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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반 고흐-192화 (147/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192화

37. 개벽(10)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려던 차 차시현이 스마트폰을 보여주었다.

가디언지에 게시된 기사인데, 가 고훈의 작품인 이유라는 제목이다.

뉴튜브에서 미술 전문 채널을 운영하는 알렉스의 말을 인용했다.

앙리 마르소 이야기가 나와서 이번에는 또 무슨 짓을 저질렀나 싶었더니, 마르소는 <미>가 완벽한 작품이고 자신이 그리지 않았다고 말했을 뿐이다.

알렉스의 억측이 시발점이 된 듯하다.

“어그로였네.”

방태호가 혀를 찼다.

“뉴튜브 조회 수 때문에 관심받으려고 무리한 것 같아. 이런 사람으로는 안 보였는데 좀 실망이네.”

“흐음.”

할아버지는 기사를 다시 한번 정독하시며 신음하셨다.

“표 차이도 늘었어.”

차시현이 투표 현황을 보여주었다.

2만 표 차이까지 좁혀졌던 <미>와 <여름 너울>이 이제는 5만 표까지 나버렸다.

<미>가 내 작품인 것처럼 알려지면서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어쩐다.

어차피 며칠 뒤엔 밝혀질 일이라 크게 신경 쓰이진 않지만 기왕에 참가한 공모전.

되도록 좋은 성적을 내고 싶은 마음이 없진 않다.

우승까진 바라지 않아도 마르소에게만은 지고 싶지 않기도 하고.

“어떻게 해요?”

방태호가 턱을 쓸다가 입을 열었다.

“손해를 만회하려면 뭘 제출했는지 알려야겠지. 아니면 미를 그리지 않았다고 하거나. 아.”

좋은 생각이라도 떠오른 모양인지 방태호가 손뼉을 쳤다.

“어쩌면 호재가 될 수도 있겠어.”

호재가 무슨 뜻인지 몰라 할아버지를 보니 좋은 일이라고 알려주셨다.

방태호가 태블릿에 적외선 키보드를 연결했다.

“뭐 해요?”

“소스 좀 풀려고.”

내가 쉬민케와 1년간 계약을 했다는 내용이다.

올해 유화 작품에는 쉬민케 물감만 쓰는 조건으로 60만 유로를 받았었는데, 홍보 방송도 하고 광고 영상을 찍기도 했지만 발표작이 많지는 않았다.

“다들 감을 못 잡고 있으니까. 미가 어떤 물감을 썼는지는 몰라도 전부 쉬민케 물감으로 그리진 않았을 테니 유추할 수 있을 거야.”

“네.”

“그럼 자연스레 아니라는 게 알려지고 쉬민케도 한 번 더 언급되니 다음에 더 좋은 조건을 받을 명분도 서지 않을까 싶어.”

“그게 그렇게 돼요?”

“아르누보 공모전이니까. 천만 명이 관심 가진 행사에 화제가 되기 쉽지 않지.”

이 상황에서도 돈 벌 생각을 하다니.

내가 사람은 참 잘 만난 것 같다.

부우웅- 부우웅-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마르소예요.”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묻는다.

-봤어?

“네.”

-하아.

그답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말하는데, 나 아니야.

전에 미셸과 함께 있는 걸 봤을 때도 도박 중독이니 헛소리를 했던 일이 떠올랐다.

남을 속일 필요가 없던 탓인지 아니면 거짓을 입에 담는 걸 혐오하는 탓인지 몰라도 참 거짓말 못 한다.

말이 없기에 달래주고자 입을 열었다.

“알아요.”

-……뭐?

“알렉스란 사람이 오해했던 거잖아요.”

-그래. 그 빌어먹을 자식이 멋대로 지어낸 이야기야.

“그래요.”

말이 없다.

“더 할 말 없어요?”

-……동등한 조건이고 싶었어.

“그것도 알아요.”

그가 내게 지고 싶지 않듯이 나 또한 그에게 지고 싶지 않다.

아니, 정확히는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그처럼 뛰어난 예술가에게 사랑받는 일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지 모른다.

“우리가 그런 일로 오해할 사이는 아니잖아요. 걱정 말아요.”

예전 같았으면 화부터 냈을지도 모르겠다.

기껏 준비한 작품이 아니라, 다른 그림을 그렸다고 알려졌으니까.

표도 일부 손해 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르소가 나와 동등한 조건에서 경쟁하고 싶어 함과 그의 진실됨을 잘 알고 있다.

그는 그런 얕은꾀를 부릴 사람이 아니다.

-……그래.

“이쪽에서도 어떻게 할지 준비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하는 말인데.

마르소가 말을 끊었다.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귀를 기울이니 진지한 목소리가 전해졌다.

-여름 너울. 내가 그렸다고 할게.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해 되물었다.

“뭐라고요?”

-내가 그렸다고 하자고. 그럼 공평하잖아.

똑똑한 건지 멍청한 건지 하나만 했으면 좋겠다.

“무슨 말이에요. 당장 그만둬요.”

-왜.

“왜긴 왜예요. 그래서 뭐가 달라지는데요.”

-뭐가 달라지긴. 지금 내 그림이 네 이름 때문에 표 더 받았잖아.

“그렇겠죠.”

-그러니까 너도 내 이름 가져다 쓰라고.

이게 무슨 논리지.

-뭔 말을 해도 안 믿으니까 이 방법밖에 없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런 줄 알아.

“일 더 복잡하게 만들지 마!”

* * *

-하지 마! 하지 말라고 했어요!

고훈이 엄포를 늘어놓고 전화를 끊자 앙리 마르소가 턱을 당긴 채 스마트폰을 바라보았다.

“뭐래?”

곁에 있던 미셸 플라티니가 걱정스레 물었다.

“하지 말라는데.”

“그것 봐. 대체 어디까지 공평해지고 싶은 거야?”

미셸 플라티니가 앙리를 탓했다.

고훈이 득표율에 손해를 봤으니 <여름 너울>을 본인 작품으로 소개하는 게 맞지 않겠냐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길래 당사자에게 물어보고 하라 했거늘.

예상대로 거부당했다.

한참을 뭐라 하던 미셸은 앙리 마르소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음을 눈치챘다.

평소라면 자기 뜻대로 안 되는 상황에 펄펄 뛰고도 남았을 그가 얌전하니 의아했다.

‘너무했나?’

앙리를 너무 몰아붙였나 싶은 마음에 미셸이 언성을 낮췄다.

“뭐야. 왜 그래.”

앙리가 주먹을 폈다가 쥐길 반복하며 말했다.

“아니래.”

“뭐가?”

특유의 기행으로 쉽게 오해를 샀던 앙리 마르소는 고훈이 한 말이 잊히지 않았다.

‘우리가 그런 일로 오해할 사이는 아니잖아요.’

“……아니래.”

오전에 있었던 일로 잔뜩 흥분했던 그는 한동안 깊은 생각에 빠졌다.

한편.

고훈이 <미>를 그렸단 소식에 깜짝 놀란 김지우는 경찰서 옆 갤러리를 찾았다.

‘이상하네.’

그녀는 <미>를 보면 볼수록 의문에 빠져 답을 구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고훈이 그렸다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아서, 알렉스가 조회 수 때문에 무리한 추측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찬찬히 들여다보자니 얼핏 비슷한 느낌이 있기도 했다.

고훈은 보색을 즐겨 활용했는데, <미>에서 황칠의 신비로운 황금색과 어둠을 표현한 푸른 장막이 그러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구도, 질감, 개체를 묘사하는 방식 모두 달랐지만 묘하게 닮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훈이가 그렸다고 생각하고 봐서 그런가?’

“어떠십니까. 고훈 군의 작품 같습니까?”

“확실히 저 신비로운 황금색은 역시 동양인이 아니고선 표현하기 힘들죠.”

고민하던 김지우가 고개를 돌렸다.

미술평론가 톰 제임스와 그 일행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몇몇은 클림트에 빗대기도 하던데요.”

“하하. 글쎄요. 두 사람 모두 황금을 다뤘지만 전혀 다르니까요. 클림트의 황금이 찬란하다면 이 작품에서의 황금은 차분하죠. 우아하다고 표현하고 싶네요.”

“고훈 작가도 황금을 잘 쓰긴 하죠.”

“그러네요. 이 황금색과 다르긴 하지만 첫 발표작인 해바라기에서도 아주 멋진 황금색을 보여주었죠.”

“그때도 많은 사람이 동양적인 유화라고 많이들 관심을 가졌습니다.”

“흐음. 어쩌면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하나 만약 그렇다면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고훈이 벌써 이만한 묘사력을 키웠다곤 믿기 힘듭니다.”

“그것도 일리가 있는 말씀이시고요.”

“고수열 경의 손자지 않습니까.”

“하하. 그렇게 되나요.”

평론가들의 대화를 들은 김지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본인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고훈이 <미>를 그렸다고 믿지 않으면서도 묘한 공통점을 찾아내고 있었다.

마음이 급한 기자는 앙리 마르소와 고훈의 친밀한 관계를 근거로 들어 <미>가 앙리 마르소에게 주는 고훈의 헌정작이라는 기사를 쓰기도 했었다.

‘정말인가.’

김지우가 고훈에게 직접 물어보고자 갤러리를 나서려 할 때.

앳된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렸다.

“마르소가 그린 거야.”

앙리 마르소와의 인터뷰, 아르누보 공모전 등으로 프랑스어를 조금씩 배우고 있던 김지우가 고개를 돌렸다.

백금발의 어린 여자아이가 <미>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블랑쉬 파브르?”

공모전 초반부터 10위권에 들었다가 벗어나길 반복하는 프랑스의 천재 화가 블랑쉬 파브르였다.

낯선 사람에게 이름을 불린 블랑쉬 파브르가 시선을 옮겼다.

“아, 미안. 놀라서.”

“네.”

블랑쉬 파브르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곤 다시금 <미>를 노려보았다.

어린 화가에게 베르나르 뷔페 이후 최고의 화가로 칭송받는 앙리 마르소는 너무도 높은 벽이었다.

언젠가는 넘어서야 할 거대한 벽을 마주한 블랑쉬 파브르는 주먹을 꽉 쥐고 <미>를 관찰했다.

막연함에서 피어오르는 두려움을.

반드시 극복하겠다는 의지로 잊기 위함이었다.

그녀의 당찬 표정을 보던 김지우가 슬며시 물었다.

“아까 마르소가 그렸다고 했죠?”

“네.”

“마르소라면 역시 앙리 마르소?”

블랑쉬 파브르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김지우가 서둘러 명함을 꺼내 보였다.

“한국 예화에서 나왔어요. 실례가 아니면 잠깐 인터뷰 좀 하고 싶은데. 괜찮아요?”

김지우가 영업용 미소를 지었다.

한국에서도 ‘예화가 어디냐’는 질문을 숱하게 받았던 터라, 유럽 무대에서 주목받는 천재 화가가 인터뷰에 응해줄지 걱정이었다.

“킴지우?”

명함에 적힌 영문 이름을 확인한 블랑쉬 파브르가 고개를 들고 되물었다.

“맞아요. 김지우.”

김지우가 더욱 밝게 웃었다.

“좋아요.”

“정말? 지금 괜찮아요? 어디 카페라도.”

김지우는 현재 프랑스 예술계에서 주목받는 예술가와 단독 인터뷰를 할 수 있다는 데 기뻐 호들갑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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