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195화 (150/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195화

38. 그림 그리는 사람(3)

몇몇 평론가에게 연락한 방태호는 내일이 승부처라고 판단했다.

아르누보 공모전이 개막하고 나흘간 평론가들은 무척 신중한 자세로 임했다.

데미안 카터와 같이 자신을 명확히 드러낸 작가는 부담 없이 평했지만, 고훈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다양한 소재를 활용해 온 고훈이 어떤 작품을 그렸는지 예측하기란 쉽지 않았고.

혹시나 예상이 빗나갔을 경우 돌아올 후폭풍이 두려운 탓이었다.

그러나 아주 작은 단서가 언론을 통해 풀린 상황에서, 아르누보 공모전도 마무리 단계에 들어서고 있었다.

방태호는 출발선에 내몰린 이들이 뛸 수밖에 없도록 신호총 방아쇠를 당긴 것이었다.

‘오늘 머리 좀 싸매겠지.’

오늘 밤, 깊이 고민한 그들은 결국 <미>가 고훈이 그린 것이 아님을 증명해낼 터였다.

<여름 너울>을 알아보는 사람이 나오는지가 남은 문제였다.

‘훈이를 이해하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방태호는 작년부터 관심을 받아온 고훈을 진정으로 깊이 이해하는 사람이 있길 바랐다.

고훈이 화가로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대중적 인기도 중요했지만, 그를 완전히 이해하는 전문가도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지금까지와 너무나 다른 화풍 때문에 쉬운 일은 아닐 터.

‘분명 있을 거야.’

그러나 방태호는 확신했다.

<해바라기>, <손님>, <서리 밀밭>, <가면>, <총탄> 그리고 <여름 너울>까지.

고훈의 그림은 마음을 동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어린 천재’, ‘고수열의 손자’, ‘앙리 마르소가 사랑하는 화가’가 아니라 온전히 고훈을 바라보는 사람이 반드시 있을 거라 믿었다.

방태호가 아르누보 공모전 투표 현황을 확인했다.

총투표수는 200만을 조금 넘어서고 있었다.

‘기회는 있어.’

개인당 열 작품만 투표할 수 있기에 사람들은 되도록 많은 작품을 즐기고 투표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투표한 수보다 남은 표가 훨씬 많은 상황.

<여름 너울>이 <미>를 제칠 기회는 분명히 남아 있었다.

‘공개하면 좋았을 텐데.’

만약 고훈이 처음부터 작품을 밝혔더라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많은 표를 얻었을 터.

방태호는 그것이 차마 아쉬웠다.

다만 경쟁작인 <미> 역시 앙리 마르소의 위명이 닿진 않았다. 적어도 <여름 너울>과 같은 조건이었다.

도리어 앙리 마르소가 입장을 드러냈다면, 현재 앵테르미탕 관련한 일로 치솟은 그의 명성에 다른 작가들이 짓눌릴 수 있었다.

‘아니야. 차라리 다행이지.’

방태호가 눈썹을 좁혔다.

여태 2위를 유지하던 <여름 너울>이 거장 데미안 카터의 <이별>에게 처음으로 표를 역전당해 있었다.

* * *

나흘간 시테섬을 구석구석 돌아다닌 블랑쉬 파브르는 고훈의 작품을 찾을 수 없었다.

휘트니 비엔날레에서 봤던 <해바라기>, <손님>, <서리 밀밭>, <가면>은 제각각 다른 재료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서리 밀밭>까지는 교집합이 분명했기에 알아볼 수 있었지만.

스스로 ‘어린 반 고흐’이길 거부한 <가면> 이후 고훈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알 수 없는 블랑쉬로서는 답을 구할 수 없었다.

고훈이라면 분명 득표수도 많을 것으로 예상한 그녀는 상위 작품을 다시금 둘러보았고.

여전히 고훈이 어떤 작품을 출품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곧 그 궁금증도 풀 수 있었다.

블랑쉬는 자신보다 먼저 앙리 마르소를 변화시킨 화가가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담을 생각이었다.

고훈이 걸음을 멈췄다.

“여긴.”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

아르누보 공모전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품이 걸린 장소였다.

‘설마.’

운영 시간이 거의 다 되었기에 갤러리 내부는 비교적 한산했다.

“거짓말.”

고훈이 <여름 너울> 앞에 서자 블랑쉬 파브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여름 너울>은 이번 공모전에서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었다.

아침마다 한 번씩 들러 착시 효과로 일렁이는 파도 속에서 느껴지는 아련함을 눈과 가슴에 담았었다.

누가 그렸는지 알 수 없어 시상식을 기다리던 <여름 너울>을 고훈이 그렸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쉬이.”

차시현이 입술에 검지를 댔다.

블랑쉬가 놀라 친구가 감추려는 바를 내뱉을 것 같아 걱정되었다.

그 뜻을 이해한 블랑쉬가 하려던 말을 삼키고 다시금 <여름 너울>을 보았다.

“…….”

블랑쉬가 놀란 이유는 앙리 마르소와 다르지 않았다.

착시 효과를 보이는 구성과 애틋한 감성을 전하는 <여름 너울>은 그 자체로 매력적이었다.

‘이상해.’

또한 여태 고훈이 보여준 여러 작품과는 궤를 달리했다.

고훈은 19세기 역사 속 화가처럼 실제로 있는 것에 의미를 부여한 그림을 그려 왔었다.

블랑쉬는 고훈이 조부 고수열에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고수열은 사물의 형태와 색을 최대한 유지하되 그 안에 담긴 의미를 끄집어낸 화가였다.

덕분에 고수열의 작품들은 주제 전달에 명확했고, 강렬한 인상을 주었으며 동시에 해석의 다양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었다.

그런 조부를 두었으니, 고훈도 <해바라기>나 <서리 밀밭>처럼 서정성을 완벽히 드러낸 탈인상주의와 표현주의적 그림을 그려 온 거라 생각했다.

때문에 <여름 너울>을 그렸으리라곤 조금도 생각할 수 없었다.

‘……아.’

<여름 너울>을 다시금 천천히 바라본 블랑쉬 파브르는 이내 그 생각이 선입견이었음을 깨달았다.

고훈이 그렸다는 걸 듣고 나니, 물감을 두껍게 발라 붓 자국을 진하게 남긴 임파스토 기법이 눈에 들어왔다.

고훈이 즐겨 쓰는 방식이었다.

원근법을 무시하고도 사실적인 느낌을 주는 점은 <서리 밀밭>에서도 보인 바 있었고.

너울진 바다가 주는 애절함은 <해바라기>나 <서리 밀밭>에서 받았던 감정과 유사했다.

알고 나니 이렇게 닮은 점이 많았다.

‘왜 몰랐지.’

보여주는 방식의 차이 때문이었다.

<여름 너울>은 그리움을 형상화한 것 같았다.

사물에 감정을 담는 것이 아닌, 감정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너울진 바다를 표현한 것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어?’

블랑쉬는 고훈의 화풍이 크게 달라진 이유가 어리기 때문만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여러 환경에 노출된 어린 화가는 좋아하는 작품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 탓에 때때로 자신을 잃는 경우가 많은데, 고훈은 분명 자신만의 색을 잃지 않고 있었다.

블랑쉬 파브르는 고훈이 단순한 천재가 아님을 깨달았다.

하늘이 물려준 재능과 교육만으로는 이렇게 작품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다.

우연히 몇 번 번뜩이는 발상으로 좋은 작품을 만들 순 있지만, 그것이 계속될 순 없었다.

“짐 워런에게 도움을 받았어.”

고훈이 말했다.

“가면은?”

“루초 폰타나란 작가가 있더라고.”

“……해바라기도?”

“조속.”

“조속?”

“조선 시대 때 화가야.”

의문을 풀기 위해 던진 질문에 고훈은 막힘없이 답했다.

다른 작가의 특징을 잡아내어 완전히 본인 것으로 소화해냈으니 블랑쉬는 고훈이 앞으로 또 어떤 작품을 그려낼지 상상할 수 없었다.

“이런 생각 안 해봤어.”

생각을 정리한 블랑쉬가 입을 열었다.

“뭘?”

“따라 하는 거. 나쁜 거라고 생각했어.”

“따라 한 것 같아?”

블랑쉬가 고개를 저었다.

표절이 아니었다.

상대방을 깊이 이해하고 자신을 말할 때 새로이 활용하는 일은 대화였다.

블랑쉬 파브르는 짐 워런과 루초 폰타나, 조속이 고훈의 작품을 보면 무척 기뻐할 거라 믿었다.

천재라고만 생각했던 고훈이 어떤 방식으로 그림을 그려왔는지 이해한 블랑쉬 파브르는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대단한 앙리 마르소가 왜 다른 예술가보다 고훈에게 집착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도 고훈에게 영향을 주고 싶지 않을까.

자신을 무척 사랑하는 나르시시스트가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는 사람을 찾는 건 당연한 일.

앙리 마르소가 고훈에게 경쟁의식을 느끼는 이유는 어쩌면, 자신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고개를 돌렸다.

눈앞에 너울진 바다가 다시금 찾아왔다.

블랑쉬 파브르는 <여름 너울>을 보며 고훈과 앙리 마르소의 관계를 가슴 깊이 새겼다.

“멋있다.”

서로에게 큰 영향을 주는 두 화가의 관계가 부러웠다.

* * *

한편.

마르소 저택에 고용된 사람들은 종일 캔버스 앞에 앉아 있는 마르소를 의아히 관찰하고 있었다.

작업에 들어가면 이틀이고 사흘이고 집중하는 일이야 대수롭지도 않았으나, 오늘은 달랐다.

붓도 연필도 끌도 쥐지 않고 넋이 나간 사람처럼 뭔가 중얼거릴 뿐이었다.

“작가님 왜 저러셔?”

“모르겠어요. 뭐라고 하시긴 하던데.”

“아니라고?”

“네. 뭐가 아니라는 건지.”

“작품 구상하시는 거겠죠.”

“식사 안 하셔도 되나?”

“일하실 때 말 걸면 화내시잖아요.”

“그럼 샌드위치 좀 만들어서 곁에 둬야겠네.”

앙리 마르소가 갑자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직원들이 깜짝 놀라 흠칫했다.

“아르센! 아르센!”

앙리 마르소가 평소보다 큰 목소리로 비서를 찾았다.

의아한 행동을 보이던 차에 걱정하던 아르센이 곧장 다가갔다.

“네, 작가님.”

“주방장에게 준비하라고 해.”

종일 끼니를 걸렀던 앙리 마르소가 몹시 시장할 것으로 판단한 아르센이 고개를 숙였다.

“식사 준비하라고 전하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포테이토 피자로.”

“예?”

앙리 마르소가 눈썹을 좁혔다.

“못 들었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포테이토 피자.”

“지금…… 말씀이십니까?”

“기다려. 전화.”

앙리 마르소가 손을 내밀었다.

아르센이 넘긴 스마트폰을 받아들곤 고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가고 고훈이 전화를 받았다.

-왜요?

“어디야.”

-노트르담 대성당 뒤요.

“거긴 왜.”

-베르티옹 알아요? 거기서 파는 아이스크림 먹으면서 일몰 보는 게 관광 코스래요.

“버려.”

-뭘요?

“아이스크림 버리고 차 보낼 테니 이쪽으로 와.”

-……뭔 소리야.

“저녁을 먹어야지 이 시간에 아이스크림을 왜 먹어?”

-저녁 약속 있어요. 다음에 만나요.

“약속?”

-파브르란 애랑 먹기로 했어요.

-누구?

-마르소.

-마르소?

전화기 너머로 바꿔달라는 말 소리가 시끄럽게 들렸다.

“시끄럽고 차 보낼 테니 와.”

-얘랑 먹기로 했다니까요?

“그럼 걔도 데려와.”

-싫어요.

-갈 거야.

-아버지 오시면 같이 밥 먹자며.

-앙리 마르소 만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어.

파브르가 누군지는 몰라도 기특한 소리를 하기에 앙리 마르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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