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194화 (149/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194화

38. 그림 그리는 사람(2)

앙리 마르소를 이기는 일은 내게 아무 의미 없다.

단지 그가 내게 실망하지 않길 바란다.

나쁜 모습을 보이기 싫고 좋은 기억을 남기고 싶은 마음이니, 이긴다거나 넘어선다기보다는 지고 싶지 않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리라.

아니.

함께하고 싶다는 말이 좀 더 가까울 것 같다.

<마르소의 보석>, <그림자> 그리고 이번의 <미>와 같이 마르소를 이해하고.

또 그가 나를 알아주는 과정은 퍽 즐거우리라.

돌이켜보면 블랑쉬의 말이 완전히 틀리진 않다.

<총탄> 이후 마르소와 많은 대화를 나눴으니 그도 나도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는 앙리 마르소의 선명함을 동경해 왔다.

신에게 축복받은 손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뛰어난 기술은 물론이고, 그가 자신을 곧게 세우고 명확히 표현하는 점이나.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자세 모두 좋아한다.

저번 일로 그도 나와 같은 마음을 가져왔음을 확인했다.

서로에게 영향받지 않을 리 없다.

이 아이, 블랑쉬 파브르도 아마 나와 비슷한 마음이지 않을까.

앙리 마르소를 이긴다는 어린 말과 달리, 그 말을 하는 목소리와 올곧은 눈빛은 진지하다.

단순한 경쟁심리 같지는 않다.

이유는 알 수 없어도 앙리 마르소란 불세출의 예술가와 눈높이를 맞추고 싶은 마음만은 순수해 보인다.

언젠가는 자신의 마음을 정확히 판단할 수 있을 테니, 지금 굳이 확인하지 말자.

“그래. 응원할게.”

행운이 깃들길 바라며 웃어 보였다.

“응원하면 안 되지.”

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를 틀었다.

“반마르소파 회원은 누구나 최전선에서 싸워야 해.”

“……반마르소파?”

“마르소를 반대하는 모임.”

“그런 거 든 적 없는데.”

“지금부터 해.”

예술하는 사람 중에 제정신인 경우를 많이 보진 못했지만, 참 독특한 성격이다.

“싸우는 거야? 어떻게 싸울 건데? 응? 둘이서 해? 언제부터?”

김지우가 스펀지빵이라도 된 양 질문을 쏟아냈다.

“안 싸워요.”

* * *

어쩌다 보니 블랑쉬 파브르의 안내를 받아, 노트르담 대성당 뒤쪽으로 오게 되었다.

10평 남짓한 작은 공간에 세 점이 걸려 있는데, 블랑쉬 파브르의 <가장 아름다운> 이외에 다른 작품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번데기에서 막 벗어나는 나비다.

배경은 없다.

누구도 알아봐 주지 않는 긴 시간, 애벌레는 자신을 갈고닦는다.

기관과 조직이 완전히 바뀌는 고통에도, 누군가에게 잡아먹힐까 봐 비명 한번 내지 못하고 고요히 때를 기다린다.

준비를 모두 마친 뒤에는 자신을 감싸고 있는 번데기를 가르고 벗어나야만 한다.

구속을 벗어던지지 못하면 애벌레는 그대로 죽고 만다.

알에서 벗어났듯이.

나비가 되기까지 꽃봉오리 안에서, 낙엽 뒤에서 몸을 감추며 몇 번의 탈피를 거쳤듯이.

죽음을 각오하고 자신을 변화시켜야 날개를 얻을 수 있다.

번데기에서 완전히 벗어나면 지금은 말려 있는 저 날개가 활짝 펴질 터.

분명 아름다울 것이다.

“…….”

블랑쉬 파브르가 주목받는 이유가 있었다.

보통 노력으로는 번데기에서 벗어나는 나비의 모습을 이렇게 생동감 넘치게 표현할 수 없다.

아주 오랜 시간 공을 들여야만 나비가 되고 싶은 애벌레의 간절함을 균열과 날개에 담아낼 수 있다.

“예쁘다.”

차시현도 감탄했다.

“야생에서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경우는 드물어.”

블랑쉬 파브르가 말했다.

알에서 태어난 애벌레는 기어 다녀야 하고, 몇 번의 탈피와 번데기 과정 동안 천적들에게 무방비로 노출된다.

새뿐만 아니라, 번데기 안에 알을 낳는 기생벌에게 걸리기라도 하면, 기생벌 새끼에게 몸이 파먹히고 만다.

애벌레를 도와주는 건 아무것도 없다.

“나비는 예쁘지만 모두 살아남은 것만 볼 수 있어서 그래. 가지에 걸린 채 죽은 애벌레는 못 보니까.”

블랑쉬의 말이 차시현에게는 아직 어려운 모양이다.

그러나 이 녀석도 알아야 한다.

나비가 되고 싶은 수많은 애벌레가 많은 이유로 꿈을 박탈당하는 것을.

화가란 존재도 애벌레와 다르지 않으니까.

이제 고작 15살 먹은 아이가 이토록 심각하게 고민할 문제다.

재능이 있어도.

노력해도.

환경이 받쳐주어도 생각지 못한 변수와 알 수 없는 요인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이 분명 있다.

장엄한 날갯짓을 보이지도, 사랑을 이어주지도, 결실을 보이기는커녕 나비조차 될 수 없는 이들의 한은 어디로 흘러갈까.

내로라하는 사람이 모두 모인 아르누보 공모전조차 표가 갈리고 있다.

심지어 한 표도 얻지 못한 작품이 여섯 점이나 있다.

“근데 날개가 잘 안 보여. 펼친 게 더 예쁠 텐데.”

차시현이 화제를 돌렸다.

나비의 외형적 아름다움을 잘 보이려면 시현이가 말한 대로 그려야 하겠지만, 블랑쉬가 하고 싶은 말은 다를 것이다.

“나비가 아름다운 이유는 색이나 무늬가 예뻐서가 아니라고 말하는 거야.”

고개를 돌려 확인하니, 파브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이 아이는 번데기에서 벗어나려는 나비에 자신을 투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오면서 차시현에게 슬쩍 들으니 이런저런 일을 많이 겪은 듯한데, 나비를 통해 용기를 얻은 모양.

녀석의 눈빛처럼 강인한 의지가 느껴지는 멋진 그림이다.

“응원하고 싶어지는구나.”

할아버지도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셨다.

김지우는 어떻게 봤을까 궁금하여 시선을 옮기니, 요란스러운 평소와 달리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내 블랑쉬를 껴안고 고개를 흔든다.

“어떡하니. 진짜. 될 수 있어. 될 수 있고말고. 이 언니가 장담할게.”

깊이 감동한 김지우가 유난을 떠는데도 블랑쉬는 크게 감흥이 없다.

큰 표정 변화 없이 호응하지도 거부하지도 않는다.

“이제 너도 보여줘.”

이런 작품을 보고 나만 숨기고 있을 순 없다.

“그래. 가자.”

* * *

한편.

호텔에 남은 방태호는 물감 제조업체 쉬민케와 평소 교류를 나누던 독일 신문사 디 벨트, 런던 타임즈, 프랑스 언론사 르 몽드 등에 도움을 청했다.

<미>가 고훈의 작품이 아닌 점과 고훈의 특징을 힌트로 한 단서를 흘리기 위함이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화풍이고. 쉬민케 물감을 사용했다?

“네.”

-그리고……. 미도 그리지 않았다?

“정확합니다.”

전화기 너머로 입맛을 다시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쓰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이 정도로 화제가 생기겠어요?

“평론하시는 분들께서 훈이 작품 찾으려고 안달 나 있지 않습니까. 작은 단서라도 필요하겠죠.”

아르누보 공모전은 미술계 전문가들에게도 큰 과제를 부여했다.

평론가들은 개막일부터 유명 작가의 작품을 찾아내느라 애썼고, 자신이 누구의 작품을 찾았음을 알림으로써 인지도를 다져나갔다.

덕분에 득표 상위 작품 대부분은 작가가 밝혀졌는데.

현재 단독 1위를 달리는 <미>를 누가 그렸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었다.

알렉스 등 몇몇 인플루언서의 발언으로 많은 이가 <미>의 작가로 고훈을 꼽았고 유사한 점도 분명 인정하나,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이는 적었다.

<미>를 고훈의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묘사력이 믿을 수 없는 수준으로 향상되어 있었고.

특유의 애절한 감성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야 그렇지만 기존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말로는 너무 광범위하잖아요. 어떻습니까.

기자의 말에 방태호가 혀로 입천장을 훑으며 고민했다.

-고훈에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니잖습니까. 올해 추세라면 어떤 작품인지만 밝혀져도 상위 입상은 거저먹게 될 텐데.

기자는 고훈이 어떤 작품을 출품했는지 묻고 있었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고훈에게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올해 <서리 밀밭>과 <가면>으로 미술계를 발칵 뒤집은 고훈은 이미 유명 작가의 반열에 올라 있었다.

특히나 고수열의 손자이자 고해성, 이수진의 아들이라는 가족력, 어린 나이에 비극을 겪은 점, 앙리 마르소와의 일화 등으로 언제나 화제의 중심에 서 있었다.

지금도 고훈이 무슨 작품을 가져 나왔는지 알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시테섬과 가상 전시관을 방황하고 있었다.

고훈이 <여름 너울>을 그렸다는 사실만 확실시되면 득표에도 긍정적일 터.

방태호는 작품명을 밝히지 않고도 지금껏 2위 자리를 유지했으니, 적당한 시기에 알려 1위를 노릴 만하다고 생각했다.

‘아니지.’

그러나 고훈이 바라지 않는 일을 강요할 순 없었다.

어리기는 해도 나름대로 기준과 목표를 두고 행동하는 아이였다.

“하하. 제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거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방태호와 고훈의 관계를 잘 아는 기자는 그가 완곡히 거절하고자 핑계를 댄다고 판단했다.

“대신이라고 하면 뭐 하지만 폐막식 이후에 자리 따로 마련해 모시겠습니다. 그때 훈이랑 천천히 이야기 나누시는 건 어떠십니까.”

-따로?

“따로.”

고훈이 무엇을 출품했는지도 중요하고 고훈과의 단독 인터뷰 기회도 놓칠 수 없었다.

방태호가 사실상 밝히길 거부한 상황에서 기자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었다.

-뭐.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지요.

“감사합니다.”

-약속은 지키셔야 합니다.

“여부가 있나요. 모레 연락드리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방태호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점심부터 전화만 돌렸을 뿐인데 벌써 창밖이 어둑어둑했다.

‘지금쯤 슬슬 올라오고 있을 텐데.’

방태호가 스마트폰을 펼쳐 가장 먼저 연락했던 언론사를 찾았다.

아니나 다를까.

<미>를 그린 사람이 고훈이 아니라는 내용의 기사가 올라와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언론에서 원문을 복사하다시피 하여 게시한 기사들이 몇 분씩 간격을 두고 있었다.

30분 전에 통화했던 르 몽드에서는 제법 이름 있는 전문가가 쉬민케 물감의 특징을 설명하며, 현재 알려진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했다.

‘이름만 빌린 거겠지.’

고작 30분 만에 사람을 섭외하여 기사를 쓸 순 없으니, 평소 거래 관계에 있는 평론가에게 이름만 얻어 쓴 것이 분명했다.

‘그럼 밑 작업은 끝났으니. 슬슬.’

방태호가 또 한 번 전화를 들었다.

연결음이 몇 번 이어지고 걸걸한 목소리가 반갑게 울렸다.

-태호 아닌가!

“하하. 형님. 잘 지내시죠?”

-아, 그럼. 물론이지. 저번에 보내준 커피 잘 마셨어. 고마워. 고마워.

“그럼요. 그게 얼마나 귀한 건데.”

-끌끌. 그래. 다음에 베를린 오면 섭섭하지 않게 할 테니까. 아, 그래서 언제 보나?

“조만간 뵈어야죠. 아니, 그런데 형님. 왜 아직도 훈이 이야기를 안 해주세요. 서운하게.”

-응?

“그렇잖아요. 형님이 훈이 작품 못 알아보실 리는 없고. 전 제가 뭐 서운하게 해드렸나 싶었죠.”

-아니. 그게 아니라.

“좀 봐주세요. 저 올해 막 시작했잖아요. 훈이도 올해 마무리 잘할 수 있게 소개 좀 잘해 주세요.”

-어. 그래야지. 어. 어. ……그. 오해하지 말고 들어 봐. 실은 내가 찾긴 했는데.

“아아, SNBA 연락이라 받아야겠어요. 형님, 죄송합니다. 또 연락드릴게요.”

오지도 않은 전화를 받는 척, 급히 통화를 마친 방태호는 또 다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실장님, 파리 와 계시다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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