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189화
37. 개벽(7)
어떻게 이런 일이.
아르누보 공모전은 앙리 마르소와 프랑스 국립 예술 협회가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 개최한 꿈의 무대다.
어마어마한 상금 덕에 가난한 예술가들에게는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안정적으로 펼칠 기회며.
익명성 때문에 성공한 예술가들에게는 자신의 미학을 확고히 함과 동시에 본인의 현주소를 시험하는 장이다.
본인의 꿈을 위해, 예술을 위해, 21세기형 르네상스(Renaissance: 재생)를 위해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공을 들였는지 모른다.
그런 공모전에 모작이라니.
더군다나 가장 많은 사람에게 지지를 받고 있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모욕이다.
아르누보 공모전을 준비한 이들에게, 참가한 이들에게, 예술을 사랑하여 방문한 이들에게 씻을 수 없는 모욕을 준 거다.
그리고 앙리 마르소에게도.
까득-
대체 어떤 루트를 통해 앙리 마르소의 작품이 유출되었는지 모르겠다.
다만 역사 속 인물을 배경으로 자신을 그리던 앙리 마르소는 어느 때보다도 집중하고 있었다.
작업실에 쌓인 수많은 스케치와 황칠이란 도료를 완벽히 활용하기 위한 시간과 노력이 그 증거다.
그런데.
이 모작은 중심인물을 돌려세워 놓았을 뿐, 마르소의 모든 것을 앗아가 버렸다.
“왜?”
차시현이 물었다.
방태호도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나와 할아버지를 살핀다.
정황을 모르니 나와 할아버지가 당황하는 바를 알 수 없으리라.
모작이 아니었다면 나 또한 앙리 마르소의 작품을 본 순간 받았던 감동을 그대로 느꼈을 정도로 훌륭한 작품이니까.
“왜 그래?”
“모.”
모작이라는 말을 입에 담으려던 차, 할아버지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어찌 된 일인지 알아본 뒤에 이야기해도 늦지 않을 것 같구나.”
더 늦기 전에 SNBA에 연락해 이 역겨운 모작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할아버지는 이 사건을 제대로 파악하는 일이 우선이라고 판단하신 듯하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방태호의 질문에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협회 사람과 만나봐야겠네.”
당황한 방태호와 차시현을 데리고 갤러리를 빠져나왔다.
할아버지는 급히 SNBA 쪽 사람에게 연락하셨고 나는 이 사건의 당사자이자 가장 큰 피해자, 앙리 마르소에게 전화를 걸었다.
* * *
프랑스 예술계의 영웅 앙리 마르소는 투표 현황을 확인하곤 몹시 흡족해했다.
렘브란트를 연상케 하는 빛과 어둠 대조와 동양적 신비로움을 품은 황칠의 숭고함.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히겠다는 포부를 드러낸 <미> 연작 중 첫 번째 그림이 선두로 달리고 있었다.
└와 진짜 뭐냐?
└무슨 종교화 보는 것 같다.
└옷이랑 인물 사이로 빠져나오는 빛 표현이 진짜 예술임.
└메시아 같은 느낌이네.
└고전적인데 오리엔탈리즘이 가미되었다고 해야 하나. 저 금색은 대체 뭔데?
└캐롤라인 스트릭은 황칠 같다고 하던데.
└황칠이 뭐야?
└몰라.
└근데 누굴 그린 거야?
└모름.
└일부러 뒷모습으로 설정한 거 보면 초월적인 존재라는 걸 강조하려고 한 듯한데.
└나만 누가 그렸는지 궁금한가 ㅋㅋㅋ 그래서 누가 그렸는데?
└상금이 걸렸는데 그걸 알려주겠냐.
└금색을 저렇게 잘 쓰는 사람이라고 하면 솔직히 앙리 마르소밖에 안 떠오름.
└앙리 마르소가?
└눈 에메랄드색이랑 금색이 포인트잖아. <마르소의 보석>이 대표적이고.
└그러고 보니 중심인물이 앙리 마르소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앙리 마르소가 참가할 이유가 있나?
└ㄹㅇ 자기가 건 상금 자기가 먹겠다는 심보도 아니고.
└그럼 앙리 마르소 헌정작인가?
└2222 이게 맞는 듯. 프랑스 예술계의 에로이카에 대한 헌정작인 듯.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어떤 놈이 인생 역전할 수 있는 공모전에 다른 사람 헌정작을 내는데.
└근데 진짜 그만큼 대단한 일 하긴 했음.
집단 지성을 발휘한 사람들은 <미>의 중심인물이 앙리 마르소가 아니냐고 추측했다.
거기에 더하여 몇몇은 앙리 마르소를 <미>의 작가로 지목했지만 공감을 얻진 못했다.
주목받길 좋아하는 앙리 마르소가 참가 사실을 숨길 리 없기 때문.
지독한 나르시시스트인 그라면 뒷모습이 아니라 앞모습을 그렸을 거란 반론도 있었다.
뒷모습을 그린 이유가 궁금증을 유발하기 위한 장치라고 반박하는 이도 있었지만 확실한 근거가 없었기에 설득력을 얻지는 못했다.
“흥.”
앙리 마르소는 미술 애호가들의 반응을 보며 씩 웃었다. 기특하게도 정체를 알아본 일부가 있었다.
하나 대부분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시상식 날, 두 번째, 세 번째 그림을 함께 보임으로써 <미>의 주인공이 밝혀지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되었다.
부우웅- 부우웅-
그때 비서 아르센이 가지고 있던 앙리 마르소의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아르센이 발신자를 확인했다.
“작가님, 고훈 군입니다.”
건방진 꼬맹이도 <미>를 본 모양.
일전에 연작 중 두 번째 그림을 보여준 적 있으니, <미>를 그린 사람이 누군지 못 알아볼 리 없었다.
아마 깜짝 놀랐을 터.
재능 차이로 인한 열등감에서 벗어나 의기양양해진 앙리 마르소가 전화를 받았다.
“봤냐?”
-봤어요.
고훈의 목소리는 무척 다급했다.
그것이 앙리 마르소를 더욱 즐겁게 했다.
“어때.”
-어떻긴 뭘 어때요. 빨리 내려야죠. 왜 이렇게 느긋해요.
앙리가 눈썹을 찌푸리며 스마트폰을 보았다.
“뭔 소리야?”
-그런 모작이 전시되어 있는데 왜 가만히 있어요. 누가 봐도 마르소 따라 한 거잖아요.
앙리가 눈을 세 번 깜빡이곤 고개를 돌렸다.
고훈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확인차 건넨 눈짓에 아르센은 고개를 저었다.
“뭐 잘못 먹었어?”
-몰라요? 미요. 미. 지금 공모전 1등 하는 거.
고훈은 의아했다.
공들여 만든 작품을 도둑맞았음에도 태평한 앙리 마르소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아직 공모전에 출품된 <미>를 확인하지 못했다는 것 이외에는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빨리 확인해 봐요. 어디서 유출됐는지 몰라도 마르소 작품이랑 구도만 다르고 똑같아요. 액자도 피에르 말로가 만들어 준 것 같던데, 확인해 봐요.
이야기를 듣던 앙리는 황당할 뿐이었다.
“뭐 또 주워 먹었어? 그게 왜 모작이야?”
맛있는 거만 보면 눈이 돌아가던 녀석이 아침부터 이상한 걸 주워 먹은 모양.
앙리 마르소는 고수열의 복귀전에서 술이 들어간 디저트를 먹고 행패를 부리던 고훈을 떠올리며 꾸짖었다.
-……모작이 아니라고요?
“그래.”
한편 고훈은 앙리 마르소가 <미>를 두고 모작이 아니라고 하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본인이 절대로 참가하지 않을 거라고 굳게 믿는 터라, <미>가 모작이 아니라면 남은 가능성은 하나뿐이었다.
-설마…….
“설마는 무슨.”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아니긴 뭐가 아니야.”
앙리 마르소가 다시금 안정과 여유를 찾았다.
<미>가 <여름 너울>보다 사랑받고 있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꼴이 꼭 예전 자신과 같아 보여 만족스러웠다.
-아니죠?
“맞다고.”
고훈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건방지긴 해도 어린 녀석에게 너무 큰 충격을 주었나 싶은 마음이 잠시나마 들었다.
-아니잖아요.
“그래. 인정하기 싫겠지.”
-아니잖아요!
앙리 마르소는 어렸을 적부터 실패를 모르고 줄곧 주목받아 온 어린 천재의 외침이 안쓰러웠다.
재능과 노력 그리고 미술을 사랑하는 마음 모두 갖췄으나, 자신보다 뛰어난 누군가를 만났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어른으로서 올바른 대처법을 알려줄 요량이었다.
“네가 최고라고 생각했겠지만 그건 착각이야.”
-…….
“나도 한때는 왜 이런 순간이 빨리 왔나 싶기도 했어. 클림트처럼.”
고훈은 말이 없었다.
앙리 마르소가.
천하의 앙리 마르소가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이 있음을 인정할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훈은 고개를 젓고 외쳤다.
-아니라고 해!
고훈의 외침에 앙리 마르소가 인상을 썼다.
고작 10살 먹은 아이기는 해도 자신이 인정한 사람이 무작정 떼를 쓰니 유쾌하지 않았다.
“인정해. 인정할 줄 모르면 어떤 발전도.”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집어치워!
“……?”
앙리 마르소가 당황해서 아르센과 눈을 마주했으나, 고훈이 왜 이러는지 답을 구할 순 없었다.
고훈의 간절한 목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전해졌다.
-당신이 남을 따라 할 리 없잖아! 그러지 않아도. 그러지 않아도 할 수 있잖아!
고훈의 처절한 외침에 앙리 마르소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죠?
“…….”
너무나 뜬금없는 말에 어처구니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아니라고 해요. 빨리.
이성을 되찾은 앙리 마르소가 상황을 이해하고자 머리를 굴렸다.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어도 남을 따라 했다고 여기는 듯했다.
“이 자식이 아침부터 뭔 개소리야? 내가 남을 왜 따라 해? 너 어디야!”
모욕당한 영웅이 버럭 소리쳤다.
* * *
-거기 꼼짝 말고 있어!
앙리 마르소가 엄포를 늘어놓곤 통화가 끊었다.
“뭐라고 하더냐.”
고훈이 멍하니 스마트폰을 빤히 바라보다가 눈물을 훔치자 고수열은 손자의 어깨를 감쌌다.
“모작이 아니래요. 둘 다.”
사랑하는 화가가 부정한 일을 저지르지 않았음에 고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앙리 마르소가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꺼낸 탓에 한순간 최악의 상황을 떠올렸지만, 강하게 부정하는 걸 보니 안심할 수 있었다.
헛소리는 해도 거짓은 말하지 않는다고 굳게 믿는 덕이었다.
“흐음. 이상하구나.”
“그러니까요.”
우연히 같은 소재를 다뤘다고 하기에 앙리 마르소가 작업하던 작품과 아르누보 공모전에 출품된 <미>는 너무나 닮았다.
“모르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기다려 보면 알겠죠. 이쪽으로 온대요.”
고수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고훈 일행이 머무는 호텔 방을 찾은 앙리 마르소가 문을 부술 기세로 두드렸다. 방태호가 문을 열자 씩씩거리며 들어왔다.
그 씩씩한 모습에 안도한 고훈이 다가가자 냅다 소리쳤다.
“내가 뭘 어쨌다고? 어?”
“그러니까 말을 왜 헷갈리게 해요.”
“헷갈릴 게 어딨어!”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이 있다고 했잖아요. 미가 모작이 아니라고 하니까 그렇게 생각했죠. 무슨 일인지 말해봐요. 초콜릿 먹을래요?”
“내가 그렸다고! 내가!”
앙리 마르소에게 간식을 권하던 고훈이 초콜릿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보고도 몰라? 연작이잖아!”
고훈이 눈을 깜빡이다가 물었다.
“참가 안 한다면서요.”
“내가 언제!”
“……우승할 거 알고 참가하는 거 아니냐고. 나한테 하지 말라 했잖아요.”
고훈이 기억을 더듬었다.
부정적인 발언은 했지만, 굳이 꼬집으면 참가하지 않겠다고 한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그럼 진짜 마르소가 그린 거예요?”
“그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던 고훈은 재차 물을 수밖에 없었다.
“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