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185화
37. 개벽(3)
아르누보 공모전 개막일.
개막식에 초청받아 할아버지, 방태호, 차시현과 노트르담 대성당을 찾았다.
오는 길에도 이미 공모전을 즐기는 사람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대성당 앞은 인파로 가득하다.
“데미안 카터 작품은 어디 있지?”
“내일이면 인터넷에 다 나올걸?”
“상금이 걸렸는데 그런 걸 올리는 사람이 있어?”
“상금보다 조회 수가 더 좋은 사람들 있잖아. 뉴튜버라든가.”
“아, 그러네.”
친구로 보이는 두 사람이 지나가며 하는 대화를 들었다.
나도 영상을 찍어야 하나 싶다.
우리나라 사람이 많긴 하지만 구독자 중 30%가 유럽, 북아메리카 사람들이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최근 방송이 뜸해서 구독자가 조금 줄었는데, 이번 기회를 잘 노리면 상황이 나아질 것 같다.
“아저씨, 이거 방송.”
“응?”
방태호가 이미 카메라를 꺼내 노트르담 대성당을 촬영하고 있다.
“아니에요.”
믿음직한 소속사 사장님만 믿으면 될 것 같다.
“사람 진짜 많다.”
차시현이 감탄했다.
나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한자리에 모인 광경은 처음이다.
덕분에 시야가 좁다.
불어를 못 하는 차시현이 혹시라도 길을 잃을까 봐 걱정되어 손을 꼭 잡아주었다.
“걱정 마.”
녀석이 제법 의젓하게 웃는다.
“그래. 놓지 말고 꼭 잡고 있어.”
“응. 내가 지켜줄게.”
녀석이 나를 달랜다. 누가 누굴 안심시키려는지 모르겠다.
“혹시 길 잃으면 바로 전화해. 움직이지 말고. 모르는 사람 따라가지도 말고.”
“괜찮아. 그럴 일 없어.”
“그럴 일 있으니까 조심해. 길 잃고 스마트폰도 잃어버리면 어쩌게.”
“우와!”
노파심에 잘 충고하던 중 차시현이 그나마 시야가 트인 센강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노란 오리 가족이 평화롭게 소풍을 즐기고 있다.
아기 오리들도 크지만 엄마 오리는 키가 4m는 될 것 같다.
어릴 때 어머니가 목욕탕에 넣어준 귀여운 장난감이 저렇게까지 크니 조금 위협적이다.
“귀엽다아.”
“구경하는 건 좋은데 막 달려가면 안 돼.”
자꾸 잔소리하게 되는데 어쩔 수 없다.
나와 할아버지를 믿고 아들을 맡긴 차시현의 부모를 위해서라도 잘 챙겨야 한다.
“저기 봐! 펭귄도 있어!”
폴짝폴짝 뛴다.
“신혼여행 왔을 땐 화재 때문에 제대로 구경 못 했는데 정말 멋지네요.”
“그러게나 말일세. 저평가받긴 해도 노트르담 대성당이 없었다면 공간 활용 장식이 몇백 년은 뒤처졌을 걸세.”
“벽 날개 공법 말씀이시죠?”1)
“음. 어쩔 수 없이 붙였지만 그나마도 장식품으로 만든 장인정신은 본받아야 할 거야. 저 섬세한 표현 보게나.”
“복구한단 말은 들었는데 생각보다 잘한 모양입니다.”
“그 장인정신을 이어온 이들의 노력 덕이지. 듣기로는 기존 자재를 최대한 재활용했다더군.”
할아버지와 방태호도 이야기 꽃을 피우며 파리 관광을 만끽하고 있다.
나라도 정신 차리지 않으면 신이 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 녀석을 챙길 사람은 없다.
차시현의 손을 꼭 잡았다.
“빵 드세요! 갓 만든 빵 드세요!”
대성당 앞 광장으로 들어서자 센강과 마주한 작은 공원에 점포들이 늘어서 있다.
평범한 노점상이 아니라 SNBA 로고가 붙은 부스에서 장사하고 있다.
프랑스 국립 예술 협회가 이것저것 준비를 많이 한 모양이다.
“…….”
초콜릿 무스를 듬뿍 올린 빵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에끌레어라는 이름인데 길에서 파는 빵치고는 4유로로 제법 비싸다.
무슨 맛일지 고민하던 차 차시현이 중얼거렸다.
“저거 타고 싶다.”
돌아보자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뭐 있어?”
시선을 따라가니 하늘에 떠 있는 비행선을 볼 수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상당히 커 보인다.
“타고 싶지?”
“탈 수 있나?”
“못 타?”
“저기선 작품을 볼 수 없잖아. 홍보용 아닐까?”
“아, 그럴 수도 있겠다.”
다시 천천히 관찰하니 옆면에 뭔가 적혀 있는 것 같긴 한데 너무 높이 떠 있어서 잘 보이지 않는다.
“이건가 봐.”
차시현이 스마트폰을 보여주었다.
오늘부터 아르누보 공모전이 이어지는 일주일간 파리 상공에 아르누보 공모전을 홍보하는 비행선이 뜬다는 기사다.
아래에서 보느라 몰랐는데 왼쪽 면에 아르누보 공모전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고 오른쪽에는 마르소 가문의 문장이 박혀 있다.
앙리 마르소의 물건 같다.
SNBA가 최소 비용, 최대 효과의 마케팅을 하고 있단 기사를 봤는데 마르소가 없었더라면 저런 걸 띄울 생각을 못 했을 것이다.
“훈아, 앞을 봐야지. 시현이도. 길 잃으면 큰일나.”
할아버지가 뒤에서 나와 차시현의 어깨를 감싸며 말씀하셨다.
* * *
전 세계가 주목하는 가운데.
노트르담 대성당 광장에서 아르누보 공모전 개막식이 시작되었다.
단상에 오른 프랑스 국립 예술 협회장 셰바송 씨몽이 내빈에게 인사했다.
“얼마 전 우리는 또 한 번의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셰바송 씨몽의 목소리는 나이를 생각지 못할 정도로 정력적이었다.
“70만 명의 예술인은 비로소 그들이 응당 누릴 권리를 되찾았습니다. 이는 백여 년 전 이곳 파리에서 수많은 예술인이 바라던 바입니다.”
권력으로부터의 독립.
생존으로부터의 자유.
예술이 오직 예술로 존재하기 위해 투쟁해 온 결과, 프랑스 예술인들은 앵테르미탕의 은혜 속에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목표는 아닐 것입니다.”
셰바송 씨몽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모든 양식이 해체되고 모든 예술가에게 자유가 부여된 지금, 우리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아르누보 공모전은 그것을 확인하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예술을 사랑하는 노인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예술인이 자유 속에서 각자의 미학을 추구하길 바랐다.
그 과정에서 발생할 행복과 기쁨 슬픔과 좌절 그럼에도 다시금 일어나는 용기와 의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뛰었다.
예술가와 시대, 대중의 공명이야말로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이자 이상이었다.
“존경하는 예술 애호가 여러분. 시테섬 안에 잠든 태동의 씨앗을 발견해 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기쁨이 햇살이 되고, 여러분의 눈물이 단비가 되어 줄 겁니다. 여러분이 선택한 씨앗이 잎을 피우는 순간 이 시대가 규정될 것입니다.”
셰바송 씨몽의 생각에 동조하는 사람도, 그러지 않은 사람도 있었지만 예술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은 모두에게 전달되었다.
노인이 힘주어 외친 메시지에 모두가 박수를 보냈다.
“이 뒤는 프랑스의 자랑! 자유를 선사한 에로이카! 앙리 마르소 군에게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셰바송 씨몽이 앙리 마르소를 언급하자 기자들이 분주해졌다.
카메라 셔터 소리가 산발적으로 났다.
“앙리! 앙리!”
셰바송 씨몽의 소개대로, 프랑스 예술계에 자유를 선사한 영웅, 앙리 마르소의 등장에 사람들이 열광했다.
곱슬머리 사이로 비치는 에메랄드 눈빛은 순식간에 좌중을 압도했다.
셰바송 씨몽은 그런 앙리 마르소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자리를 넘기고 뒤로 물러섰다.
앙리 마르소는 주변을 쭉 둘러본 뒤 입을 열었다.
“셰바송 영감이 실수했어.”
셰바송 씨몽의 연설로 잔뜩 달아올랐던 열기가 차게 식었다.
“시대는 규정될 수 없고. 시대를 규정하는 사조란 존재하지 않는다.”
셰바송 씨몽의 연설이 공감하지 못했던 이들이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르네상스, 바로크, 고전, 인상주의 등 미술사는 사조로 분류해 시대를 설명했지만, 그러한 방법으로는 예술을 깊고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더군다나 가치의 다원화가 이루어진 지금 예술은 어느 한 방향으로 흐를 수 없었다.
“사조란 각 시대에 위대한 예술가를 설명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야.”
앙리 마르소는 르네상스 시대부터 20세기까지 각 시대를 대표하는 거장들을 언급하며 사조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그것을 행한 예술가가 있었음을 강조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역시 정의 못 할 것 없지.”
“그럼 마르소 씨는 이 시대를 어떻게 규정하시겠습니까!”
예고되지 않은 질문을 받은 앙리 마르소가 눈을 찌푸렸다.
“몰라서 물어?”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거침없는 앙리 마르소의 화법에 기자가 당황하여 주춤했다.
그러나 흔치 않은 기회였기에 용기를 내 재차 물었다.
“동시대 예술이 이뤄지는 지금을 어떻게 설명하실지 여쭸습니다!”
앙리 마르소가 턱을 들었다.
“동시대?”
기자가 침을 삼키자 프랑스의 영웅이 이죽거리며 답했다.
“백 년 뒤에는 앙리 마르소의 시대로 소개될 거다.”
“…….”
“…….”
정적이 흐르던 끝에.
앙리 마르소의 열렬한 지지자들과 프랑스 예술인들이 좌석에서 일어나 열광했다.
“앙리! 앙리!”
“앙리! 앙리!”
* * *
앙리 마르소를 추종하는 사람이 많은 반면 그를 고깝게 여기는 이도 많은 이유는 하나.
다른 사람이 하면 미친 소리인데, 앙리 마르소가 하니 그럴듯한 게 원인이다.
사실 자신이 누군지 끊임없이 탐구하는 마르소의 작품은 인간성이 소멸되는 현재 많은 이들에게 위안을 주고 있다.
착취 구조로 인해 자존감마저 박탈된 이들은 앙리 마르소를 보고 힘을 얻는다.
뿐만 아니라.
할아버지가 활동을 멈추면서 침체되었던 회화계를 장미래 등과 부흥시켰으며, 앵테르미탕을 정상화하는 등 그는 현대판 구스타프 클림트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여러 면에서 대단한 일을 해나가고 있다.
객관적인 사실이다.
다만, 여러 예술인이 꿈에 도전하는 아르누보 공모전의 축사로는 부적합하지 않을까.
흥분의 도가니가 된 개막식은 파리 시장, 세계 미술가 협회장 등이 차례로 나와 연설을 이어가고 있다.
할아버지도 차례가 예정되어 조금 전에 무대 뒤로 향하셨다.
“이거 언제까지 해요?”
“글쎄. 점심 전에는 끝나지 않을까? 아, 그러네. 12시까지야.”
방태호가 행사 일정을 확인해 주었다.
축하 무대 같은 것도 껴 있는 모양인데, 크게 관심 없다.
그보다는 점심을 먹기 전에 대성당 앞 작은 공원에서 팔던 에끌레어를 먹고 싶다.
“저 빵 좀 사올게요.”
“지금?”
“네. 저쪽에 팔던데.”
“조금 참으면 안 돼? 지금 먹고 싶어?”
“점심때 먹으면 점심을 조금 먹게 되잖아요.”
완벽한 논리인데 방태호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럼 내가 사다 줄게. 어디 있는데?”
어디 있는지 가리키려 해도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안 보인다.
“괜찮아요. 빨리 다녀올게요.”
“안 돼. 길 잃으면 어쩌려고.”
“맞아. 가지 마.”
차시현도 나서서 말린다.
“여기 지리는 잘 알아요. 말도 통하고. 걱정 마세요.”
“아니야. 그럼 같이 가자.”
“시현이 혼자 두기 그렇잖아요. 무슨 일 생기면 곧장 연락할게요.”
이러다간 할아버지 연설 시간에 늦을 것 같아서 다 같이 가기로 했다.
* * *
1)Flying buttress.
높이 솟은 고딕 건축물의 고질적인 문제는 벽을 높이 쌓으면서 생기는 하중이었다.
콘크리트와 같은 소재가 없었던 과거에는 하중을 받아 벽면이 갈라지는 등의 문제가 발생했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건물 벽면에 날개와 같은 지지대를 설치하였는데, 이조차 장식처럼 꾸민 덕에 노트르담 대성당과 같이 멋진 건축물이 탄생할 수 있었다.
벽날개 기법으로 번역된 이러한 양식은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처음 도입되었다고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