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191화 (146/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191화

37. 개벽(9)

-아르누보 공모전도 현지 시각으로 나흘 차를 맞이했습니다. 어제 재밌는 사실이 밝혀졌죠?

TV 소리에 잠에서 깼다.

어제 종일 걸었던 터라 피곤하다.

일어나기 싫어서 눈을 감은 채 귀만 열어두었다.

-그렇습니다. 6대째 전통을 지켜온 액자 장인, 피에르 말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액자 상점 샤똥을 운영하시는 분 아닙니까? 아르누보 공모전과는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현재 선두를 다투는 두 작품, 미와 여름 너울을 담은 액자가 그의 작품이라는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흥미롭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주목받는 이유는 따로 있을 것 같은데요.

-네. 바로 1,789점의 출품작 중 피에르 말로가 액자를 만들어 준 작품은 미와 여름 너울 둘뿐이라는 점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거장은 걸작을 알아본다는 뜻인가요?

-하하. 그렇게 되네요.

피에르 말로가 마르소와 내 작품에 액자를 만들어 준 게 알려진 모양.

두 작품만 만들고 싶었는지는 몰라도, 다른 걸 만들어 줄 시간이 없었던 건 확실하다.

<여름 너울> 액자를 10월이 되기 전에 완성해 주었으니 이후 <미>를 만들기까지 시간이 촉박했을 터다.

-피에르 말로가 두 작품이 큰 사랑을 받을 거라 예측하고 만들어 준 게 아니냐는 반응도 있습니다.

-사실 그는 본인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은 절대로 의뢰받지 않습니다. 때문에 작업량도 많지 않죠.

-네.

-그런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 정도로 훌륭한 작품이니, 방문객도 좋아해 주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또 하나. 두 작품의 작가가 누군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는데요. 피에르 말로는 알고 있지 않을까요?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고객의 신원에 관련한 질문은 받지 않겠다고 했으니 공모전이 끝나기 전까진 전문가들에게 기대해 봐야 할 듯합니다.

-스트레제만 씨도 전문가라면 전문가 아니십니까. 어떻게 보시나요?

듣다 보니 정신이 들어 일어났다.

거실로 나서자 할아버지와 방태호가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일어났어? 주스 줄까?”

“제가 가져다 마실게요.”

냉장고에서 사과주스를 꺼내 소파에 앉았다.

“어디 아파?”

“아니요. 어제 너무 걸었나 봐요.”

되도록 여러 작품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에 무리하고 말았다.

조금 피곤하다.

“그럼 오늘은 좀 쉴까?”

아직 구경하지 못한 작품이 1,000점이나 된다.

그럴 순 없어서 고개를 젓자 할아버지가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정리하면 <미>와 <여름 너울> 둘 중 하나가 고훈 작가의 작품이라고 예상하신단 말씀이신가요?

-어디까지나 추측입니다.

-조심스러우시네요.

-네. 사실 지금까지 고훈은 화풍을 여러 번 바꾸었으니까요. 힘 있는 붓 터치와 강렬한 색감처럼 고유한 특성도 있지만, 여름 너울과 같은 초현실적 구도나 미와 같은 고전적 스타일은 보여주지 않았죠.

-그렇군요. 어디까지나 추측이다.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죠.

TV에서는 ‘대화를 나눠요’가 계속되고 있다.

-각 매체에서도 긍정적인 메시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소개해 주시죠.

-네. 프랑스 일간지 르 피가로는 어제, 추위조차 미술 애호가들의 열정을 막지 못했다며 아르누보 공모전이 미술 부흥의 신호탄이라는 기사를 전면에 실었습니다.

“배 안 고파?”

“시현이 일어나면 같이 먹을게요.”

시계를 보니 아홉 시 십 분 전.

조금만 더 기다리고 깨워서 아침을 먹어야겠다.

-일각에서는 상금으로 인한 일시적 현상이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작품보단 돈에 의지한 행사가 아니냐고요.

“쯧.”

진행자 우진이 소개한 비판에 방태호가 혀를 찼다.

타임즈 기자로 소개된 아냐 스트레제만이 반박하고 나섰다.

-저는 다르게 보고 있습니다.

-말씀하시죠.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즐기는 사람이 없으면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들이 주장에 따르면 애초에 마케팅이라는 행위 자체가 부정되죠. 아무리 좋은 상품이라도 홍보가 되지 않으면 팔리지 않으니 광고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SNBA의 이벤트가 어디까지나 마케팅 방식이라는 지적이시군요.

-네. 직접 참여를 유도하는 아주 효과적인 방식이죠.

-좀 더 풀어서 설명 부탁드립니다.

-경품이나 상금은 고전적인 마케팅 방법입니다. 이를 지적하는 건 아르누보 공모전의 성공과 의의를 깎아내리려는 의도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건 그냥 넘겨 듣기 힘드네요. 아르누보 공모전을 견제하는 세력이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특정하긴 힘들지만 그런 행위가 분명 이어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방태호가 할아버지께 물었다.

“흐음. 호사다마지 않겠나.”

“호사다마가 뭐예요?”

기억을 되찾고 많은 일에 익숙해지고 지식도 늘었지만, 사자성어는 여전히 어렵다.

“좋은 일에는 방해되는 일이 흔하다는 말이야.”

“제롬 케르비엘처럼 극단적이진 않아도 SNBA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긴 한 모양입니다.”

미술 시장이 넓어지면 모두에게 좋은 일일 텐데 왜 반대하는지 의문이다.

“왜 그렇게 싫어해요? 다 같이 잘 되면 좋잖아요.”

“그런 사람도 있단다. 파이를 키우는 것보단 지분율을 독식하길 바라는 거지.”

“시장 확대는 과점 이후에 해도 늦지 않다고 판단한 거겠지요.”

“음.”

결국엔 욕심 때문이라는 말이다.

어떤 집단에나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 그런 부류의 이들은 심지어 국가가 망할 때조차 권력을 위해 나라를 팔아넘기기도 한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차시현이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왔다.

* * *

“앙리! 앙리!”

“꺄아아아!”

“앙리! 앙리!”

시테섬 거리에 나타난 앙리 마르소 덕분에 그러지 않아도 인파가 넘치던 거리가 혼잡해졌다.

미셸 플라티니가 시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즐기던 앙리 마르소의 귓가에 속삭였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어금니를 꽉 깨물고 말한 미셸은 언제 그랬냐는 듯 미소 지었다.

흡족해하던 앙리가 콧방귀를 뀌곤 걸음을 옮겼다.

“마르소 씨! 어떤 작품을 보러 오셨습니까?”

“아르누보 공모전의 성공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현재 선두를 유지 중인 미를 어떻게 보십니까!”

기자들을 무시하던 중, 한 질문이 그의 귀에 꽂혔다.

고개를 돌리자 김지우 기자가 스마트폰을 들이밀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미를 어떻게 보냐고?”

“네! 주최자이자 최고의 화가로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꼭 한마디 듣고 싶습니다!”

평소라면 불어가 아닌 인터뷰에는 결코 응하지 않던 그였으나 질문이 퍽 마음에 들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작품이지. 이 혼란한 시대를 종결지을 작품으로 손색없어.”

김지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수열, 페르디난도 곤잘레스, 장미래, 특히나 고훈 등 소수 작가를 인정하고 아끼는 그였으나, 타인을 이렇게 극찬한 적은 처음이었다.

김지우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던 기자와 시민 모두 경악하고 말았다.

“저, 정확히 어떤 점에서 그리 생각하시나요?”

“미의 작가가 누군지 예상하고 계십니까?”

“마르소 씨를 그렸단 추측에 관해서는 어떤 입장이십니까!”

질문이 쇄도하던 차, 앙리 마르소가 나타났단 제보를 받고 현장을 찾은 뉴튜버 알렉스가 인파를 뚫지 못해 안달이 났다.

그는 스마트폰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안타까움을 전할 뿐이었다.

“방금 들었어? 앙리 마르소가 완벽한 작품이랬어. 좋아 죽는 고훈 작품에도 완벽하다는 표현은 안 썼는데, 이게 대체 뭔 일이야?”

시청자들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진짜 사람이 바뀌기도 하네;;

└미 그린 사람이 고훈 아님?

└앙리도 나이 좀 먹더니 사람 구실 하는 모양이네. 앵테르미탕이나 아르누보 공모전이나 진짜 사람 되는 듯.

└작작해라. 우리 형이 뭐 언제는 쓰레기였던 것처럼 말하는데 원래부터 좋은 사람이었음.

└저거 앙리 팬 아님. 앙리 팬은 앙리 까는 맛에 하는 건데.

└까도 우리가 까. 솔직히 우리 형이 가끔 미친 짓은 해도 남에게 피해 준 적 한 번이라도 있었냐?

채팅창을 보던 알렉스가 고민에 빠졌다가 입을 틀어막았다.

‘힌트야.’

자존심이 강하기로 소문난 앙리 마르소는 본인 외의 예술가에 대해서는 엄격했다.

고수열과 같이 이미 거장으로 인정받은 인물 중에서도 몇몇은 앙리 마르소의 비판을 피할 수 없었고.

그가 호의적으로 발언한 작품은 극히 드물었다.

그런 앙리 마르소에게도 예외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한국의 천재 화가 고훈이었다.

그는 고훈의 첫 발표작 <해바라기>부터 <손님>, <서리 밀밭>을 거액에 사들였으며 최근에는 고수열로부터 <사랑7>을 선물받기로 약속받기까지 했었다.

심지어는 고훈 때문에 영화 <기암성>에 투자했다는 루머가 돌 지경이었다.

두 사람의 친근한 모습은 여러 매체를 통해 확인되었고, 그것은 앙리 마르소가 고훈만은 특별히 여기고 있음을 반증했다.

알렉스가 필사적으로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앙리 마르소에게 외쳤다.

“미를 본인이 그리셨습니까?”

알렉스의 확인 질문에 앙리 마르소가 고개를 돌렸다.

비대한 자존감과 지나친 긍지로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던 앙리 마르소는 어색하게 대응했다.

“아니.”

그러나 그의 어색한 부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알렉스는 의심을 확신으로 굳혔다.

“그렇다면 미를 그린 사람이 고훈입니까?”

“무슨 소리야!”

앙리 마르소의 강한 부정에 주변이 잠시 고요해졌다.

그러다 누군가 중얼거렸다.

“그래. 앙리가 고훈 말고 이렇게까지 칭찬한 적이 또 있었나?”

“고훈 참가했다며. 아직 안 밝혀졌잖아.”

“고훈이네.”

“그러네! 고훈이네!”

시민들의 추측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고 그중 알렉스는 그동안 밝힐 수 없었던 <미>의 작가를 찾아냈단 생각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백만 각이다!’

오늘 일을 영상으로 올리면 조회 수는 확실히 보장되리라 생각했다.

반면 앙리 마르소의 관자놀이에는 핏대가 돋아나 있었다.

“이것들이…….”

회화의 새 시대를 열기 전에 이 시대를 확실히 종결짓고자 그린 작품이.

미래를 상징하는 고훈보다 앞서 있음을 스스로 증명하고 고뇌 끝에 완성한 역작(力作)이 고훈의 작품으로 확정되는 분위기를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아니야! 아니라고!”

앙리 마르소가 악에 받쳐 소리쳤지만,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으로 들릴 뿐이었다.

거액의 이벤트 상금을 노리던 관광객들은 이미 앙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앙리 마르소가 가까이 있던 사람이 아르누보 공모전 애플리케이션에 <미>의 작가로 고훈을 입력하는 것을 보고 이를 갈았다.

* * *

아침을 먹고 아무래도 피곤해서 한숨 더 자버렸다.

점심이 다 되어서야 일어나 호텔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방태호가 괴상한 소리를 냈다.

“잉?”

“왜 그러세요?”

대답은 못 하고 눈만 껌뻑이다가 스마트폰을 보여주었다.

할아버지, 차시현과 함께 테이블 가운데로 고개를 내밀었다.

아르누보 공모전 공식 애플리케이션의 이벤트 페이지다.

익명으로 전시된 작품의 작가를 알아맞히는 행사인데, 상금이 제법 커서 나와 할아버지, 방태호, 차시현도 열심히 하고 있다.

“……어?”

<미>를 그린 사람이 내가 되어 있다.

1st

Hoon Go

(91.1%가 추측한 결과입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