 그딴 이유로 거기서 산다고?”

“왜 또 성질이에요. 후보로 생각해 둔 거예요.”

“또 어딘데.”

“뉴몰든.”

고훈이 런던을 언급하자 앙리 마르소의 관자놀이에 핏대가 섰다.

예술의 수도, 자신이 거주 중인 파리를 두고 버뱅크와 런던을 언급하고 있으니 답답했다.

“집은 파리에도 있잖아! 고블랭구 토마스 만 거리 12-14번지는 어디다 팔아먹었어?”

고훈이 눈을 깜빡였다.

“마르소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뭐?”

“고블랭구에 있는 집을 어떻게 아냐고요.”

고훈의 과거가 의심스러워서 뒷조사를 했다고 말할 순 없었다.

앙리 마르소가 머리를 굴렸다.

“거기.”

“거기?”

“사려고 했더니 네 명의로 되어 있던데.”

“사려고 했다고요?”

거짓말이라곤 지지리도 못 하는 앙리 마르소를 대신하여 아르센이 나섰다.

“신도시 개발 이후 줄곧 부동산 가치가 오르는 곳입니다. 그곳 이외에도 몇 군데 매수 중에 있습니다.”

고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팔 거예요. 세입자도 있고.”

“필요 없어!”

앙리 마르소가 심통이 나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왜 저렇게 화내?”

“집 안 판다고. 정말 저질이야. 저렇게 화내면 멋있는 줄 아나 봐.”

“난 저 아저씨가 화내는 이유를 모르겠어.”

“멋있으면 단 줄 아는 거야.”

“……?”

한편 블랑쉬 파브르와 차시현은 열심히 앞담화를 나누었다.

* * *

1)차시현은 ‘you’라고 지칭했지만 ‘너’보다는 ‘누나’라는 뜻을 의도하였기에 위와 같이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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