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188화 (143/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188화

37. 개벽(6)

“어디?”

방태호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세 시간 전만 하더라도 순위권 밖이었던 고훈의 <여름 너울>이 최상위권으로 치고 올라가 있었다.

방태호는 마치 자기 일인 양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다들 알아본 거야. 이름값이 아니라 작품으로!”

방태호가 얼떨떨하여 반응이 없던 고훈을 붙잡고 흔들었다.

“이거 진짜에요?”

덕분에 정신을 차린 고훈이 다시 한번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진짜지!”

차시현이 친구를 끌어안고 방방 뛰었고 방태호는 서둘러 <여름 너울>과 관련된 기사를 찾았다.

그러나 고훈은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이상하잖아. 11만 표만 받았는데 어떻게 2등이나 해?”

아르누보 공모전 공식 애플리케이션은 1,000만 번 이상 다운로드되었다.

그들로서는 정확한 수치를 알 수 없었지만, 오늘 아르누보 공모전을 구경하러 파리를 방문한 관광객이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정도는 오전과 오후 일정을 소화하며 익히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직접 방문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시테섬을 완벽히 구현한 VR 전시회도 열려 있었다.

11만 표가 결코 적은 수는 아니나 아르누보 공모전의 열기를 고려하면 부족해 보였다.

“첫날이라서 그럴 거야. 개인당 열 작품만 선택할 수 있으니까 최대한 많이 보고 투표하려는 거겠지. 봐, 총투표수가 580,045라고 나와 있잖아.”

방태호의 설명에 고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직 모르는 거네요.”

“그렇긴 해도 이런 일은 초반이 중요해. 높은 순위를 선점하면 그것만으로도 홍보가 되니까.”

공모전 기간은 앞으로 6일이나 남아 있었다.

섣불리 기뻐하지 않고 되도록 침착하려던 고훈이 고개를 들었다.

과연 고수열은 침착했다.

도리어 평소 고훈을 대하던 다정다감한 모습과 달리 다소 근엄해 보이기도 했다.

성적은 중요하지 않다며, 작품으로 관람객과 교감하는 일만 생각하라던 할아버지다웠다.

고훈은 그런 할아버지가 자랑스러웠다.

“할아버진 안 기쁘세요?”

차시현이 고수열에게 물었다.

“아직 안 믿기시나 봐. 선생님, 정말 훈이가 2등하고 있습니다. 언론도 SNS도 난리예요.”

“…….”

고수열이 반응하지 않자 고훈이 나섰다.

“아직 기뻐할 단계는 아니잖아요. 좀 더 지켜봐야죠.”

“흠.”

“그래도.”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방태호는 잠시 흥분을 가라앉혔고 차시현은 친구의 선전에 솔직하게 기뻐하지 않는 어른과 고훈이 이해되지 않았다.

고수열이 다가와 2028 아르누보 공모전 투표 현황을 살폈다.

루브르 박물관 특별 전시회가 약속된 1위부터 10위까지 중 그가 아는 작품은 손자 고훈의 <여름 너울>뿐이었다.

노트르담 대성당 주변 갤러리는 사람이 너무 몰린 탓에 외각부터 살핀 탓이었다.

“훈이가 2등이라고?”

“네!”

차시현의 힘찬 대답에 고수열은 심기가 불편했다.

사랑하는 손자의 <여름 너울>은 그조차 깜짝 놀란 작품이었다.

고훈에게 순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했지만, 우승하리라 확신하고 축하 선물도 미리 준비해 두었던 고수열로서는 믿을 수 없었다.

<여름 너울>보다 많은 표를 받은 작품이 무엇인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만 했다.

“어디에 전시되어 있는지 알 수 있나?”

“아, 찾아보면 소개해 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여기요. 경찰서 옆 건물인가 봐요.”

차시현이 뉴튜버 알렉스가 게시한 ‘아르누보 공모전 반드시 봐야 할 작품 top 5’을 보였다.

“흠. 그래. 내일은 여기부터 들르자꾸나.”

세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고훈은 평소와 조금 다른 할아버지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 * *

현대 미술 역사상 최대 상금이 걸린 공모전이자 내로라하는 예술가 1,789명이 참가한 아르누보 공모전의 의의는 명확했다.

개인이 고립된 사회 문제 속에서 소통의 중요성이 대두되었고 그러한 시대 의식을 반영한 공모전이었다.

프랑스 국립 예술 협회는 특정 인원으로 규격화되는 심사 방식에서 탈피, 관람객 모두에게 의견을 물음으로써 공공화를 추구하였다.

그 결과, 개막과 동시에 세 작품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선전하고 나섰다.

익명 출품을 원칙으로 하였기에 작가를 알 수 없는 <미>와 <여름 너울> 그리고 세 작품 중 유일하게 작가가 밝혀진 <이별>은 각각 총득표수의 20% 내외를 선점 확보하였다.

“흐으음.”

이른 새벽, 아르누보 공모전을 취재하고자 파리 출장을 나선 김지우 기자가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름값이라고 해야 하나.”

어제, 화제가 된 세 작품을 둘러보았지만 데미안 카터의 <이별>에게는 <미>와 <여름 너울>에서 받았던 감동을 받지 못했다.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기에 여러 포럼 사이트, 커뮤니티, 개인 매체를 확인한 결과, <이별>은 거장 데미안 카터의 작품으로 소개되고 있었다.

<이별>이 주는 감상이라든가 메시지에 관한 언급은 찾기 힘들었다.

김지우가 아르누보 공모전 사이트에 접속했다.

루브르 박물관 특별 전시회에 초대받을 작가는 상위 열 명.

현재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출품작 열 점 중 작가가 거의 확실시 된 작품은 <이별>을 포함해 일곱 점이었다.

“이러면 의미가 없는데.”

김지우가 입술을 내밀고 턱을 괴었다.

첫날이라고는 하나 상위 득표작 대다수가 누구의 작품인지로 관심 받고 있었다.

영향력 있는 스피커들조차 유명 작가의 작품을 찾고 있었다.

인플루언서 중에서는 알렉스와 같은 일부만이 작가에 구애받지 않고 작품을 소개하고 있었다.

“후.”

그녀는 오늘 오전과 저녁에 게시한 기사를 확인하곤 한숨을 내쉬었다.

영문 기사를 따로 내긴 했으나 영세 잡지사 예화에서 낸 인터넷 기사로는 유럽인은커녕 한국인에게도 관심을 끌 수 없었다.

혜성처럼 등장한 고훈과 성공적으로 복귀한 고수열, 침체되었던 미술계를 견인해 온 장미래.

예술가들이 분전하는 가운데, 언론인으로서 미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도움이 될 수 없단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작년, 고훈에게 그림을 팔아주겠다고 호언장담했던 말을 지키지 못한 것 같아 괴로웠다.

창가에 빛이 들기 시작했다.

울적한 마음을 애써 묻어두고 빈속을 라떼 한 잔으로 달랜 그녀는 거리로 나섰다.

숨을 내쉴 때마다 입김이 하얗게 피어올랐다.

이번 특집호에 크게 기대를 건 예화가 시테섬 인근의 좋은 호텔을 잡아준 덕에 충분히 걸어갈 수 있었다.

그녀는 차가운 아침 공기로 우울함을 달래며 아르콜 다리를 건넜다.

갤러리 개관 시각까지 아직 멀었기에 그녀는 야외에 설치된 작품을 보고자 노트르담 대성당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어? 김지우 씨?”

얼마나 걸었을까.

누군가 그녀를 불러세웠다.

“아. 안녕하세요.”

이인호 기자가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일찍 나오셨네요.”

“네. 사람 없을 때 좀 둘러보고 싶어서요. 인호 씨도?”

“하하. 조금이라도 일찍 나와야 뭐라도 건질 것 같아서요. 참, 어제 기사 잘 봤습니다. 지우 씨 덕에 많이 배워요.”

김지우가 작게 웃었다.

“아, 이거 받으세요.”

이인호가 주머니에서 핫팩을 꺼내 건네자, 김지우가 손을 흔들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인호 씨 쓰세요.”

“몇 개 챙겨 왔어요. 가져가세요.”

이인호가 넉살 좋게 웃으며 거듭 권했다.

어쩔 수 없이 손난로를 받은 김지우는 장갑 너머로 전해지는 온기를 느끼며 인사했다.

“고마워요. 잘 쓸게요.”

“하하. 네. 그럼 오늘도 힘내서 기사 써 주세요.”

“네.”

이인호가 주변을 둘러보곤 숨을 길게 내쉬었다.

“사실 지우 씨 말 못 믿었거든요.”

“네?”

“미술 시장이 커질 거라는 말이요. 잘은 몰라도 이쪽이 축소된 건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서요.”

“아. 네…….”

“그런데 지금 보니 제가 정말 몰랐던 것 같아요. 많은 예술가가 이렇게 노력하고 있고 지우 씨처럼 밖에서 힘쓰는 사람이 많은 줄은 정말 몰랐어요.”

김지우는 이인호 기자의 말에 호응할 수 없었다.

예술가와 관련 업계인들이 성과를 보이는 것은 분명하나, 자신은 그러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한다고 자부했던 마음이 저조한 조회 수로 흔들리고 있었다.

다른 언론처럼 유명 작가 관련 기사를 써야 하는지 고민하던 중이었다.

“미랑 여름 너울 기사는 정말 잘 봤어요. 저는 잘 모르겠던데 둘 다 피에르 말로의 액자라면서요? 그런 눈썰미가 부럽습니다. 멋져요.”

김지우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녀의 표정이 안 좋아지자 당황한 이인호의 목소리가 커졌다.

“정말로요. 전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다 큰 남자가 허둥지둥하는 모습은 처음이라 웃음이 나왔다.

영문을 모르는 이인호는 그녀가 왜 웃는지 의아해하면서도 일단은 안도했다.

“저. 제가 무슨 웃긴 이야기라도. 같이 웃어요.”

“아뇨. ……피에르 말로 이야기는 다 아는 이야기인데요. 뭘. 그걸 칭찬하시니까 민망하잖아요.”

“아, 그런가요? 하하핫!”

* * *

“추워어어어.”

차시현이 오돌오돌 떨며 찰싹 붙었다.

오늘은 유독 춥다.

내복과 털양말, 털모자, 귀마개, 손모아 장갑, 두꺼운 패딩 점퍼까지 챙겼는데도 쌀쌀하다.

“오늘은 몇 군데 정해서 돌아다녀야겠구나.”

“네. 우선 미를 보러 가니까 근처만 둘러보죠.”

할아버지 말이 백번 옳다.

“왜 이렇게 추운 날에 하는 거예요?”

“그러게. 아마 살롱전에 맞춰서 진행하느라 그럴 텐데, 이야기가 좀 나오겠어.”

“이 정도 규모라면 독립해서 운영해도 될 터인데.”

어지간한 의지가 있지 않고는 이 한파를 뚫고 작품을 구경할 수 없을 거다.

예술가는 물론 SNBA 등 많은 사람이 노력해서 연 아르누보 공모전이 날씨 때문에 성과를 거두지 못할까 걱정이다.

“어? 저기 봐.”

차시현이 몸을 살짝 밀쳤다.

고개를 돌리니 <여름 너울>이 전시된 갤러리 앞에 줄 선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어제보다 많다.

“화제가 된 모양입니다.”

“음.”

오늘처럼 추운 날에 저렇게들 찾아주니, 기쁘다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마음이 벅차오른다.

<여름 너울>이 언 몸을 녹일 수 있어야 할 텐데.

“여긴 것 같은데.”

얼마나 더 걸었을까.

방태호가 걸음을 멈췄다.

<여름 너울>이 전시된 갤러리에 못지않게 많은 사람이 줄을 서 있다.

추위보단 1,700점 중 가장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 작품은 어떠할지 궁금해서 참기 힘들다.

“근데 생각보다 별로면 어떡해?”

“그러진 않을걸. 작가가 누군지 예측이 안 된다고 하잖아.”

“그게 중요해?”

“작품만으로 감동을 줬다는 뜻이니까.”

“우웅.”

작품을 감상할 때 작가를 완전히 배제할 순 없다.

다만 작가의 신원이 완전히 감춰진 상태에서 감동을 주었다면, 그 작품이 간직한 아우라가 분명하단 뜻 아닐까.

“점심은 따뜻한 걸로 먹어야겠습니다.”

“좋지. 부이야베스 어떤가. 일전에 훈이랑 가봤는데 괜찮더군.”

“선생님이 추천하시면 무조건 가야죠.”

“부이야베스가 뭐예요?”

“해물이랑 토마토 넣고 끓인 거야.”

할아버지와 방태호를 대신해 답해주자 차시현이 눈썹을 모았다.

“맛있어. 국물 먹으면 따뜻해져. 나중에 건더기는 따로 주는데 생선 살도 발라주고.”

“생선이랑 토마토랑 같이 끓였는데 어떻게 맛있어?”

생선 살 발라먹는 걸 걱정하는 줄 알았더니 좀 더 근본적인 부분에서 거부감을 가졌던 모양이다.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차례가 되어 갤러리에 입장할 수 있었다.

어떤 작품일까.

키가 작은 탓에 <미> 앞에 설 때까지 다른 작품들을 감상하며 조바심을 애써 눌렀다.

그리고 마침내.

“이야.”

방태호의 감탄과 함께 <미>를 볼 수 있었다.

“우와.”

어둠을 뚫고 내린 숭고한 빛 아래 순백의 케이프가 나부낀다.

소매와 케이프 끝자락, 구두 굽은 고상한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다.

장막을 열어젖히듯 걸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에 괜히 마음이 경건해지던 중.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구도, 저 황금색 물감.

분명 보았다.

“할아버지.”

“흐음…….”

“황칠 맞죠?”

“그런 것 같구나.”

큰일이다.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공모전에서 최고로 추대받은 작품이.

앙리 마르소를 따라 한 모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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