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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반 고흐-187화 (142/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187화

37. 개벽(5)

“설마 이거 진짠가? 어떡해. 진짜 살아 있는 것 같아.”

“자연사한 동물을 박제한 거야.”

“어떻게 알아?”

“데미안 카터 작품 특징이잖아.”

아르누보 공모전 개막과 동시에 데미안 카터의 <이별>은 큰 주목을 받았다.

자연사한 토끼를 유리 상자에 포름알데히드로 박제한 작품이었다.

죽은 토끼가 살아 있을 때와 같이 뛰는 자세를 취한 전시품에 관람객들은 낯선 반응을 보였다.

섬세한 기술로 박제된 토끼는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았는데, 조금의 미동도 없으니 거부 반응이 들었다.

또한 죽음을 멀게 생각하던 터라, 그들 앞에 놓인 죽음의 상징물이 거북하였다.

그러나 시선을 사로잡는 이미지와 깊이 파고드는 철학이 관람객들의 발을 묶어두었다.

갤러리 안은 더 이상 발 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로 빽빽했다.

“역시 선생님이십니다.”

영국 사치 갤러리의 머천다이저(merchandiser: 상품 기획, 전시, 판매 담당 전문인) 맷 브라운이 감탄했다.

“이대로라면 우승은 큰 문제 없겠습니다.”

“하하. 우승이 중요한가. 많은 사람이 작품을 볼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데미안 카터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맷 브라운은 실언했음을 깨달았다.

21세기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위대한 예술가, 데미안 카터가 참가한 이상 아르누보 공모전의 우승자는 이미 결정된 일이었다.

우승은 당연한 일이니, 그보다는 <이별>을 통해 더 많은 사람이 데미안 카터를 따르는 일이 중요했다.

“자, 여기 있지 말고 다른 곳에도 가보세.”

“숙소로 모실까요?”

“무슨 말인가. 다른 작품도 봐야지.”

데미안 카터가 스마트폰을 꺼냈다.

“이벤트 참가하십니까?”

“물론이지. 자네는 안 하나?”

“네, 뭐…….”

“누군지 몰라도 재밌는 생각을 했어. 여기 빈 곳을 안 채우고 어떻게 버티겠나.”

“미셸 플라티니의 아이디어라고 알고 있습니다.”

“미셸 플라티니?”

“마르소 갤러리 대표입니다. 이전에는 수석 큐레이터로.”

“아아. 알지. 마르소 군 전시회는 항상 인상적이었지. 이런 쪽으로도 재능이 있었구만.”

“마르소 갤러리에만 있기엔 아까운 사람이죠.”

“껄껄. 그런 말 말게. 세상 모든 작품을 다 다뤄도 앙리 마르소의 작품을 다루지 못하면 그 또한 슬픈 일 아닌가?”

데미안 카터가 앞장서서 걸었다.

맷 브라운은 앙리 마르소를 추켜세우는 데미안 카터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뛰어난 화가이자 조각가임은 인정하나, 데미안 카터가 쌓은 명성에 비하면 유망한 작가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흥. 앙리 마르소의 시대라고?’

홍보조차 없이 개막과 동시에 갤러리를 가득 채운 데미안 카터야말로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가였다.

“음?”

갑자기 멈춰 선 데미안 카터와 부딪칠 뻔한 맷 브라운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길 건너, SNBA 로고가 붙은 건물 앞에 사람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건물 모서리 뒤로도 이어져 있는지 좀처럼 끊이질 않았다.

“저기도 작품이 있나 보군.”

데미안 카터가 흥미롭게 주변을 관찰했다.

“설마요. 이제 막 시작되었는데 저렇게 많은 사람이 몰릴 리 없습니다. 아마 힌트를 주는 곳 아닐까요?”

“힌트?”

“네. 문제를 맞히면 작품과 작가를 알려주는 이벤트도 있다고 합니다.”

“오오. 그럼 우리도 가보세.”

“예?”

“축제 아닌가. 즐겨야지.”

영국 예술을 사랑하고 내년 데미안 카터 기획전을 노리는 맷 브라운은 당황했다.

그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자 이번 일정을 함께하기로 자처했지만, 데미안 카터는 위대한 예술가가 보이는 아우라나 근엄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무얼 하나. 서두르세.”

“아, 예. 예.”

데미안이 재촉하자 맷은 어쩔 수 없이 발을 옮겼다.

데미안이 입구를 지나치자 맷이 또 한 번 당황하여 물었다.

“바로 안 들어가십니까?”

“다들 줄 서 있지 않나.”

“……그게.”

예술계 최고 중요 인사 데미안 카터가 입장하겠다는데 SNBA가 제지할 리 없었다.

“왜. 화장실이 급한가?”

“아닙니다.”

맷은 말을 삼키곤 데미안을 따라 줄 끝을 찾았다. 건물 모퉁이를 돌아서도 한참을 걷고 나서야 차례를 기다릴 수 있었다.

“정말 기대되는구만. 혹시 알고 있나? 내가 케임브리지 학부생일 때 퀴즈왕을 했다는 걸.”

“그러셨습니까?”

“하하. 힌트 걱정은 접어두게. 아마 이벤트 취지상 어려운 문제를 내진 않을 테고 지극히 상식적인 수준에서 낼 걸세.”

데미안은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맷은 상상과 다른 모습의 거장에게 당황하던 차, 앞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누구 작품인데?”

“몰라. 근데 진짜 대박이래. 봐.”

“그러게. 여름 너울? 이게 제목이야?”

“어. 알렉스 알지? 그 사람은 작품 감상하느라 방송도 꺼버렸대.”

“그 돈 밝히는 사람이?”

“그러니까.”

대화를 듣던 데미안과 맷이 시선을 마주했다.

“퀴즈 이벤트가 아니라 전시관이었던 모양일세.”

아르누보 공모전은 워낙 많은 작품이 전시되어 있고, 상금을 얻으려면 작품을 찾아다녀야 했기에 한 장소에 머물러야 할 이유가 없었다.

때문에 데미안 카터의 작품이 전시된 갤러리조차 줄을 서서 기다리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맷은 앞사람의 대화를 믿을 수 없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선생님.”

데미안 카터의 작품도 이러지 못했다고 말하려던 맷이 순간 말을 삼갔다.

존경하는 거장에게 실례되는 말을 할 순 없었다.

“혹시 모르지. 베이컨이나 샤라가 아주 근사한 작품을 내놨을지.”

“아.”

맷은 또 한 명의 천재 예술가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태생은 비록 아일랜드이나 그 역시 자랑스러운 대영제국의 일부였다.

“베이컨 선생님의 작품이라면 기대가 됩니다.”

“하하.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워낙 독특해서 찾기만 한다면야 알아볼 수 있을 텐데.”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30분이나 나누고서야 갤러리에 입장할 수 있었다.

갤러리 내부에 전시된 여덟 점의 작품은 보안직원들과 안전선으로 보호받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한 작품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장 작품을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데미안과 맷은 아쉬움을 달래며 다른 작품을 감상했다.

“아! 선생님.”

“오오. 루카스 아닌가.”

“그렇습니다.”

언어와 관념의 관계성을 표현한 <크게 벌린 입>은 독일 화가 루카스 슐츠의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난 작품이었다.

“언제 봐도 강렬한 이미지구만.”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크게 벌린 입>을 감상했다.

그러나 맷은 당황했다.

루카스 슐츠의 작품을 보기 위해 이 많은 사람이 몰려든 것이라면 일견 납득할 수 있었다.

그 역시 오랜 시간 명성을 쌓은 훌륭한 화가이니 그럴 수 있었다.

하나 이 갤러리 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전부 한 작품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인가.

만일 그렇다면 두 거장의 작품을 한 갤러리 안에 전시한 SNBA의 기획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했다.

“이제 움직이는구만.”

데미안이 발을 옮겼다.

맷도 잰발로 조금씩 움직여 마침내 화제의 작품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

너울진 바다였다.

생략해서 표현한 물고기가 힘차게 헤엄을 치고 있었다.

물고기 떼에 부딪혀 생긴 하얀 포말이 마찬가지로 일정한 패턴을 이루고 있었다.

자세히 보기 위해 얼굴을 가까이하면 물고기가 펄떡이는 듯하여 마치 파도가 이는 착시 현상이 일어났다.

‘어떻게.’

착시 현상이 놀랍지는 않았다.

맷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단순한 패턴이 하나의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점이었다.

너울진 바다를 보는 맷은 가슴이 먹먹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파도가 닿을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움.

그것은 분명 그리움이었다.

“이유가 있었구만.”

데미안 카터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여름 너울>을 살폈다.

현대 미술의 거장으로 손꼽히고 많은 작품을 접한 그였으나, 감정을 이토록 생생히 전달하는 회화는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파도의 거품을 보게. 꼭 붓처럼 보이지 않는가?”

“예?”

맷이 다시 한번 <여름 너울>을 살폈다.

붓 자국을 의도적으로 남긴 흰 거품이 데미안의 말대로 붓처럼 보였다.

“난 저게 아르누보 공모전에 참가한 예술가들의 붓처럼 보이네만.”

“…….”

“모두가 아름다움을 추구하지만 좀처럼 닿을 수 없지. 그러나 저 붓들이 만든 파도는 바다 끝에 이르지 않겠나?”

고훈은 <여름 너울>을 통해 부모를 향한 그리움을 표현했다.

비록 다신 만날 순 없어도, 닿을 순 없어도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붓칠 한 번, 한 번이 파도가 되어 저 끝에 닿으리란 희망을 담은 작품이었다.

그러한 정황을 모르는 데미안 카터에게는 수많은 붓 자국이 미(美)를 추구하는 예술가를 표현하는 것처럼 다가왔다.

그 애잔한 마음이 사무쳤다.

“정말 대단하구만. 난 솔직히 이만한 심상을 전달하는 회화는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네.”

“……누구 작품인지 알아보시겠습니까?”

“흠.”

데미안이 턱을 쓸며 고민한 끝에 입을 열었다.

“과감하면서도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 쓴 붓 터치. 적은 색을 효과적으로 배치하는 감각. 원근법이 무시된 구도.”

맷이 침을 꿀꺽 삼켰다.

“빈센트 반 고흐 같지 않나?”

“예?”

“하하! 농담일세. 그러고 보니 저 패턴을 보면 짐 워런도 보이는구만. 아이디어를 표현하는 방식은 꼭 개념미술 같기도 하고.”

“…….”

“아마 이 작품이 이번 대회 가장 주목해야 할 작품이지 않나 싶네.”

맷이 고개를 끄덕였다.

탈인상주의의 반 고흐, 착시 미술의 짐 워런, 개념미술과 패턴이 어우러진 이 작품의 주인공을 도대체 가늠할 수 없었지만, 분명 화제가 될 만한 작품이었다.

“가지고 싶구만.”

데미안은 다시 한번 <여름 너울>을 살폈다.

* * *

아르누보 공모전 개막일이 저물어갈 즈음, 아르누보 공모전 공식 홈페이지와 SNS는 두 작품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하나는 착시 효과로 아련한 기분을 들게 하는 <여름 너울>이었고 또 하나는 이국적인 색채감으로 숭고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미(Beauté)>였다.

“빨리. 빨리 와 봐!”

아르누보 공모전 앱을 보고 있던 차시현이 고훈을 재촉했다.

“이것만 먹고.”

“지금 피자 먹을 때가 아니야!”

“뭔데.”

답답한 마음에 소파에서 일어난 차시현이 포테이토 피자를 먹는 고훈 앞에 스마트폰을 들이밀었다.

실시간으로 조회 중인 투표 현황이 나타나 있었다.

2028 아르누보 공모전 투표 현황

1st <미(Beauté)>

득표: 121,809(21.0%)

2nd <여름 너울>

득표: 114,849(19.8%)

3rd <이별>

득표: 110,788(19.1%)

고훈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들고 있던 포테이토 피자 조각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2등이야! 2등!”

차시현의 외침에 피곤한 나머지 침대에 쓰러져 있던 고수열과 방태호가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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