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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반 고흐-186화 (141/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186화

37. 개벽(4)

어린 몸이라 과보호를 받는 기분이다.

사실 사람이 많지 않았더라면 큰 문제가 아니다.

고작 몇십 미터 떨어진 곳에 가서 빵 하나 사는 일이 무슨 대수라고.

함께 움직이니 민망하다.

“우리끼리 가도 되는데. 그치.”

차시현이 귓속말했다.

“…….”

다시 생각해 보니 방태호가 걱정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남이 보기엔 나나 이 녀석이나 물가에 내다놓은 아이처럼 보일 것이다.

“왜?”

“아니야.”

할아버지와 방태호가 힘들지 않도록 앞으로는 조금 참아야겠다.

“네 개 주세요.”

방태호가 에끌레어를 주문했다.

한 발 떨어진 곳에서 기다리던 중 차시현이 물었다.

“이거 먹고 싶었던 거야?”

“초콜릿이 있잖아.”

“배부를 것 같은데.”

“금방 소화돼.”

건강하고 어린 몸이 좋은 건 뭘 먹어도 금방 소화가 된다는 점이다.

아무리 많이 먹어도 부대끼는 일이 없다.

“여기.”

“감사합니다.”

방태호가 에끌레어를 하나씩 나눠주었다. 포장지 너머로 푹신한 질감이 느껴진다.

맛은 어떨까.

“합.”

한 입 크게 베어 먹자 농밀한 초콜릿 무스가 끈적하게 달라붙는다.

빵은 얼마나 부드러운가.

씹자마자 녹아내린다.

인제 보니 슈크림을 길게 만들어 초콜릿 무스를 얹은 빵이다.

눅진한 초콜릿과 슈의 부드러운 식감 아래, 휘핑크림이 터져 나온다.

“맛있다!”

차시현도 감격한 듯 눈을 빛낸다.

“이런 데서 만날 줄은 몰랐네.”

누군가 말을 걸었다.

돌아보니 열셋이나 열네 살 정도 먹었을까.

살구색 블라우스에 녹색 리본, 같은 색상의 플리츠 치마를 입은 여자애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다.

하얀색에 가까운 밝은 금발이 눈에 띈다.

“나?”

“그래. 너.”

주변을 둘러보고 확인차 나를 가리키자 불쾌한 듯 노려본다.

“블랑쉬 파브르다.”

차시현은 아는 모양이다.

“알아?”

“어제 보여줬잖아. 아, 잠들었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의아해하니 파브르가 다가왔다.

“블랑쉬 파브르. 예술가야.”

본인을 당당히 예술가로 소개한다.

어린아이가 강단이 제법이다.

“고훈.”

“알고 있어.”

어쩌라는 거지.

블랑쉬 파브르가 내 눈을 노려보며 말했다.

“너도 앙리 마르소 연설 듣기 싫어서 나왔지?”

에끌레어를 먹고 싶어서 나왔다.

“아니. 이거 먹.”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살면 그런 말을 해? 너 그 사람이랑 친한 것 같던데 같이 놀지 마.”

사이가 나쁘진 않지만 그렇다고 친한 건 아닌데 다들 가까운 사이로 보는 모양이다.

어쩌면 앙리 마르소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 더 그렇게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아르누보 공모전 참가했다며?”

“했어.”

“그 남자한테 톡톡히 보여줘. 자기만 예술 하지 않는다고.”

묘하게 고압적인 것은 차치하고 어린아이가 말을 제법 똑 부러지게 한다.

“물론 나도 그럴 생각이야. 반드시 우승해서 프랑스에는 앙리 마르소뿐만 아니라 블랑쉬 파브르도 있다는 걸 보여줄 거야.”

“그래. 힘내.”

프랑스를 넘어 세계적인 예술가로 자리를 확고히 한 앙리 마르소를 상대로 기죽지 않고 도리어 목표로 삼는 아이가 기특해서 응원했다.

“뭐야?”

“뭐가?”

“응원하면 안 되지. 너도 참가했잖아.”

공모전에 참가한 것과 응원하는 일이 무슨 관계인지 잠시 고민하던 차, 아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면 네가 우승한다고 확신하는 거야?”

“유명한 사람 많이 나왔으니까 힘들지 않을까.”

작품은 본 적 없지만 데미안 카터 같은 성공한 작가도 나온다고 들었다.

“무슨 말이야? 그런 자신감도 없어서 무슨 일을 하겠어?”

대화하기 조금 피곤한 아이다.

“그래. 서로 열심히 해보자.”

“그렇게 나와야지.”

팔짱을 끼더니 콧김을 내쉰다.

자리로 돌아가고자 뒤도니 방태호가 싱글싱글 웃는다.

“실제로 보니 이미지랑 다르네.”

“어떻게 알아요?”

“어린 나이에 독특한 작품을 발표해서 프랑스에선 주목받고 있거든.”

어린 나이에 대단하다.

“어떤 작품 하는데요?”

“저.”

차시현이 옷자락을 당겼다.

“왜?”

“쟤 따라와.”

고개를 돌리니 블랑쉬 파브르가 나를 빤히 보고 있다. 따라오는 거라면 당황하는 기색이라도 보일 텐데, 당당한 걸 보니 차시현이 착각한 모양이다.

“같은 길인가 보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방태호에게 다시 물었다.

“그림 그려요?”

“그림이라고 해야 할지. 넓은 의미론 그림이지. 곤충을.”

“봐. 자꾸 따라오잖아.”

차시현이 이번에는 나를 돌려세웠다. 파브르와 또 시선을 마주쳤다.

아무래도 저 아이가 신경 쓰이는 듯해서 먼저 가라고 권했다.

“먼저 갈래?”

“아니.”

뭐지.

차시현의 추측이 맞나 싶어 확인차 물었다.

“혹시 할 말 있어?”

“아니.”

역시 억측이었다.

“미안. 따라오는 느낌이라서.”

“맞아.”

“뭐가?”

“따라가는 거.”

“……왜?”

“잃어버렸어. 길.”

또 팔짱을 끼고 콧김을 내뿜는다.

“작품 보러 가지? 아빠가 찾으러 올 때까지 같이 다녀.”

어디서부터 따져야 할지 모를 정도로 엉망진창이다.

“아버지한테 전화하면 되잖아.”

블랑쉬 파브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잃어버렸어.”

“아버지 전화번호 뭔데? 빌려줄게.”

“스마트폰에 저장해 뒀어.”

이 어린 아가씨가 대책 없다는 것만은 알겠다.

“어디서 잃어버렸는데? 원래 있던 자리로 가는 게 낫지 않아?”

“그러네.”

멀뚱멀뚱 서 있다.

“안 가?”

“모르니까.”

“…….”

“사람이 많은 곳이란 건 알겠는데.”

키가 큰 성인들로 가득하다 보니 아이 시점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는 생각하지만, 엄청난 길치 같다.

“우리랑 다니면 아버지가 걱정하실 거야. 아저씨 생각에는 경찰 아저씨랑 같이 있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때?”

방태호가 어른스럽게 나섰다.

백금발의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드릴게요.”

“그래. 잠깐만.”

방태호가 아르누보 공모전 개막식을 통제하기 위해 나온 경찰을 찾으려 하자 불러세웠다.

“사례는 꼭 할게요.”

“하하. 괜찮아. 별일도 아닌데.”

“부탁드리는 김에.”

“응?”

“그 빵 먹어도 돼요?”

“이거?”

파브르가 할아버지 몫의 에끌레어를 가리켰다. 방태호가 잠시 고민하다가 에끌레어를 넘겼다.

“그래. 이거 먹으면서 훈이랑 잠깐만 같이 있어. 훈아, 시현아. 어디 가지 말고 꼭 여기 있어야 한다?”

“네.”

방태호가 자리를 뜨고.

블랑쉬 파브르가 에끌레어를 물끄러미 관찰하더니 한 입 베어 물었다.

맛이 괜찮은지 그다음은 크게 먹는다.

배가 많이 고팠던 모양인데, 저 맛있는 걸 먹고 어떻게 표정 변화가 없는지 신기하다.

“나 저 누나 좀 무서워.”

차시현이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 * *

미술 전문 뉴튜브 채널을 운영하여 50만 명의 구독자를 확보한 알렉스가 파리를 찾았다.

일주일 동안 아르누보 공모전 관련 영상을 촬영할 겸 야외 방송을 진행하고 있었다.

“개막식도 봤겠다. 우선 가까운 곳부터 가보겠습니다. 다 찾을 수 있겠냐고요? 시테섬이 생각보다 넓지 않거든요. 한 건물에 여러 작품이 있지 않을까요? 일주일이면 어지간한 작품은 다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알렉스가 채팅창을 보다가 앓는소리를 냈다.

“에이. 어떻게 다 맞혀요. 노력은 해보겠는데, 사실 1,700명 중에 무명 작가도 있고 해서 다 맞히는 건 무리예요. 100명? 100명 정도는 가능하겠다.”

└[작은 고양이 님께서 10달러 후원하셨습니다.]: 500명 맞히면 500달러. 못 하면 일주일 동안 하루에 영상 두 개. 콜?

“500명? 에이. 왜 이러세요. 500명을 어떻게 맞히고 하루에 영상 두 개씩 어떻게 올려요. 저 죽어요.”

└[작은 고양이 님께서 10달러 후원하셨습니다.]: 1,000달러.

“하겠습니다! 까짓것 일주일 안 자면 되는 거죠.”

큰돈이 걸린 미션을 받은 알렉스가 흥분하며 주변을 촬영했다.

“여기가 예전에는 다 식당이었거든요. 근데 지금은 다 작은 갤러리로 되어 있네요. 작품 찾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아요.”

대로 옆으로 쭉 이어진 건물은 대부분 SNBA 로고가 붙어 있었다.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나오자마자 큰길을 따라 갤리리가 이어진 덕에 어렵지 않게 작품을 찾을 수 있었다.

첫 번째 갤러리에 들어선 알렉스가 감탄했다.

세계적인 축제답게 이미 많이 사람이 몰려와 내부는 북적대고 있었다.

“처음부터 엄청난 작품을 찾았네요.”

크게 벌린 입이었다.

이와 잇몸, 혀와 편도와 목젖 등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는데, 어금니로 향할수록 어두웠고 앞니로 올수록 하얀색으로 색이 차츰 엷게 칠해져 있었다.

혀 또한 안쪽 색이 선명했고 바깥쪽으로 나올수록 옅어졌다.

“루카스의 작품입니다. 우리가 말을 내뱉는 순간 의도가 달라짐을 표현한 것 같네요. 에이, 뻔하죠. 루카스 작품은 정말 많이 봤기 때문에 금방 알아봅니다. 관념과 언어의 관계성은 무조건 루카스예요.”

다음 작품, 그다음 작품을 보던 알렉스는 어느 순간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음을 느꼈다.

최대한 많은 작품을 찾아야 하는 아르누보 공모전에서 사람들이 어느 한 작품 앞에 멈춰 섰다는 사실이 쉽게 납득되지 않았다.

“지금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확인하기가 어렵거든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떤 작품 때문에 다들 넋을 놓고 있나 저도 궁금하네요.”

└프랜시스 베이컨 아님?

└누구 작품인지 맞히려고 그러는 건가?

└졸립다.

└답답해요. 다음 거 보러 가요.

└데미안 카터 작품은 어디 있지?

“데미안 카터 작품은 좀 넓은 곳에 있을 것 같아요. 설치 미술은 아무래도 공간이 확보되어야 하니까. 아마 여긴 없을 거예요. 답답하시겠지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아, 그러네. 맥스 님은 시카고에 사시지. 완전 새벽이겠네. 아, 좀 움직인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사람들이 주춤주춤 움직이기 시작해 틈을 파고든 알렉스는 순간 카메라를 놓칠 뻔했다.

‘이게 뭐야.’

순간적으로 그림이 울렁이는 듯한 착각이 들고 동시에 알 수 없는 그리움이 밀려들었다.

“…….”

알렉스는 방송도 잊은 채 입을 벌리고 가만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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