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190화
37. 개벽(8)
고수열과 방태호가 고개를 돌렸다.
그들 역시 앙리 마르소가 아르누보 공모전에 참가한 이유를 알고 싶었다.
본인이 주도한 무대에 직접 오르는 발상이야, 평소 그의 기행을 고려하면 일견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주인공이길 바라는 그가 굳이 본인을 감춰서까지 참가한 저의가 궁금했다.
앙리 마르소는 한동안 고훈을 내려다볼 뿐 답하지 않았다. 고훈이 눈썹을 들어 재차 묻고 나서야 무거운 입을 열었다.
“머지않아 모두가 날 우러러볼 거다.”
* * *
묻는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뜬금없는 말을 늘어놓는다.
다시 물어보기도 전에, 앙리 마르소가 말을 이어나갔다.
“곧 일어날 거야. 색을 해방했던 마티스도. 형태를 해방한 피카소도 하지 못했던 일이.”
20세기를 대표하는 화가 앙리 마티스와 파블로 피카소.
색을 야수처럼 격렬하고 박력 있게 사용하여, 포비즘(Fauvisme: 사나운 야수)의 창시자로 알려진 앙리 마티스는 색을 해방했다고 평가받는다.
대상을 그대로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시점에서 관찰. 캔버스에 재구성한 파블로 피카소를 사람들은 큐비즘(Cubism: 입체파)으로 설명하며, 대상을 형태로부터 해방했다고 평가한다.1)
두 사람 모두 회화에 변혁을 가져온 위대한 화가다.
앙리 마르소는 그들이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혔던 것처럼 자신 또한 흐름을 바꿀 거라 말하고 있다.
“그러기 전에 확인해야만 했다.”
“뭘요?”
아무래도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게 해줘야 아르누보 공모전에 참가한 이유를 말해줄 것 같아서 물었다.
“내게 그럴 자격이 있는지.”
감히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고 말하는 그의 눈은 항상 그러했던 것처럼 진지하다.
“자격 같은 게 필요해요?”
“그래.”
마르소가 단호히 말했다.
“너를 품을 수 없다면 나는 기술자에 지나지 않아.”
“무슨 말이에요. 마르소가 예술 하는 일에 내가 무슨 상관인데요.”
마르소는 다시금 입을 닫았다.
한참이나 눈을 마주한 뒤에야 뜻 모를 말을 꺼냈다.
“네가 미래를 상징하니까.”
이 사람은 항상 나를 과대평가한다.
“저번에도 물었지.”
턱을 들고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은 열의로 가득하다.
“뭘 그릴 거지?”
전에도 어떤 미술을 할 거냐는 질문을 받은 적 있다.
여러 예술가의 작품을 보고 그들을 이해하는 과정이 퍽 즐겁다.
나로서는 생각지 못한 사상과 구도, 놀라운 발상과 감정으로부터 영감을 얻는다.
예전의 내가 온전히 나만을 표현했다면 작년 여름, 기억을 잃었던 시점부터 나는 줄곧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19세기와 20세기 그리고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나를 알리고 또 그들을 알아가는 중이다.
그래서.
어떤 미술을 할 거냐는 질문에 답할 수 없다.
혼자서는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지독한 고독을 그림으로 위안받을 수, 위로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하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며, 그렇기에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된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겠지.”
앙리 마르소가 등을 보였다.
성큼성큼 걸어 나갔고 아르센이 정중히 인사하곤 문을 닫았다.
결국 질문에 답은 안 하고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돌아가 버렸다.
“아무래도 동등한 조건에서 경쟁하고 싶었던 모양이구나.”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조건이요?”
“훈이 너를 품을 수 없으면 기술자에 지나지 않다고 하지 않았느냐. 준비하고 있는 걸 공개하기 전에 뭔가 마무리하고 싶었던 것 같구나.”
“대체 뭘 준비하길래 마티스와 피카소까지 언급했을까요?”
방태호가 물었다.
“글쎄.”
“흠…….”
“저 배고파요.”
어수선한 분위기가 이어지다가 차시현이 점심시간이 되었음을 알렸다.
“그러고 보니 점심시간이네. 선생님, 어제 말씀하신 거기로 갈까요?”
“좋지.”
식당에 도착해서도.
음식이 나온 뒤에도 마르소가 남긴 말이 잊히지 않아 부이야베스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네가 최고라고 생각했겠지만 그건 착각이야. 나도 한때는 왜 이런 순간이 빨리 왔나 싶기도 했어. 클림트처럼.’
그의 말을 곱씹다 보니 조금은 알 것 같다.
예전에 피에르 말로로부터 마르소가 내게 열등감을 가졌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그때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치부했지만 아주 거짓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자기만의 화풍과 주제를 뚝심 있게 밀어붙여, 전 세계로부터 사랑받는 앙리 마르소가 나를 그렇게 볼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나는 어린 나이에 성공을 거두었다.
그 모습이 예술을 하는 이들에게 어떻게 비칠지는 뻔하다.
호의를 보인 사람도 있지만,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도 분명 있을 거다.
마르소 갤러리에서 난동을 부린 남자처럼은 아니더라도, 수십 년간 노력해 온 결과를 고작 10살, 11살 아이가 손쉽게 이루는 과정이 달가울 사람이 얼마나 될까.
모든 사람이 성인은 아니다.
나 또한 마찬가지고.
내겐 너무나 대단한 예술가인 앙리 마르소가 나를 그리 봤다는 것이 충격이긴 하다.
하나 만약 그가 내게 열등감을 느꼈다면 나는 그를 다시 볼 수밖에 없다.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이상한 작자라고만 생각했거늘.
그는 나를 인정하고 기꺼이 동등한 조건에서 경쟁하길 바랐다.
작년부터 이름을 알리고 있지만 앙리 마르소의 명성에는 비할 바 못 된다.
아르누보 공모전 특성상 이름값이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고 다른 참가자들 모두 자신을 드러내는 데 망설이지 않았다.
예술의 본질이 자신을 드러내는 데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다만 여러 작품을 통해 대화하며 화풍을 정립해 나가는 과정에 있는 나는 그러기 힘든 구석이 있다.
앙리 마르소는 그런 내게 맞추어 자신을 감추고 공모전에 참가했다.
이 얼마나 순수한가.
그의 열등감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앙리 마르소가 그것을 이겨내 나가려는 방식은 순수하다.
고결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열등감을 시기와 질투로 표출하지 않고 당당히 마주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자신을 사랑할 줄 알기에,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을 인정할 수 있는 거라면 그를 독선적이고 거만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앙리 마르소에게 경의를 표한다.
단지.
나는 그를 이기고 싶은 마음도, 경쟁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예전에 <가면>을 보여줬을 때처럼 그와 그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뿐이다.
“훈아, 입에 안 맞아?”
생각이 깊어진 탓에 식사를 하지 않고 있자 할아버지가 걱정스레 물으셨다.
“아뇨. 먹고 있어요.”
직원이 발라준 생선 살을 먹었다.
삼척에서 먹었던 생선찜과는 전혀 다른 깊은 맛이 느껴진다.
“그런 사람도 있는 거겠지.”
할아버지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굳이 경쟁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남보다 앞서고 싶은 마음은 강한 동기가 되어주기도 한단다.”
뭘 고민하는지 할아버지 눈에는 다 보이는 모양이다.
“마르소는 널 그리 여기는 것 같구나.”
고개를 끄덕이자 방태호도 할아버지를 거들었다.
“왜. 마티스와 피카소도 그렇잖아. 티격태격했지만 결국에는 경쟁하면서 최고의 화가가 되었잖아.”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는 관계였지.”
경쟁을 통해 포비즘과 큐비즘이라는 사조를 이룬 두 거장의 관계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할아버지와 방태호는 12살이나 차이가 나는 두 사람이 경쟁하며, 서로에게 자극을 주어 결국 위대한 작품을 그릴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
그것도 괜찮겠지.
앙리 마르소가 그렇게 대화하길 바란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 또한 소통의 한 방식이니까.
* * *
아르누보 공모전의 두 번째 밤이 찾아왔다.
약 50만 표에 그쳤던 투표수는 하루 만에 크게 늘어, 총 1,671,282표에 이르렀다.
고전적 작풍에 오리엔탈리즘을 가미, 현대적으로 해석한 <미>는 262,586표 늘어난 384,395표를 기록.
선두를 유지했다.
물고기와 포말의 단순 패턴을 활용해 착시 현상을 유도한 <여름 너울>은 전날 대비 227,764표 늘어난 342,613표를 얻어 2위 자리를 굳혔다.
1위와 2위 작품이 총득표수의 43.5%를 차지함에 예술계가 발칵 뒤집혔다.
“이게 말이 되나?”
뉴튜브에서 예술 전문 채널 알렉스 팩토리를 운영하는 알렉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미>와 <여름 너울>에 깊이 감동하긴 했지만, 가치가 다원화된 미술계에 소수 작품이 표를 독점하는 상황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니가 좋다며 ㅋㅋㅋㅋ
└또또 오버한다 ㅋㅋㅋ 작품 괜찮더만.
└억텐 ㅗㅗ
시청자들이 억지를 부리지 말라고 하자 알렉스가 정색했다.
“아니. 억텐이 아니라 이상하잖아. 참가 작품이 1,789점이라고. 게다가 이거 둘은 유명 작가 작품으로 알려진 것도 아니야. 근데 이렇게 압도적이라고?”
알렉스의 지적에 시청자들도 납득했다.
첫날 10위를 기록해 화제를 모았던 <가장 아름다운>이 오늘 블랑쉬 파브르의 작품임이 밝혀지면서.
상위 득표한 작품 중에서 <미>와 <여름 너울>만이 작가가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었다.
“거지 같은 말이긴 한데, 작품은 브랜드 싸움이라고. 인지도가 곧 작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시장이라니까? 근데 이렇다는 건.”
알렉스가 채팅창에 올라오는 글들을 확인하다가 입을 열었다.
“되게 긍정적이야. 정말로. 어쩌면 평소 미술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많이 유입되어서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네. 작품이랑 작가를 완전히 분리해서 보는 것도 바보 같은 일이지만, 이런 현상이 나쁘진 않아 보여. 몇 명이나 왔지?”
알렉스가 인터넷 창을 열어 아르누보 공모전을 방문한 관광객을 검색했다.
“히~ 뭐 이렇게 많이 왔어?”
SNBA와 프랑스 관광공사(Atout France)가 집계한 관광객은 하루 약 47만 명이었다.
“그래. 진짜 예술가들은 SNBA랑 앙리 마르소한테 절해야 한다니까? 이런 행사를 기획할 수 있는 사람이 또 누가 있는데? 휘트니 미술관? 아니야. 지금은 그냥 아르누보 공모전이 톱이라니까?”
알렉스가 격앙된 목소리로 상황을 과장했다.
“이렇게 사람이 몇십만, 몇백만이 모이면 그 자체로 대중성을 가진다고. 그렇게 되면 미랑 여름 너울처럼 주류가 생기게 되고.”
한 시청자가 던진 의문이 알렉스의 눈에 들어왔다.
“주류가 생기는 게 왜 중요하냐고?”
그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머글이 생기잖아. 평소에 미술에 관심 없던 사람도 이거 멋지대, 좋대 하면서 미술관 한번 찾아가고. 그러다가 자기 취향에 맞는 작품이나 작가가 생기면 미술 시장 자체가 커진다니까?”
└그러네 ㅋㅋㅋ
└머글이랰ㅋㅋㅋㅋㅋㅋ
└얘 말하는 거 웃기네. 돈 보고 예술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됨? 애초에 좀 사는 인간들이 하는 일임.
└그러게. 자기만의 색이 있는데, 알렉스 얘는 대중성 오지게 밝히는 듯.
“이딴 놈들 때문에 고립되는 거야. 그럼 가난한 사람은 예술도 못 하냐? 돈 있는 새끼들만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다양화 부정되는 일이라는 걸 왜 몰라? 매니저 있죠? 저것들 다 쳐내. 대중성을 그저 돈으로만 엮는 놈들은 진짜 생각이 짧은 거야. 다양화는 다양한 사람이 도전할 수 있는 데서 나오고 그건 돈이 없으면 안 된다니까? 어떤 미친놈이 돈도 못 버는데 예술을 해. 가난한 예술가 다 옛말이야. 배고파 뒤지겠는데 어떻게 그림을 그리냐고.”
알렉스가 잔뜩 흥분했다.
“두고 봐. 미랑 여름 너울 같은 작품이 계속 나와야 시장이 바뀐다고. 고이다 못해 썩은 물이 저런 작품들도 씻겨 가야 생명을 얻는다고. 저걸 누가 그렸는지 몰라도, 저거 그린 사람들이 미술계를 바꿀 거라니까?”
└[티미 님께서 100달러 후원하셨습니다]: CBS 출연하고 월클 됐네. 시청자도 가르치고 ㅋㅋㅋ
“아이고 티미 형님! 100달러 감사합니다. 가르치긴요. 제가 어떻게 감히 시청자님들을 가르칩니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답답함에 소리 높이던 알렉스의 얼굴에 미소가 활짝 피었다.
* * *
1)큐비즘은 입체주의로 번역되고 두루 사용되나, 입방체주의로 표현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