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183화 (138/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183화

37. 개벽(1)

2028년 11월 24일.

미술계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공모전을 앞두고 잔뜩 달아올랐다.

총상금 250만 유로.

상위 입상자 열 명에게는 루브르 박물관 특별 전시회가 보장되었기에 아르누보 공모전은 모든 예술인이 바라는 꿈의 무대였다.

세계 미술계 소식을 전하는 교양 프로그램 ‘대화를 나눠요’는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아르누보 공모전을 특집으로 다뤘다.

-안녕하십니까. 시청자 여러분.

사회자 우진이 인사했다.

-다음 주 목요일부터 시작되죠. 오늘부터 3주간 아르누보 공모전 관련 소식을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함께해 주실 두 분 소개하겠습니다.

우진이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젊고 머리가 없는 남자를 보았다.

-미술 전문 뉴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계신 알렉스 씨, 시청자 여러분께 인사해 주시죠.

-안녕하세요. 알렉스 팩토리의 알렉스입니다.

-뉴튜브 영상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시네요.

-아, 하던 대로 해도 되나요?

-시청자 분들도 그렇게 해주길 기대하실 겁니다.

알렉스가 고개를 갸웃거려 재차 묻자 우진과 담당 PD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돌이 여러분 보고 있나요? 아무도 안 믿었죠? 하지만 보세요. 제가! 드디어! CBS에 출연했습니다!

우진이 알렉스의 인사를 보곤 잠시 간격을 두었다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뉴욕 타임즈의 아냐 스트레제만 씨를 모셨습니다. 반갑습니다, 스트레제만.

-안녕하세요.

검고 웨이브 진 긴 머리가 매력적인 여성이 여유롭게 웃으며 인사했다.

-시청자 여러분께 인사 부탁드립니다.

-뉴욕 타임즈 기자 아냐 스트레제만입니다.1)

-주로 어떤 일을 맡고 계신가요?

-그 주에 가장 주목할 만한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번 주와 다음 주는 아르누보 공모전이 되겠죠.

-두 분 모두 귀중한 시간을 내주신 데 감사드리며, 바로 진행해 보도록 하지요. 스트레제만?

-네.

-유럽뿐만 아니라 전 세계 예술가들이 환호하고 있던데. 아르누보 공모전이 대체 무엇입니까?

아냐 스트레제만이 차분하고 명확한 목소리로 답했다.

-프랑스 국립 예술 협회가 주관하는 국제 공모전입니다. 올해부터는 모든 참가자가 익명으로 작품을 전시하게 되는데, 관람객 전원이 심사를 맡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죠.

-올해부터라. 진행 방식을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요?

-미술 시장에서는 예술품의 가치가 누가 만들었냐에 따라 정해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타파하고 예술품 본연의 가치를 찾아보자는 뜻으로 풀이합니다.

-그렇군요. 알렉스 씨, 얼마 전 아르누보 공모전에 참가하는 사람을 정리하셨죠?

-제정신으로는 못 할 일이었어요. 완전 미친 일이었죠.

-모든 사람이 참가 의사를 밝힌 건 아니지만 유명한 이름도 몇 보입니다.

-물론이죠. 피테르, 루카스, 샤라 등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예요.

-그중에서도 화제를 끈 인물이 있다고요.

-고훈, 프랜시스 베이컨 그리고 데미안 카터를 빼먹을 순 없죠.

-데미안 카터? 설마 영국의 그 데미안 카터입니까?

우진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21세기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했다고 알려진 거장 데미안 카터가 참가했단 소식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맞아요. 터너상을 받은 그 데미안 카터.

-정말 놀랍네요. 그만한 인물이 아르누보 공모전에 참가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알렉스가 눈을 깜빡이다가 물었다.

-방송용으로 할까요? 진짜로 할까요?

우진이 헛웃음 지으며 말했다.

-정확한 정보를 전달해야 하니까요. 편하게 말씀해 주시죠.

-요즘 거래가 없던데 돈 좀 끌어보겠단 뜻이겠죠. 사실 거장이라고 해도 한물갔잖아요. 지금은 앙리 마르소의 시대죠.

-……오.

알렉스의 거침없는 발언에 마주 보고 있던 아냐 스트레제만이 나지막이 반응했다.

설마하니 일정 선은 지킬 것으로 믿었던 우진은 잠시 굳어 있다가 프로 정신을 발휘해 정면 카메라를 응시했다.

-방금 알렉스 씨의 발언은 대화를 나눠요 제작진과 무관함을 밝힙니다.

TV를 시청하던 앙리 마르소가 혀를 찼다.

옳은 말을 하는 사람에게 선을 긋는 진행자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앙리 마르소는 케일 주스를 홀짝이며 뉴튜브에 접속했다.

고훈의 뉴튜브 채널 핑구는 일주일 전에 게시된 영상 이후로 활동이 없었고 라이브 스트리밍은 한 달 전이 마지막이었다.

‘뭐 하는 놈이야?’

기껏 공부한 한국어가 쓸모없어진 앙리 마르소가 이를 바득 갈았다.

그때 아르누보 공모전 준비로 녹초가 된 미셸 플라티니가 실내화를 질질 끌며 들어섰다.

침대를 발견한 그녀는 그 위로 몸을 던졌다.

앙리 마르소는 눈썹을 찌푸리곤 죽은 듯이 쓰러진 연인을 보았다.

“씻고 자.”

“그를흠읍으.”

“뭐?”

미셸이 고개만 옆으로 돌렸다.

“그럴 힘 없다고.”

씻지 않은 사람과 함께 잘 순 없기에 앙리 마르소는 방을 옮기려고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미셸이 허리를 감싸 안는 바람에 그대로 앉아 있어야 했다.

“뭐야?”

“잠깐만 이러고 있을래.”

“불편하잖아. 비켜.”

“1분만 다물어 줄래?”

앙리 마르소가 입술을 씰룩거리곤 침대 협탁 위 시계를 확인했다.

59초, 58초, 57초.

40초를 세었을 때 미셸이 팔에 힘을 주었다.

앙리는 40초 뒤에 화장품이 묻은 잠옷을 버리고 그녀를 욕조에 던져 넣기로 마음먹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있고 싶다.”

“……얼마나.”

“10분? 아니, 한 시간?”

초를 세고 있던 앙리 마르소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정확히 말해.”

미셸이 침묵하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충전 다 될 때까지.”

미셸이 눈을 크게 뜨고 올려다보았다.

아르누보 공모전을 준비한 지난 두 달간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쳤기에 오늘 하루만큼은 앙리에게 위안을 받고 싶었다.

“내가 제대로 했나 싶어. 한다고 했는데, 그중에 소외되는 작품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

앙리 마르소가 일어나자 미셸이 한숨을 내쉬었다.

낭만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그가 이런 어리광을 받아줄 거라고 기대하지 말았어야 했다.

“어!”

미셸은 갑작스레 몸이 들려 깜짝 놀랐다. 허리와 오금을 받친 앙리 마르소를 올려다보곤 놀란 마음을 진정하지 못했다.

“뭐야. 뭐 하게?”

앙리 마르소는 무심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2층 거실 방에 딸린 욕실로 걸어가며 입을 열었다.

“목욕 준비해.”

-설정값 40도 온수 목욕 준비하겠습니다.

욕조에 물이 빠르게 차오르기 시작했다.

“야, 잠깐. 내려 봐. 씻을게. 씻는다니까? 야!”

물이 차오르는 욕조에 들어간 미셸이 황망해하며 고개를 들자 앙리 마르소가 잠옷을 벗곤 욕실을 빠져나갔다.

“…….”

미셸은 젖어버린 옷을 내려다보다가 욕실 문을 향해 외쳤다.

“야, 이 정신 나간 놈아!”

* * *

잠시 후.

뀍뀍-

앙리 마르소가 가져다준 러버덕 무리에 낀 미셸은 반쯤 포기한 상태로 목욕을 즐겼다.

하루 16시간 이상 이어온 강행군에 지친 몸은 금방 노곤해졌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욕조에 기대어 책을 읽는 앙리를 보았다.

“뭐 읽어?”

“융합 증착 모델링을 사용한 PLA 구조의 적층 제조법.”

“……어?”

“3D 프린터나 3D 펜 활용법이야.”

미셸이 욕조에 팔을 걸치고 그 위에 뺨을 댔다.

“3D 프린터로 뭐 만들게?”

“아니.”

“그럼?”

“3D 회화를 그릴 수 있는지 보고 있어. 그렇게만 되면 조각할 필요가 없으니까.”

“3D 펜이랑 뭐가 다른데?”

“허공에 붓칠한다고 생각해 봐. 물감이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굳는 거야.”

미셸이 입을 벌렸다.

“그게 가능해?”

“가능하게 해야지.”

캔버스 위 평면이 아니라 붓으로 그리는 조각이라니, 그런 일이 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그 불가능한 일에 진지하게 임하는 모습이 기특하고 대견했다.

“할 수 있으면 좋겠네.”

“어.”

앙리 마르소는 또 말이 없어졌다.

한동안 책장 넘기는 소리와 러버덕이 우는 소리, 물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만이 욕실을 채웠다.

“최악이었을지도 모르지.”

앙리가 뜬금없이 뱉은 말에 미셸이 피식 웃었다.

“뭐가?”

“아르누보 공모전.”

미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르누보 공모전이 가진 의의를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에, 그 부담감이 상당했다.

“그치.”

미셸이 힘없이 답했다.

모든 수단을 다 동원했지만 그것으로 모든 작품이 공평한 조건에 있을 순 없었다.

“네가 있어서 최선이 된 거야.”

앙리의 목소리가 책장 넘기는 소리와 함께 울렸다.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방식과 대규모 때문에 실패할 확률이 높았지만 앙리 마르소는 그것이 옳은 길이라고 판단했다.

미술이 소수 엘리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수가 함께 향유하는 주류 문화가 되길 바랐다.

때문에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기어이 일을 진행시켰고, 가장 신뢰하는 사람에게 그 역할을 맡겼다.

“지금으로선 그보다 더 나은 길은 없어.”

“그걸 어떻게 알아?”

“네가 한 일이니까.”

정신 나간 것처럼 보이는 남자는 가끔 이렇게 밑도 끝도 없는 말로 설레게 했다.

“부담스럽거든?”

“부담 없이 무슨 일을 해? 쉬운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어.”

미셸이 앙리의 곱슬머리를 빙글빙글 꼬며 말했다.

“가끔은 쉬어가도 괜찮아.”

“무슨 말이야.”

“훈이 작품도 멋지지만 난 당신 작품이 제일 좋아.”

미셸은 앙리 마르소가 3D 회화라는 비현실적인 일까지 고려할 정도로 몰려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

앙리 마르소가 책을 덮었다.

그는 지난 몇 주간 고훈의 <여름 너울>에게서 받은 큰 충격에 빠져 있었다.

언젠가는 자신이 선도하는 미술계의 흐름이 고훈에게로 넘어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일종의 두려움이었다.

예술가라면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일이나, 30대 초반의 젊은 그에게는 너무나도 일렀다.

“난 클림트가 아니야.”

앙리 마르소가 입을 열었다.

“자기에겐 없는 제자의 재능에 무너지고. 유한성에 절망해서 자기 화풍마저 저버릴 정도로 나약하지 않아.”

끊임없이 변화하려고 노력한 클림트를 높이 평가했던 고훈과 달리, 앙리 마르소는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가 마음 깊이 기억하는 구스타프 클림트는 <키스>까지였다.

“꼬맹이가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어. 내 작품을 할 뿐이야.”

너무나도 달라 보이는 두 사람이 서로의 작품에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모르는 걸까.

이야기를 듣던 미셸이 피식 웃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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