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193화
38. 그림 그리는 사람(1)
김지우와 블랑쉬 파브르는 관광객으로 북적한 장소를 피해, 비교적 한적한 카페에 자리했다.
“정말 고마워요. 이렇게까지 걸을 줄은 몰랐는데.”
“괜찮아요.”
무뚝뚝한 대답이 돌아왔다.
김지우는 웃음으로 화답했다.
“뭐 마실래요?”
“따뜻한 우유요.”
김지우가 음료를 주문하고 찬찬히 블랑쉬 파브르를 살폈다.
푸른빛을 띤 눈망울은 유리처럼 매끈했으며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너무 귀엽잖아.’
조금도 긴장한 기색 없이 태연히 앉아 있었다.
김지우는 그녀가 영어에 능숙하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오면서도 이야기했지만 기사는 한국어랑 영어로 게시될 거예요. 연락처 주시면 링크도 보내드릴게요. 이런 말 하기 창피하지만 찾기 좀 힘들 거라. 아하하.”
“알아요.”
“음?”
“한번 만나고 싶었어요.”
“저를요?”
김지우가 눈을 깜빡였다.
프랑스의 예술가가 자신을 만나고 싶었다는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고훈 소개하는 글 읽었어요.”
“아.”
두 사람 사이에 음료가 놓였다.
블랑쉬 파브르는 테이블에 비치된 설탕 막대를 꺼내 뜯었다.
사르르 따뜻한 우유에 설탕이 녹아들었다.
“고훈이 예술계를 부흥시킬 거라고 했는데, 자세히 듣고 싶어서요.”
블랑쉬 파브르가 설탕이 든 막대를 하나 더 집었다.
그녀를 취재할 생각으로 자리를 마련했던 김지우는 잠시 고민했다.
“이미 증명된 일이라고 생각해요. 휘트니 비엔날레부터 아르누보 공모전까지. 훈이는 고작 1년 만에 정말 많은 일을 해냈어요. 훈이 작품이란 이유로 공모전 투표 경향이 바뀔 정도니까.”
블랑쉬 파브르가 두 번째 설탕을 넣었다.
“앙리 마르소랑 같은 생각이시네요.”
김지우가 고개를 갸웃하자 질문을 던졌다.
“인기가 많은 사람이 예술계를 선도하나요?”
블랑쉬 파브르의 말투는 다소 도전적이었다.
유리처럼 깨끗한 눈에서는 강인한 의지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린 화가가 던진 질문이 단순한 경쟁의식이 아님을 인지한 김지우는 화제에 진지하게 접근했다.
“여러 면에서 그렇다고 생각해요.”
“어떤 점에서요?”
“대중성은 시대를 반영해요. 그 시대가 가장 절실히 바라는 무엇인가를 투영한 작품이 사랑받죠.”
“그 시대에 인정받지 못한 작품은요?”
“인정받지 못한 작품이죠.”
“그러면 인정받지 못한 작품은 가치가 없나요?”
김지우는 자신을 바로 보는 올곧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아니요.”
블랑쉬 파브르는 김지우의 대답에 숨을 고르고 다시금 새 설탕 막대를 집었다.
‘단 걸 좋아하나 봐.’
김지우는 블랑쉬 파브르가 단 것을 좋아한다고 소개하자고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대중에게 인정받지 못해도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는 경우는 많죠. 뒤늦게 조명받는 경우도 있고. 빈센트 반 고흐처럼.”
블랑쉬 파브르가 말없이 설탕 막대를 권했다.
그녀 나름의 호의였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 반 고흐를 알아봐 준 사람이 있는 덕이었어요. 클림트나 이후 반 고흐를 사랑한 사람들처럼.”
“…….”
“예술성과 대중성은 분리해서 볼 수 없어요. 순수하게 예술을 추구해도 결국에는 알아보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없으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블랑쉬는 말없이 우유에 설탕을 풀었다.
“반대로 한 명에게라도 영향을 준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죠.”
김지우는 블랑쉬가 넘겨준 설탕을 커피에 풀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더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작품이 큰 흐름을 만드는 건 부정할 수 없어요. 그래서 전 훈이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어요.”
블랑쉬는 김지우가 명성이나 돈, 인기만을 추구하는 다른 바보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네 번째 설탕 막대를 뜯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은 앙리 마르소가 그렇죠.”
김지우도 같은 생각이었다.
최근 몇 년간 앙리 마르소만큼이나 예술계에 큰 파장을 일으킨 사람은 없었다.
“그에게 다른 화가나 조각가는 모두 장식이에요. 미만 봐도 그래요.”
질문할 틈을 못 잡고 있던 김지우가 눈을 빛냈다.
조금 전 블랑쉬가 <미>를 앙리 마르소의 작품이라고 했던 일을 떠올리며 질문했다.
“미를 앙리 마르소가 그렸다고 하셨는데.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런 그림 그 사람밖에 안 그려요.”
“어떻게요? 어떤 점이.”
“그냥 그럴 것 같아요.”
좀 더 구체적인 답변을 원했던 김지우는 다소 당황했다.
“확신하는 것 같은데. 이유가 있지 않아요?”
“앙리 마르소란 느낌을 받았어요.”
김지우는 좀 더 캐물으려다가 멈칫했다.
다른 외부적 요인을 배제하고 <미> 자체만을 놓고 보면 그럴듯한 기분이 들었다.
뭐라 형용할 수 없었지만, 숭고한 빛 아래 초인적인 인물이 내비치는 자기애와 자긍심이 앙리 마르소의 실루엣을 연상시키는 것 같기도 했다.
“전 그를 넘어설 거예요.”
블랑쉬의 갑작스러운 선언에 생각에 잠겼던 김지우가 고개를 들었다.
“네?”
“앙리 마르소 본인이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멋진 그림을 그릴 거예요.”
어린 화가의 도전 정신으로 여기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녀와 앞서 나눈 대화 내용을 고려하면 앙리 마르소를 대중적 인기로 넘어서겠다는 단순한 발상이라고 치부할 수 없었다.
블랑쉬는 설탕을 다섯 개나 넣은 다디단 우유를 마시기 시작했다.
* * *
‘블랑쉬 파브르.’
김지우가 그녀가 앉아 있던 빈자리를 보며 펜을 돌렸다.
직접 만난 그녀는 매체에 소개되었던 모습과 달랐다.
언론은 그녀의 인형 같은 외모를 조명하며 엉뚱한 성격을 매력적이라고 소개했지만, 김지우는 그녀에게서 예술을 향한 강인한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예술을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대하고 있었다.
‘따돌림당했다고?’
블랑쉬 파브르에 관련한 기사를 찾아보던 김지우가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부모가 언론과 인터뷰한 내용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외골수적인 성격 때문에 친구들과 어울리기 힘들었던 블랑쉬 파브르는 좋아하는 곤충을 수집하고 그리며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소개되어 있었다.
‘그렇게 보이진 않았는데.’
폐쇄적인 행동을 보이거나 주눅 들어 보이진 않았다.
다만 대다수에게 사랑받는 앙리 마르소에게 어떠한 경쟁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모든 이를 오시하는 앙리 마르소에게 자신 또한 가치가 있음을 증명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예쁘다.’
김지우는 블랑쉬 파브르의 작품을 살펴보았다.
다리가 여섯 개 이상인 생물을 혐오하던 김지우조차 블랑쉬의 작품은 아름답게 느껴졌다.
특히나 형용하기 힘든 오묘한 색감은 누구의, 어떤 작품에서도 찾을 수 없는 고유함이 있었다.
“말도 안 돼.”
그녀는 블랑쉬 파브르의 작품이 곤충을 여럿 붙여 만들었음을 알고 깜짝 놀랐다.
블랑쉬 파브르의 대표작 <친구>는 죽은 금자라남생이잎벌레(Golden Tortoise Beetle) 여럿을 캔버스에 붙여서, 하나의 큰 금자라남생이잎벌레를 형상화한 작품이었다.
직접 키운 잎벌레가 죽어 그 슬픔을 달래고 영원히 함께하길 바라며 만들었다고 설명되어 있었다.
‘다른 작품도 다 이렇게 만들었나?’
김지우는 블랑쉬 파브르의 다른 작품을 찾아보았다.
대부분 유화였고, <친구>와 같은 경우가 많지는 않았다.
블랑쉬가 친구를 많이, 자주 잃지 않음을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나 싶었다.
‘공모전 참가했었지.’
김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되도록 여러 작품을 찾고 특집호에 실을 만한 거장의 작품을 위주로 취재했지만, 오늘만큼은 블랑쉬 파브르가 어떤 작품을 만들었는지 천천히 살피고 싶었다.
짐을 챙겨 일어난 김지우는 계산하고 밖으로 나섰다.
그 앞에 블랑쉬 파브르가 서 있었다.
밖으로 나서고 제법 시간이 흘렀기에 김지우는 깜짝 놀라 다가갔다.
“누구 기다려요?”
블랑쉬 파브르가 뒤돌아 고개를 들었다.
“아까 있던 데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했는데?”
“돌아와 버렸어요.”
김지우가 눈을 깜빡였다.
“미로?”
블랑쉬 파브르의 말에 김지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 * *
“걱정 말고 다녀와.”
믿음직한 방태호에게 이런저런 일을 맡기고 할아버지, 차시현과 함께 공모전을 즐기고자 나섰다.
드문드문 기자들이 알아봐서 <미>를 그린 게 사실이냐고 물어봤지만 다니는 데 크게 불편하진 않았다.
“훈아!”
익숙한 목소리에 시선을 옮기자 김지우가 손을 높이 흔들고 있었다.
곁에 저번에 만난 이상한 애도 함께 있다.
오늘은 길을 안 잃은 모양이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시현이라고 했나? 오늘도 귀엽네.”
“안녕.”
활기찬 김지우와 달리 블랑쉬 파브르는 무미건조하다.
블랑쉬를 무서워하는 차시현이 곁에 딱 달라붙어 얼굴만 내밀었다.
“인터뷰한 거예요?”
“응. 끝나고 돌아가는 길이야.”
“같이요?”
“어. 그렇게 됐어. 아하하!”
그새 친해진 모양.
김지우의 친화력이라면 무리도 아니다 싶다.
“봤어?”
파브르가 대뜸 물었다.
“뭘?”
“내 거.”
고개를 젓자 눈매를 좁힌다.
“동료가 뭐 만들었는지 궁금하지 않아?”
“동료?”
“앙리 마르소 이기기로 했잖아.”
언제 그런 약속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아 잠시 망설였다.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 앙리 마르소를 타도해야 한다느니 그런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김지우가 눈을 빛내며 달려들었다.
“정말? 둘이 같이하기로 한 거야? 이름이 뭔데? 까까파?”
블랑쉬 파브르가 얼굴을 찌푸렸다.
한국말을 알아들었을 리는 없고 까까라는 말만 알아들은 모양이다.
“아니에요. 그런 적 없어요. 얘 혼자 한 말이에요.”
“응? 그래? 파브르, 아니라는데 어떻게 생각해?”
“하기 싫어?”
“하기 싫다기보단. 마르소하고 친해. 싸울 이유가 없는데.”
블랑쉬가 나를 빤히 본다.
이 아이가 왜 마르소를 적대하는지 몰라도 아마 오해가 있지 않을까 싶다.
들으나 마나 막말했을 게 뻔하다.
“너무 미워하지 마. 성격이랑 언행은 글러 먹었어도 심성은 착해. 너한테 뭐라고 했다면 말해 줘. 혼내줄게.”
블랑쉬 파브르가 고개를 저었다.
입을 앙다물고 있는 모습을 보니 보통 분한 게 아닌 모양이다.
“모른 척하지 마.”
“모른 척?”
“이미 이겼잖아.”
얘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몰라도.
굳이 이해하고자 노력해 보면, 내가 그렸다고 알려진 <미>가 1등하고 있는 것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미는 내가 그린 게 아니야.”
“앙리 마르소가 그린 거잖아.”
“어?”
<미>가 앙리 마르소의 작품이라는 걸 이렇게 확신하는 사람은 처음이다.
“그럼 잘 알겠네. 지금 표 제일 많이 받은 사람은 앙리 마르소야.”
블랑쉬 파브르가 고개를 저었다.
“그 황금색. 보색 배치. 다 너한테 영향받은 거잖아. 원래 마르소는 그렇게 그리지 않아.”
김지우가 흥미로워하며 나와 블랑쉬 파브르를 번갈아 본다.
“나도 언젠가 너처럼 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